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2년 독서정산
보고 싶은 책을 다 읽기에 인생은 너무나 짧고,
그런 짧은 인생을 나는 참 허투루 산다.
앞의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그런 아쉬운 한 해를 보냈다. 분명 시작은 창대했다. 그런데 끝은 왜 이리 미약해진 걸까. 잡다한 핸드폰 게임, 유튜브, 만화, 드라마에 쏟은 시간이 근 3년 중 가장 많았던 것 같을 정도로 자극적인 활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삶에 많이 스며들었다. 도파민 중독이다. 길을 잃었다. 자존감이 떨어졌다.
2. 인상 깊었던 책들
1) 로버트 프리츠 저, 박은영 역, 『최소 저항의 법칙』, 라이팅하우스, 2022
그래도 영감을 줬던 책이 몇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 로버트 프리츠의 "최소 저항의 법칙"이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 추상성' 때문에 아쉬움이 없던 건 아니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많은 걸 느끼게 해 재밌게 읽었다.
책의 핵심은 '문제 해결형 삶의 구조가 아닌 창조 지향형 삶의 구조에 따라 살아야 원하는 삶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라고 할 수 있겠다. 일단 제목 '최소 저항의 법칙'에서 시작해보자.
최소 저항의 법칙이란 '우리의(자연의) 에너지가 저항이 가장 적은 곳을 향해 움직인다'는 말이다. 물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물이 저항이 작은 길을 따라가듯, 우리도 저항이 작은 방식의 행동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가 말하는 바다.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데 폭식하거나 영어 공부를 하고 싶은데 게임을 하는 행동은 의지의 탓이라기보다 최소 저항의 경로가 우리의 욕망과 갈등하는 방식으로 짜인 탓이다. 그리고 이 최소 저항의 경로를 정하는 게 바로 '구조'다.
물의 움직임과 흐름, 방향을 결정하는 건 '물길'이라는 '구조'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구조는 무엇인가? 저자는 구조를 "우리 자신의 내적 메커니즘, 자기 이미지, 욕망, 신념, 문화적 고정관념, 가정, 외적 이상과 객관적 현실" 등 다양한 요소가 관계적으로 작용해 형성되는 무언가로 정의한다. 실천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썩 마음에 드는 정의는 아니지만, 하여튼,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 구조는 또 대충 '반동-순응 지향형 구조'와 '창조 지향형 구조'로 나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문제를 해결하는 삶'과 '창조를 지향하는 삶'이다.
'반동-순응 지향형 구조', '문제를 해결하는 삶'은 쉽게 말해보면 '소거하는 삶'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명성, 재산, 좋은 유대 관계, 멋진 가족 등 외부 환경에 '바르게 반응"하면 보상을, '잘못' 반응하면 "징역형, 사회적 물의, 사망", 가난 등의 불이익을 받는다고 배웠다. 그래서 외부 환경에 순응하거나 부정적 결과를 소거하려는 방식으로, 문제를 없애려는 방식으로 사는 게 익숙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문제를 소거할 수 없기에, 또는 문제의 소거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기에 '냉소적임, 무기력함, 반항심'이라는 부정적 정서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그 반동-순응의 악순환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살을 빼려고 다이어트를 했다가, 폭식했다가, 이상화한 신체를 강요하는 사회 담론에 반항적으로 됐다가(그런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도 않고), 다시 그 분위기에 순응하거나 아니면 아예 냉소적, 무기력해지는 식이다. 저자는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이 진동추처럼 반복되는 이유가 자신이 반응-순응 지향형 구조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창조적 구조 안에 있는 삶은 다르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라며 미움받는 문제적 상황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삶과, '저 사람과 친해지려면 어떻게 하지?'라며 내가 원하는 결과를 머릿속에 그리고 그 결과를 위해 노력하는 삶의 차이랄까. 창조를 지향하는 삶은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끊임없이 구체화하고자 하며 그 결과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현실)이 어떤지를 끊임없이 객관화하고 인정하며, 내가 원하는 결과와 현실 사이의 간격을(구조적 긴장) 최대한 좁히고자 계속해서 노력한다. 단순한 차이 같지만 두 구조가 반복됨으로써 가져오는 결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꽤나 다르다.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삶은 일단 불행해지기 쉽다.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끝없는 문제로 점철되어 있고 그 문제는 모두 해결될 수 없다. 게다가 '문제'에 집중하다 보니 현실을 실제보다 더 부정적으로, 냉소적으로 보는 경향이 생긴다. 피해 의식이 생길 수도 있다. 문제에만 집중하는 탓에 내가 진짜 뭘 원하는지 잘 모르기에 구조적 충돌에 취약하다. 예를 들자면, '사람들과 친해져서 외로움을 해소한다.'라는 욕망과 '혼자서 쉬고 싶다.'라는 욕망이 있다고 해보자. 이 두 가지 긴장-해소 시스템은(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상태, 원치 않는 것을 가진 상태가 긴장이고 사람은 이 긴장을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말) 서로 배타적인 탓에 구조적 충돌을 만들어낸다. 애초에 원하는 게 뭔지 몰라 내적 갈등을 겪거니와 문제의 해소(외로움의 해소, 피로함의 해소)에만 집중한 탓에 지속적인 피로와 외로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괴로워한다.
