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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지음 / 반비 / 2025년 12월
평점 :
이 책은 다 읽고 나서도 책장 위에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한참동안 내 책상 위에 놓여있다.
접어둔 부분이 많아서 필사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
그러고 나서도 자꾸 손이 가고 마음이 가서 다시 펴보게 된다.
내가 공감하고 위로 받은 만큼, 책 속의 공감과 위로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도 유효하길.
이 책을 쓴 작가는 한국일보 기자였다.
힘들지 않은 직장인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기자라는 직업의 내밀한 사정과 그 치열함을 읽고 보니
끝장 낼 듯 덤벼 본 일도 없고 부딪쳐 싸우다 지쳐 울어본 경험도 없는 나는
상대적으로 너무 나약해보인다.
어느 직업이나 그들만의 세계가 있고 직업윤리가 있을 터인데
갈망하던 자리에 어렵게 자리잡고 보면
사명감, 혹은 소명 비스무레한 초심으로 중무장해 온 직업윤리가
손바닥에 쥔 모래처럼 사라져가는 걸 경험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절대 안 그럴 것 같았지만 사정상, 도리상, 시간상 등등의
핑계를 대어가며 살짝, 조금, 잠깐 선을 넘게 되는 경험,
그리고 거기서 자괴감을 느끼는가, 혹은 그게 사회생활인 거라고
촉촉히 젖어드는가에 따라 두 갈래 길이 내 앞에서 나눠질 것이다.
그렇게 숱한 갈림길에서 이런 저런 선택들을 하며 나도 지금에 이르렀을 뿐이다.
17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그만 둔 작가는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경험하고 느낀 자부심과
그 이면의 부끄러웠던 기억들까지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책 속에서) 지금은 눈뜨자마자 씻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리면서
기타도 배우고 책도 읽고 글도 많이 쓴다고 했다. (심지어 정말 잘 쓴다.)
나는 그럴 용기가 없으니 아직은 그냥 부러워만 해야겠다.
이 책에서 작가는 직업인으로서의 관점뿐만 아니라
엄마로, 시민으로, 여성으로, 글쓰는 사람으로, 자유인으로
다양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너무도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지적으로 엮어내고 있었다.
살면서 저지르는 실수들, 열심히 좇아왔던 꿈들, 숱한 실패들, 다시 갖는 희망들,
질 줄 알면서도 덤벼보는 용기, 그러다 처절히 패배한 후 상처를 핧는 법,...
그래서 이 책은 요약할 수 없다.(에세이이기도 하다.)
새점을 보듯, 마음이 어지러울 때 한 번 펴 보고, 그 페이지에 오래 머물게 되는
그런 책이었다.
세밀한 시선들.
내가 따로 필사해놓은 부분들 중 일부만 옮겨본다.
"세상에나, 제 발로 걸어들어간 곳에서 제대로 일을 해내기까지 그 오랜 시일이 걸리다니. 스스로 그곳에 갔다고 해서 저절로 그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니. 그러고 보면 부끄러움이란 이 간악한 인간종에게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훌륭한 교사란 말인가."(p.51)
"대한민국 유자녀 여성에게 일이란 누군가는 반드시 상처받는 삼각게임이다. 스스로 2급 트랙으로 후퇴하며 커리어를 만신창이로 만든 엄마가 상처받거나, 엄마 없이 외롭게 시간을 보내며 돌봄공백에 시달리는 아이가 상처받거나, 언제가 생의 최후일지 모르는 노년의 부모가 양육이라는 감옥에 갇혀 무너져내리거나, 셋 중 하나 혹은 둘이다."(p.73)
"출세란 흙 묻은 알사탕과도 같다. 사탕은 먹고 싶은데, 흙을 삼킬 수는 없다. 그래서 아예 안 먹는 길을 택했고, 세상에 맛있는 게 어디 사탕뿐이냐, 쫀디기도 먹고 아폴로도 먹는다. 하지만 자주 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이 일을 아직도 사랑하는데, 끝이 뻔하다."(p.75)
"실금. (...) 당장 산산조각을 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없었던 일로 하기엔 너무도 있었던 일이라서, 차곡차곡 내상으로 축적되는 사건들."(p.81)
"하우저는 (...) "우리는 우리 생애의 가장 거창하고 충격적인 좌절들로 인해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야심이 시들면서 함께 시들어간다." 고 말한다." (아르놀트 하우저 인용, p. 84)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분투를 통해서만 고귀해진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천부인권으로서의 존엄과 달리 인간의 고귀함은 획득형질이다."(p.200)
"고통은 우리를 연결해준다. 아니, 고통만이 우리를 연결해준다. (...) 그러나 고통이란 저마다의 불가침 영역이어서 상대의 승인 없이는 함부로 연결을 도모할 수 없다. 불행한 타인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지독한 자기애만을 보는 일은 얼마나 빈번한가. (...) 그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으며 마음을 전하려면 예민한 감성과 세련된 지성을 동원해야 한다."(p.216-217)
책 읽는 동안 멈춰 생각하는 지점이 많았다.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고 내 생각을 다듬게 되는 부분도 많았다.
다시 프롤로그로 돌아가면
"유리병에 커다란 돌멩이를 집어넣는다. 하나 더 넣는다. 또 하나 넣는다. 하지만 병을 가득 채우지는 못한다. 틈새의 빈 공간들은 오로지 작은 모래들로만 채울 수 있다. 내 인생엔 그 모래들이 없었다. 커다란 돌멩이들만이 덜그덕거리고 있었다"(p.12) 라는 고백이 나온다.
치열하게 살면서 남들이 좆는 성공과 욕망의 기준을 나 역시도 선망해오다
숨이 차 잠깐 쉬는 사이, 그 욕망이 내 것이 맞는지 생각해 볼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 속도, 그 욕망은, 나하고 맞지 않다는 걸 못내 인정하면서도
내가 갖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미련만 덕지덕지 남아
열심히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못나서가 아님을,
커다란 돌멩이는 몇 없어도 다양한 크기의 조약돌과 반짝이는 모래를
다채롭게 열심히 채워나가는 중일거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내가 완성할 유리병도 나름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나를 응원하며 <그저 하루치의 낙담> : 네이버 블로그
"종결감 sense of closure.(...) 종결 없이 끝내버린 생애사의 주요 사건들은 어딘가에 매복해 있다 돌연 우리를 가격한다. (...) 비겁하게 도망친 관계, 제대로 애도하지 않은 상실, 직면하지 않고 회피한 생의 진실은 원한 서린 귀신처럼 어느 모퉁이에서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P235
"엉겁결에 몸의 반쪽 정도는 제도 바깥으로 탈락된 무직자 신세가 되고 보니 인생이란 결국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할 때를 보내며 저마다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 단지 그뿐인 것 같다." - P85
"니가 올라가봐야 여기까지지, 그런 무력감. 30대 중반이 넘어가면 같은 이력서를 가지고도 출신 계급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서로의 삶이 명확한 분기점을 확인할 기회들이 부쩍 많아진다. 그 어리둥절한 무력감의 시기를 건강하게 잘 넘겨보내지 못하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심술과 역정이 덕지덕지 붙은 추한 노인의 얼굴이 되는 것뿐이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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