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국내 유일 명화 103점 수록 완역본) - 명화와 함께 읽는 ㅣ 현대지성 클래식 64
호메로스 지음, 페테르 파울 루벤스 그림,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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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당연히 책 <오디세이아>를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그러려고 보니 호메로스의 이전작품인 <일리아스>를 먼저 읽어야겠다는,

꼭 이럴 때 발현되는 의무감과 완벽주의 덕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함께 구매했고

(큰 맘 먹고) 순서대로 <일리아스>부터 읽기 시작했다.

​

이 오래된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번역가(전문가들)들의 손을 거쳐

얼마나 다양한 출판사에서 얼마나 많이 찍어냈을까.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일리아스만 해도 너무 다양해서

서점에서 여러 버전의 일리아스를 놓고

표지와 무게(뜻밖에 중요하다!), 번역(나에게 편안한 번역),

부록과 출판사 등을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내가 고른 책은 현대지성에서 나온 <일리아스>이다.

책 표지에 적힌 "인류 최초의 블록버스터"라는 말도

기대감을 확 끌어올렸다.

이 책은 내용과 관련된 명화들을 컬러로 수록해놓았는데

상상하기도 어려운 옛날에 만들어진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을까.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이기 때문에

그림 속에서 인물들을 찾아보고 얼마나 원전에 충실하게 표현되었는지를

감상해 보는 것도 또 다른 독서의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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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는 동안 엄청나게 많이 들어봤고

심지어 읽어보지도 않은 주제에 아는 척도 많이 하는 책 중의 하나가

호메로스의 작품들일 것이다.

실제로 읽어보니, 내가 알았다고 생각했던 건 지극히도 일부였고

그마저도 다 틀렸었구나, 라는 생각으로 겸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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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일리아스>는

'일리온에 관한 시'라는 뜻이다. 일리온은 트로이를 뜻하는데,

책에서는 트로이와 그리스 양쪽을 언급하는 단어들이 다양하게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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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정리하면,

  • 고대 그리스군 진영:

    • 아카이오스인, 아르고스인, 아르카디아인,...

    • 대표적 인물로 아트레우스의 아들인 아가멤논(사령관)과 메넬라오스 형제, 오디세우스, 아킬레우스(파트로클로스), 디오메데스, 네스토르, 큰 아이아스, 작은 아이아스,...

    • 그들을 편드는 신들: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 테티스(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헤파이스토스..

  • 트로이아군 진영:

    • 트로스인, 다르다니아인, 리키아인...

    • 대표적 인물로는 프리아모스의 아들인 헥토르(사령관)와 파리스(알렉산드로스)형제, 아이네이아스, 사르페돈,..

    • 그들을 편드는 신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 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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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지 10년째 되는 해의

첫 50일 간의 사건을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앞뒤 맥락을 이해하고 읽으면 훨씬 이해하기 쉬운데,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테에 방문했다가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와 사랑에 빠져(이것도 신들의 행위)

트로이아로 도망쳐 온 것이 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는 연합군을 이루어 참전했기 때문에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등 각지에 흩어져 있던 영웅들이 트로이아로 향한다.

하지만 트로이아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세어 10년 가까이 전쟁이 이어진다.

(이 책에서는 "명화와 함께 읽는 트로이아 전쟁의 배경"을 앞 부분에서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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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일리아스>의 시작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이다.

아킬레우스가 전리품으로 얻은 브리세이스라는 여자를

아가멤논이 데려가려 하면서(그것도 이유가 있긴 하다..)

그리스 군 내부에 불화가 발생하고 아킬레우스가 참전을 거부한다.

억울해하는 아킬레우스의 청을 들어주려고 그의 엄마인 테티스 여신이

제우스에게 간청하면서 인간의 전쟁에 신들이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

제우스는 아킬레우스가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돋보일 수 있도록

초반에는 트로스인에게 힘을 실어주려 한다.

"제우스는 빠른 발의 아킬레우스에게 영광을 주려고

트로스인과 헥토르가 승리하기를 바랐지만, 아카이오스인 백성이

일리오스 앞에서 전멸하기를 바라지는 않았고, 단지 테티스와

그녀의 대담한 아들에게 영광을 주고자 할 뿐이었다."(p.411)

​

하지만 그 뜻을 알리 없는 포세이돈은 아르고스인(그리스)이

"트로스인에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괴로워 제우스에게 격분"했고

인간의 모습으로 진중을 돌아다니며 아르고스인을 독려한다.