반면, 원하는 바에 집중하는 삶은 다르다. 늘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초점을 맞추기에 문제에 집중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보다 자기에 대해 더 잘 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원치 않는 결과를 피할 수 있을까?'를 묻기보다 '어떻게 해야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까?'라고 물으니까 당연한 결과다. 게다가 반응-순응적인 삶에서 겪게 되는 반복되는 악순환, 내적 갈등 및 분열에 쓰는 소모적 에너지를 내가 원하는 결과와 현실과의 간격을 좁히는 데 쓸 수 있다. 문제라는 외부 대상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주체적으로 지향하다 보니 자기효능감(자존감)이 높아지기도 한다. 삶의 기본 구조를 어떤 식으로 짜놓느냐에 따라 이런 다양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 차이가 얼마나 커다란지는 직접적인 삶을 통해 충분히 실감하는 중이다. 아직도 삶의 방향성은 오리무중이고 내면은 온갖 분열, 갈등이 가득하다. 아직도 내가 원하는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게 다 반응-순응적인 구조,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구조로 삶을 이끌어왔기 때문인가. 참, 어렵다.
2) 에드 트로닉 외 1인 저, 정지인 역, 『관계의 불안은 우리를 어떻게 성장시키는가』, 북하우스, 2022
이 책도 좋았다. 관점을 바꾸게 한 올해의 책 중에 하나. 에드 트로닉과 클로디아 M.골드가 공저했다. 이 책을 읽고 한동안 '문제는 표준이다. 중요한 건 복구다.'라는 명제를 되뇌곤 했던 게 기억난다. 이 명제에는 두 가지 중요한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 첫 번째는 '평안과 평탄'이 디폴트가 아니라 '문제의 상황'이 디폴트라는 점. 두 번째는 중요한 건 '문제'가 아니라 '복구'라는 점이다.
뭇사람은 대부분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상투적인 말에 공감하면서도 막상 고통, 불화, 불안, 불확실성과 같은 부정적 상황 또는 정서와 마주하면 회피하기 바쁘다. 지긋이 마주하지 않으려 한다. 일이 잘되려면 물 흐르듯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들에 의하면 이 전제 자체가 현실과는 다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 상황'이 기본이 아니라 '문제적 상황'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문제적 상황이 기본이라면 중요한 건 이 상황을 어떻게 마주하느냐다. 저자들은 '복구'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삶은 문제적 상황을 계속 복구해나가는 과정과 같다. 자기 감각과 정체성, 자존감, 외부와 관계하는 법 등 모두가 문제를 어떻게 복구해나가느냐에 달려있다. 회피하고 억누르는 사람은 성장하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힌다. 반면, 문제를 계속 마주하고 복구해나가는 사람은 외부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얻고, 성장하고, 나아간다.
이런 이야기를 각종 임상 사례와 실험을 통해 설명한다. 평탄하지 않은 상황, 뭔가 삐걱거리는 상황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면 좋겠다. 마음이 많이 편해진다. 짜증 날 때도 있지만 문제적 상황은 기본이니까. 중요한 건 이 문제를 통해 내가 배울 수 있는 게 뭐냐는 질문이다.
