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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ㅣ 살림지식총서 168
김성곤 지음 / 살림 / 2005년 3월
평점 :
J. 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이번 살림총서 서포터즈를 하면서 살림총서 여러 권을 받았다. 그중 문학과 인간이란 테마로 카뮈,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 세익스피어, J. D. 샐린저의 책이 왔다.
다른 이들은 익히 알고 있는데 J. D. 샐린저는 처음 접하는 이름이었다. 그의 책 '호밀밭의 파수꾼'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작가의 이름은 생소했다. 그래서 바로 접한 책이기도 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당시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사회에 저항하는 의미로 읽힌 책이었다고 한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호밀밭의 파수꾼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단다. 94학번인 내가 대학을 입학하면서 읽었던 태백산맥, 상실의 시대와 비슷할까?
저항의 의미로 본다면 태백산맥과 유사할 것이고, 존재감의 의미라고 본다면 상실의 시대와 유사할 것 같다. 읽은지 오래되서 이젠 기억에서도 멀어졌지만.
작가라면 유명해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 싶다. 글은 누구에게 읽히라고 쓰는 것이고 자신의 글이 많이 읽혀서 유명해지면 더 많은 작품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싶을테니까. 하지만 J. D. 샐린느는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영화사와 기사가 싫어 호밀밭의 파수꾼을 지은 후 은둔(?) 생활을 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거부했고, 자신의 일대기를 썼던 책에 대해서도 출판을 하지 못하게 소송을 걸어 이에 승소하기도 했단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100페이지가 안되는 책임에도 상당히 잘 요약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즘 책은 쓸데없는 말이 많아서 읽는데 지치긴한다. 특정 분야에 대해 심도 높은 이야기가 아니라면 굳이 300 페이지 분량이 책이 있어야 하나 싶다. 얇은 책이라고 할 말 못하지는 않는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나온 배경에는 그 당시의 시대상이 있다고 한다. 1950년대 정치적 보수주의, 경제적 호황으로 미국 사회는 변화를 거부했다. 이 당시 메카시 열풍이 불어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 호밀밭의 파수꾼이 등장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비트운동(The Beat Movement)과 전후 영국의 진보주의 그룹(The Angry Young Movement) 의 시효가 되었다고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지 않아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줄거리가 나온다.
"아이들이 호밀밭에서 놀다가 절벽에 떨어지지 않도록 돌보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는 홀든이 한 말이다. 하지만 홀든은 아이들의 '순진성'을 지켜지 못하고, 오렴된 채 어른들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어느 나라에서건 젊은 이는 저항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에서도 영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헬조선을 살아가는 요즘. 저항이라는 말이 없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느 세대에서건 '나만 아니면 돼.'라는 의식이 팽배하다. 예능에서 이러지 않나? '나만 아니면 된다.'고
저항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 중학교 기술 시간에 '저항'이라는 녀석을 배웠다. 전류(?)가 강하게 흐르면 저항을 사용하여 전류의 세기를 낮출 수 있다. 예를 들어, 집에 들어오는 전류가 300볼트인데 이는 집에서 사용하기에는 어렵다. 따라서 저항을 사용하여 집에서 사용할 수 있게 220볼트로 낮춰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저항은 나쁜 개념이 아니다. 강하게 흐르는 전류, 사상, 이데올로기의 속도를 늦춰줄 수 있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는 충격을 완화해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 저항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는 저항이라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해지고 있다. 강한 세기의 생각이 모든 사람들에게 관통된다면, 감전이 된 것처럼 우린 강렬한 몸부림을 떨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