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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 세상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ㅣ 플라톤 아카데미 총서
고은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북리뷰] 어떻게 살 것인가?
책 표지에 ‘LIFE’라는 단어가 있다. 삶이라는 단어 중간에 IF가 있기에 삶은 여러 상황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말고 다시 한 번 이 단어를 보았다.
난 이렇게 풀이하고 싶다.
Live + IF + Ending => 태어나 살면서 죽는 사이에
만약이라는 여러 상황이 닥친다는. 캬~~ 내가 풀이하고도
뻑~이 간다.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태어나고 죽는 순간까지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있었던가? 안
되는 일이 더 많다. 그러기에 항상 어떤 상황이 닥치고 우린 그 상황을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기에 위에서 풀이한 삶이라는 단어는 나름 만족스럽다.
삶을 산다. 살아있다. 그런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다. 한 번 사는 인생 멋지게 살고 싶은 것이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떻게(how) 살아야 내가 만족하는 삶일까? 여기서 내 스스로 묻고 싶은 것은, “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 있냐는 것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욕망하는 것이 온전히 내가 생각해서,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타자에 의해 각인된 것들을
보며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었냐는 물음이 계속 들었다.
책을 펼쳤는데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두 번째로 강의한 이석재 교수의
내용이 없었다. 이석재 교수는 ‘질문하는 힘 : 철학자가 던지는 5가지 물음’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책에는 없었기에 유투브에서 플라톤아카데미tv를
찾아 이석재 교수의 강연을 다시 들었다. 근본적인 물음이기에 이 책을 보신 분들은 꼭 다시 보기를 했으면
한다.
그럼 여러 강연자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어떻게 답했는지 살펴보겠다. 자꾸 단어에 딴지거는 느낌이지만, 강연 주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살’ 즉, 살아가는
방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화가 나서 잠시 책을 덮은 부분이 있다. 한명기 교수의
‘징비록’에 대한 부분이었다. 류성룡이 집필한 임진왜란에 대한 내용이다.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중∙일이 다르다. 중국에서는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부른다고
한다. ‘왜구에 대항해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이라고 한다. 문록(분코쿠)와 경장(게이초)은 1592년부터 1614년까지 일본 천왕이 사용한 연호이니 ‘문록∙경장시대의
전쟁’이라는 뜻이다.
이거 뭐하는 시츄에이션인가? 한 나라를 전쟁터로 만들고 무고한 백성이
죽어가는 전쟁을 중국은 우리나라를 도운 전쟁이라고 하고, 일본은 그냥 한 시대의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다. ‘징비록’에서 류성룡이 하고픈 말은 힘없는 나라가 겪는 피폐함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현상을 돌이켜보면 참 답답한 심정이다. 나라의
중지를 모아 더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데, 종북몰이에 보수놀이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숨만이 흘러나왔다.
‘징비록’은 한 개인의
삶이 아니라 국가적인 삶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본을 보면서 늘 말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반문해보자.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는가? 잊지 않았다면 이러고 있으면 안되지 않나?
이 부분에서 원효대사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의 떠올랐다. 화쟁사상의 핵심은 ‘다양함에서
통일성을 보고, 통일성 가운데서 개별적 다양함’을 살려내는
것이다. 이 화쟁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개시개비(皆是皆非)다. ‘개’는 동시적 상황이다. 즉, ‘내가 옳으면 네가 그른 것이 아니라 내가 옳으면 너도 옳고, 네가 그르면 나도 그르다는 것이다.’ ( p 85 )
우리는 대화를 한다고 하면서 대화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생각을 설득하려고
한다. 이러면서 무슨 경청이며, 토론을 할 수 있을까? 너무 큰 그림이지 싶지만 개개인의 생각이 모여 큰 생각을 이루기에 꼭 짚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개인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살면서 불행하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누구나가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럼
행복은 어떤 의미일까?
에피쿠로스는 ‘쾌락’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했다. 그런데 항상 즐거울 수는 없다. 다시
생각해보면 즐거울 때 우리는 깊은 사유를 할 수 없다. 고통이 몰아치고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때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철저하게 홀로 서 있는 순간이고, 이때 우리의 삶은 깊이를 갖게 됩니다.’ ( p 199 ) 이 문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는 고통을 만나 회피할 때가 아니라, 두
눈을 부릅뜨고 고통과 마주했을 때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전제는 있다. 고통은 주관적이라는 것. 내가 겪는 고통이 가장 힘든 고통 아니던가?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는 철학자처럼 훈계를 하지만, 정작 자신의 고통은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고통이 아니던가.
용타스님은 행복한 삶을 위해 다섯 가지 원리를 말씀하셨다. 나, 모두 행복, 마음 천국, 관계
천국, 세상 천국이다. 결국 내가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이 주관적이듯 행복도 주관적이다.
많은 담론과 많은 시간의 강의를 다 담을 수는 없다. 책을 읽고 강의를
다시 들으면서 나만의 행복한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