3) 필립 로스 저, 김한영 역,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문학동네, 2013
4) 필립 로스 저, 박범수 역, 『휴먼스테인1』, 문학동네, 2009
5) 필립 로스 저, 박범수 역, 『휴먼스테인2』, 문학동네, 2009
작년에 읽은 필립 로스의 소설 대부분은 '유대인의 미국적인 남성되기'가 주제였다. 올해 읽은 그의 책들도 그 주제와 무관한 건 아니나 그보단 한 개인과 '역사, 사회, 국가'와의 관계에 집중한 작품들이었다. 주커먼 시리즈에 해당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주커먼이라는 유대인 작가가 공통으로 등장해 붙여진 이름이다. "유령작가"에서 시작해 "유령탈출"까지 총 9개의 작품에 해당한다. 여기에 '미국 3부작'으로 유명한 "미국의 목가"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휴먼스테인"이 포함된다. 각각 베트남전쟁, 메카시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키워드를 다뤘다.
아쉬운 건 이런 명작들을 읽고도 별다른 글이 남겨두지 않아 단상도 남기는 게 어렵다는 점이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연초에 읽었는데 아무런 글을 남기지 않았고, "휴먼스테인"은 읽으면서 '와, 로스는 어떻게 매번 이런 명작을 쓸 수 있는 걸까.'라고 감탄하며 이런저런 메모를 끼적이긴 했으나 더 심화시키지 못한 편린이 대부분이어서 써먹기가 애매하다. 워낙 명작이라 언젠가 분명히 다시 읽을 작품들이긴 하다. 특히, "휴먼스테인"은 콜먼이라는 캐릭터에 더해 포니아라는 캐릭터도 흥미롭고, 다른 작품에서 만난 한나라는 캐릭터와의 연관 속에서 읽어볼 여지도 많아서 오래지 않아 다시 만나지 않을까 싶다.
[1998년 여름, (…) 미국 전역은 경건함과 순수함을 주장하는 목소리로 야단이었다. (…)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적 열정이자 역사적으로 가장 불온하고 파괴적인 쾌락인, 자기만 성자인 척하는 감정적 도취가 부활했다. 의회와 신문, 방송에서는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며 눈길을 끌어보려는 볼썽사나운 인간들이 남을 욕하고 개탄하고 응징하지 못해 안달이 나서 도처에서 맹렬하게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들 모두 오래전 미국이라는 나라가 막 생겨났을 무렵 호손(…)이 “박해 풍토”라고 명명했던 계산적인 광분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 열 살짜리 딸과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도록 온 세상을 평온하고 안전하게 해줄 엄격한 정화의식을 실행에 옮기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1998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혼자만 성자인 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휴먼스테인1 - 12, 13)
발췌 해 놓은 초반의 문장을 다시 읽어봐도 이건 미쳤다. 생각이 전부 같은 건 아니지만 분명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작품이었다.
6) 허먼 멜빌 저, 김석희 역, 『모비딕』 , 작가정신, 2011
"모비딕"도 재미나게 읽었다. 관련 작품으로 영화 "하트 오브 더 씨"도 봤다. 단상은 책을 읽고 짧게 끼적였던 글로 대신한다.