​

"이렇게 두 신이 끊을 수도 없고 풀 수도 없는 격렬한 전쟁과 전투의 밧줄을

양 끝에서 잡고 양쪽 진영 위에서 교대로 이쪽으로 끌어당겼다

저쪽으로 끌어당겼다 하는 가운데 많은 전사의 무릎이 풀렸다."(p.411)

이렇게 신들의 편이 나뉘어 다툼이 일어나면서

필멸의 인간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다.

신들 사이에 이전부터 켜켜이 쌓여 있던 감정적 앙금들도 드러나는데,

특히 제우스와 헤라(부부)의 싸움이 가관이다.

​

아킬레우스가 참전하지 않는 동안 그리스군은 트로스군에 밀리고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와 화해를 시도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를 보다 못해 아킬레우스의 절친이자 시종인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착용하고 전투에 나섰다가 전사하자

이를 계기로 분노와 복수심에 휩싸인 아킬레우스가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진다.

전쟁 장면은 생각보다 잔인하게 묘사된다.(영화보다 잔인했다고 느낀다.)

신의 아들인 아킬레우스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고

용감한 헥토르가 그에게 맞서지만, 결국 죽음을 맞는다.

​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도 분이 안 풀려서 그를 전차 뒤에 묶고

아침마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신 주변을 세 바퀴씩 도는 등 무서운 복수심을 표출한다.

신들은 살아있는 동안 그들을 섬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헥토르의 유해가

그런 식으로 모욕 당하는 것을 차마 보기 힘들어서,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시신을 가져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아킬레우스를 설득한다.

그렇게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이 난다.

​

호메로스는 주인공들의 성격을 직간접적으로 묘사하는데,

어느 하나 완벽하거나 부족하기만 한 인물이 없이 다채롭고 입체적이다.

아가멤논은 호전적이고 욕심이 많은 인물로 헬레네의 입을 빌려

"드넓은 땅을 다스리는 아트레우스이 아들 아가멤논으로,

훌륭한 왕이자 용맹한 장수"(p.116)로 묘사된다.

오디세우스는 "지략가 오디세우스"로 언급되는데

"바위 많은 이타케 땅에서 자랐는데,

온갖 계책과 술수에 능하고 비범한 사람이지요."(p.117) 라고 하며

말이 많지는 않지만 산만하지도 않고 말솜씨가 있는 메넬라오스와 비교해

언변으로 그와 겨룰 자가 없다고 묘사한다.

성격이 불 같은 아킬레우스는 어머니인 테티스 여신을 통해

신들의 도움을 (자주) 받는다.(얼핏, 마마보이..?)

그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존감과 자존심도 어마어마하지만

한편으로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여 죽을 운명임을 겸허하게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헥토르는 정의롭고 용감한 트로스의 왕자이며

그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이 가장 아끼는 아들이다.

그는 "언제나 트로스인의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싸워,

아버지와 나 자신의 위대한 명성을 지켜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에"(p.224)

겁쟁이처럼 전쟁을 피해 멀리 달아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

"훌륭한 물푸레나무 창을 든 프리아모스의 백성이

멸망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나도 생각하고 마음으로 잘 알고 있소.

트로스인이 나중에 겪게 될 고통이나

헤카베와 프리아모스왕의 고통,(그의 부모)

적군에 의해 먼지 속으로 쓰러질 수많은 용감한 형제들의 고통보다

내가 더 걱정하는 것은 당신이 눈물을 흘리며 청동 갑옷 입은

아카이오스인 중 누군가에게 끌려가

자유의 날을 빼앗겼을 때 겪을 고통이라오.

(...)

그러니 당신이 끌려가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기 전에

차라리 내가 죽어 땅속 흙에 묻혔으면 좋겠소."(p.224-225)

​

헥토르가 잠시 성에 들러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만났을 때

그의 솔직한 심정을 담아 아내에게 한 말이다.

3천년 전 고대의 서양 문학에서 인지상정을 느끼는 부분이었다.

그런 이유로 고전은 생생히 살아남아 현대인들에게도 감동을 주는 것이리라.

​

<일리아스>에서 그려지는 트로이 전쟁은

인간의 전쟁이기도 하지만 신들의 이야기도 그에 못지 않게 무성하다.

신들은 분명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희노애락과 질투와 복수, 연민 같은 감정이 인간 못지 않아서

실수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는 등, 매우 인간적이다.