멜빌을 알게 된 건 6년 전이었다. 첫 만남은 "필경사 바틀비"를 통해서였다. 세계문학 단편선에서 왜 멜빌의 그 작품만을 찾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문학을 거의 읽지 않던 때 찾아 읽은 얼마 안 되는 문학 작품 중 하나였고 이런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작품을 쓴 멜빌이라는 작가를 뇌리에 새기며 독서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16년 3월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멜빌이 "모비딕"을 썼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하여튼,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네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서사가 약하다는 점이었다. 모비딕은 서사가 흥미진진한 소설이 아니다. 끝내 마주하는 결말은 사실 소설 초반부터 충분히 예측이 가능할 정도로 멜빌이 힌트를 준다. 서사가 약하니 이야기의 흡입력은 떨어진다. 대중의 관심을 못 받은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는, 안 그래도 약한 서사의 몰입도를 더 떨어뜨리는, 이야기의 중간에 자주 삽입된, 고래에 대한 백과사전식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멜빌이 왜 이렇게 많은 고래 이야기를 했는지 명확히 이해하진 못하겠다. 고래를 신비화하면서도 이렇게 분석적인 관점에서 고래를 해체해 묘사하는 양가적인 관점을 취한 이유도. 세 번째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 사이에 백과사전식 글이 늘어져 있는 장을 끼어 놓는 등의 요인 때문에 소설의 장르적 특성이 모호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멜빌답게 희극이라는 장르를 상당히 뒤섞기도 했는데, 멜빌이 이렇게 장르를 섞고 뒤틀면서 노리고자 했던 효과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는, 멜빌이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룬 신학적 논제의 맥락을 잘 모른다는 점 때문이었다. 소설은 신비주의적, 종교적 상징과 그러한 문제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걸 알아차릴 만큼의 지식이 부족한 탓에 멜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읽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을 뒤집어 보며 논점을 모아 줄기를 잡아보면 어느 정도 퍼즐이 맞춰지기도 했다. 그 퍼즐은 뭐랄까, '이 소설은 19세기에 신정론을 다룬 변형된 욥기'같다고 하면 괜찮을까. 그러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서사는 어차피 중요한 게 아니었다고. 신정론에 대한 논제는 핵심인물, 나름 무고해 보이는 인물이 고통을 받아야 제기된다. 그게 바로 에이해브다. 소설 초반에 펠레그 선장은 에이해브가 "좋은 사람"이며 "위엄 있고, 신앙심은 없지만 신 같은 사람", "왕관을 쓴 왕이었어!"라고 묘사한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은 뒤 행복한 가정을 꾸리자마자 다리를 잃었다. 갑작스러운 비극을 마주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 비극의 불가해함 앞에서 분노하다가 결국 체념하지만 에이해브는 그렇지 않았다. 미쳐버린 핍이 영적 지혜를 얻은 것으로 묘사되는 것처럼, 미쳐버린 에이해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사실 - 신의 이중적 면모 - 을 보고 그것을 끝까지 파헤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이 지닌 이중적 속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게 고래였다. (흰색이라는 색깔에 대한 이야기로 언급된 게 그런 면모였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래에 대한 그 수많은 지식이 있음에도 이슈메일이 고래를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신도 멜빌에게 그런 대상이었던 것 같다. 멜빌은 모순적이고 양가적이고 말이 안 되는 듯한 신학적 논제들을 다양하게 들춰냈을 뿐 명료하게 갈무리한 것 같진 않으니까.
읽긴 힘들었지만 이야기하자면 할 이야기가 많은 소설이었다. 특히, 에이해브가 매력적이었는데 오이디푸스나 욥도 떠오르고 스네이프도 떠오르게 하는 인물이었다. 선과 악의 저편에 있는 그 욕망에 관해 언젠가 구체적으로 더 생각해보고 무언가를 말해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7) 윌리엄 포크너 저, 하창수 역,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 윌리엄 포크너』, 현대문학, 2013
번역이 아쉬웠지만 포크너 단편선도 인상 깊었다. 단상을 꽤 많이 남겼던 거로 기억한다. 11~12편 정도의 단편이었다. 한 두 작품 빼고 모두 뭔가 적어 놓은 게 꽤 된다. 서사가 강한 작품이 아닌데도 이렇게 몰입하게 만드는, 멍하게 만들고 무언가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니. 첫 소설인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의 장미"부터 인생 영화 중 하나인 '그녀의 추억'(오토모 카츠히로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메모리즈 시리즈의 첫 작품)과 관련된 키워드(과거, 변화, 생성, 변하지 않음, 그리고 '장미')가 많아 흥미로웠고 '곰'에 이르러 흥미는 절정에 달했었다. 담론, 사회 구조 등의 급격한 변화 과정에 놓인 개인이 그 변화와 마주해 변해(갈등 또는 고집)가는 모습을 많이 담았던 만큼 인간에 대해서도 많은 걸 말해주는 작품이 많았다.
8) 모니카 마론 저, 김미선 역,『슬픈 짐승』, 문학동네, 2010
마지막으로 고른 작품은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이다. 미시마의 "가면의 고백", 엘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까지 10권으로 할까, 아니면 8권째로 미시마의 책을 고를까, 엘리네크의 책을 고를까 고민했지만 모니카 마론의 책을 골랐다. 읽은 후 남겨둔 짧은 단상, "종교, 정치, 사랑. 세 이상주의라는 트릴레마 속에 갇힌 서양인. 그리고 사랑을 택한 주인공." 속에 나오는 키워드들이 조금은 더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랄까.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젊음, 너무나 많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끝이란 것은 좀처럼 가늠이 안 되는 것이었고 또 아름답게만 생각되었다. 서서히 몰락해가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동질감을 느끼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녀는 여러모로 반면교사로서 더 의미가 있었다.
3. 2022년의 독서를 돌아보며
다시 반복한다.
보고 싶은 책을 다 읽기에 인생은 너무나 짧고,
그런 짧은 인생을 나는 참 허투루 산다.
올 한 해는 앞의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애초에 '읽고 쓰는 일'을 일상에 구조화하지 못했기에 뭐라 할 말이 없다. 연초엔 분명 이것저것 시도해본 것도 많았다. 문학 계간지도 구독해보고, 온라인으로 계간지 읽는 모임에도 들어가 보고, 문학 책도 많이 읽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오히려 읽고 쓰는 일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됐다. (물론 루틴이 망가지게 된 원인은 이것 말고도 많으며 복합적이다)
덕분에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됐다. 문학을 많이 읽을 수 있는 인간은 아니구나. 특히, 다독은 정보를 가져다주는 책, 머리를 쓰게 만드는 책에나 어울리지 내 문학 독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내게 문학은 뭐랄까, 최소 한 달 동안 곱씹으며 읽고 캐릭터나 상황에 몰입해 종국에는 정서적 카타르시스로 이어지는, 그리하여 삶의 미세한 변화로라도 이어지는 독서로 이어졌을 때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때, 그 느낌을 활자화하여 마침표를 찍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그럴 때에만 나는 변했다) 그게 아닌 문학 독서는 소화하지 못할 음식을 과도하게 섭취하는 과식이다. 내게 남는 건 복통과 설사뿐.
이것 외에 독서에 관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전년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분명 읽고 써야 하는 건 맞는데, 무얼 어떻게 읽고 무얼 써야 하나. 어떻게 읽고 쓴 걸 남과 나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읽고 쓰는 일로 먹고 살 수 있을까. 내면의 갈등, 걱정, 두려움 등 성장과 나아감, 시도를 방해하는 부정적 정서에 맞서 매번 패배하고 마는 걸 보면, 이젠 좀 방법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핵심은 하고 싶은 걸 찾기 전에 하지 말아야 할 걸 하지 말기. 뭔가를 하게 만드는 구조 속으로 나를 욱여넣기.
4. 2023년의 독서를 생각하며
독서 계획은 세우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는 당장 더 읽고 싶은 거, 필요한 거 읽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관심 있는 분야, 작가, 책에 대한 대강의 개요는 이미 그려놨고 보관함에 한 해 동안 담아둔 약 100권의 책과 관련해 어차피 또 이것저것 추가한다고 해봤자 읽지도 못한다. 그래도 굳이 추가한다면, 23년에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이 책 한 권을 더 얹고 싶은 정도.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집필한 "책 읽어주는 남자."다. '더 리더'라는 영화를 통해 알게 됐다. 영화의 여운이 짙어 관련된 정보를 이것저것 찾다가 원작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법학자이자 소설가인 작가가 집필한 것으로 사랑과 이별, 정체와 성장, 선과 악, 죄의식, 감당과 책임 등 어찌 보면 광범위할 수 있는 주제를 깔끔하게 잘 버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올해 봤던 영화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인상 깊게 본 작품인지라 소설을 향한 관심도 크다.
독서 우선 순위 정도는 정해두고 싶은데, 1순위는 자기계발이다. 커뮤니케이션 스킬(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법)이 메인이고 여기에 '시간, 루틴, 습관'과 관련된 책들을 더해 주로 읽고 싶다. 2순위는 심리학이다. 나머지는 약간의 문학과 철학, 그리고 기타 책들이 되지 않을까 싶다.