그런 신들이 인간과 사랑에 빠져서 낳은 자식들이 또 가문을 이루기도 해서

영웅들은 누구나 나를 지켜주는 신 하나쯤은 있는 것 같다.

영화 <오디세이>에서도 오디세우스와 아테나 여신이

밀접하게 그려지는데, 이 책에서도 아테나가 오디세우스를 아끼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의 동료들이 오디세우스를

"팔라스 아테나께서 아끼시는 사람"(p.320)으로 묘사하고

오디세우스 역시 아테나에게

"당신은 늘 저의 모든 발걸음을 살피시며, 제가 힘들 때마다

함께하셨습니다."(p.322)라며 기도한다.

​

이들은 모든 순간에 신의 존재를 느끼고,

인간의 마음과 행위를 신의 의도로 설명한다.

즉 내 마음에 질투가 일거나, 용기가 생기거나,

창에 맞아 죽을 수 있었는데 창이 빗겨가거나, ..

전쟁 곳곳의 장면에서 신들이 개입하고

개입의 여부와 정도에 대해 신들끼리 다투기도 한다.

설명할 수 없는 운명, 예를 들어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 죽거나,

어딘가에서 누군지 모를 이의 아이가 태어나거나, 어떤 능력이 남보다 출중하거나,

장애를 입게 되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배신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인간사의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신의 행위라고 해석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였었던가 보다.

제우스는 "대지 위에서 숨 쉬며 다니는 모든 것 중에

인간보다 비참한 존재도 없"(p.550)다고 말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힘을 주기도 하고 뺐기도 하며

인간의 운명을 이리저리 내몰고 저울질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신의 개입, 즉 운명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고대인들에게 인간의 운명과 신은 그런 관계였다.

줄거리는 요약하면 단순하지만

이 책이 이렇게 두꺼운 이유는

고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아나톨리아의 영웅들과

신과 얽힌 인간의 족보를 어마어마하게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

"호메로스는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고대 그리스인의 신화와 전설을 트로이아 전쟁이라는 그릇에 압축해 담아낸다. 우리는 <일리아스>에서 고대인의 문학적인 탁월함, 신과 인간이 어우러진 세계관, 인생의 가치관, 필멸의 인간이 겪는 고통과 비탄을 본다." (p.769, 해설)

​

중년이 넘어서야 독서를 결심한 계기가 된

영화 <트로이>, 그리고 특히 <오디세이>는 정말 재미있게 보았지만,

신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들이 전쟁에 개입하는 과정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거나(트로이) 암시적으로 다루었다(오디세이)는 점에서

호메로스가 들려 준 이야기에 비해서는 반쪽짜리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영화는

필멸의 인간들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고,

오히려 그렇게 인간사에 집중함으로서 공감의 지점들을 압축적으로 제공했을 것이다.

다만, 주인공들이 내린 어떤 결정이 영화에서는 그들의 판단 결과로 그려진다면,

책 속에서는 그 결정의 배경이 된, 그들의 신들과 조상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스토리와 신들의 의도도 함께 제공된다는 점에서

매우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화는 촬영기법과 감독의 의도 상 각색이 불가피하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장례를 치르고 추모 경기를 여는데,

전차 경주, 권투, 레슬링, 달리기, 겨루기(무기), 원반던지기,

화살쏘기, 창던지기 같은 종목을 보면 기원전 776년에 시작되었다는

올림픽 종목들이 떠오른다.

인간이 몸으로 하는 권투, 레슬링, 달리기,.. 싸우고 던지는 것들은

전쟁을 위해 꼭 필요한 종목들이면서 때로는 아킬레우스처럼

상품을 걸고 즐기는 스포츠이기도 했다니..

오래된 작품에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요소들을 발견하면

새삼 인류애가 솟아오르기도 한다.

​

<일리아스>는 두꺼운 분량만큼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혹여 책의 두께와, 페이지마다 그득한 각주들에 질려

<일리아스> 읽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만 참고

(각주를 일일이 읽을 필요는 없으며, 뒤로 갈수록 각주는 없어진다.)

인류 최초의 블록버스터 속으로 빠져들어보기 바란다.

3000년 동안 수많은 분야에 영감을 제공했던 호메로스는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용감하지만 겁이 많고

사랑하지만 미워하고, 단호하지만 흔들리는

현대인들에게도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줄테니.


인류 최초의 블록버스터 <일리아스> : 네이버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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