5. 2023년을 맞이하며 하고 싶은 독서 다짐
23년은 책을 많이 읽지 않을 것 같다. 자꾸만 지식의 노예가 돼버리는 모습을 보니 책이 선물(gift)이 아닌 독(gift)이 되어버렸던 지난날이 떠올라서 책은 최소한으로 읽고 오감으로 받아들인 내면과 세상에 관한 생각을 벼리고 활자화하여 쏟아내는 데 더 집중하고 싶다. 신영복 선생이 했던 말, "평소에도 독서보다는 사색에 더 맘을 두고 지식을 넓히는 공부보다는 생각을 높이는 노력에 더 힘쓰고 있습니다.",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思沈)하여야 사무사(思無邪)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곱씹고 또 곱씹고 싶다.
1) 자각하며 읽는다 : 지식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각하며 읽는 게 정말 중요하다. 읽는 도중에 자각하는 건 당연히 중요하지만 특히, 더 중요한 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다. '내가 지금 이 책을 왜 읽지?', '이 책을 통해서 얻고 싶은 게 뭐지?', '이 책을 다 읽으려면 얼마 정도 시간이 필요할까?', '내 삶의 우선순위에서 이 책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할애할 수 있나?', '다 읽고 단상마저 남기지 못할 거면 읽지 않는 게 낫지 않나?'와 같은 질문을 통해 사금을 걸러내듯, 제한된 시간 안에 조금 더 필요한 책, 더 읽고 싶은 책을 골라내야 한다. 어차피 직장인으로서 책을 읽을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시간을 조금 더 내가 원하는 것들로 채우기 위해서는, 더 생산적인 것들로 채우기 위해서는, 막연한, 무작정적인 동기에 의해 독서를 시작하는 걸 참아야 한다.
2) 읽은 책은 기록을 남긴다 : 단상도 좋다. 짧은 글도 좋다. 읽은 책은 기록을 남겨야 한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책은 삶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3) 남기는 기록에 가하는 다양한 제약에서 자유로워진다 : 저간에 쓰는 걸 어렵게 만드는 요소로, 루틴적인 요인도 있지만, 쓰기에 가하는 다양한 제약이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분명 전에는 자의식 과잉으로 점철된 글, 헛소리, 정돈되지 않은 생각들도 자유롭게 끼적이는 일에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이제는 그런 글을 나만 보는 일기장에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됐다. 물론 나중의 내가 봐도 알아먹을 수 있을 정도의 글을 쓰는 건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 글에 대한 동기 자체를 사라지게 만드는 수준이니까.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독서 후에 남기는 글도 마찬가지다. 자꾸만 한 편의 정갈한 글을 쓰려고 하니 안 되는 거다. 활자와 마주한 후 샘솟는 다양한 헛소리를 막지 말고 그냥 계속 나오게 두자. 그리고 그걸 적자. 형편없어도 괜찮다. 김현 선생은 "김용택의 ‘맑은 날’은 지루하고 상투적이다. 농촌 세계의 가족적 정황이 수필같이 드러나 있으나 감동을 주진 않는다. 민요 쪽으로 빠져나가면 출구가 있을지 모른다."와 같은 짧은 단상도 거리낌 없이 남겼다. 어차피 한 편의 정갈한 글도 저런 짧은 단상이 깊어지고, 확장됨에 따라 나오는 법이다.
4) 독서정산을 처음 쓴 17년부터 반복되어 온 다짐을 상기한다 :
-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읽기
- 일상 언어를 잃지 않기
- ‘나’를 중심에 두고 책을 읽기, 머리로만 책을 읽지 말기
- 정리하지 않으면 안 읽느니만 못하다(이번의 다짐과 같다)
- 책 읽는 데 돈을 아끼지 말자
- 집에서 책을 읽을 환경을 조성하자. 잘 안 되면 무조건 나가라
- 이 책을 읽는 이유, 목적을 잃지 말자(이번의 다짐과 유사하다)
- 막연한 공허함을 채우고자 강박적으로 책을 읽지 말자
- 당장 내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책에 관심을 두자
- 밀도 있게 기둥을 세우고 싶은 분야를 찾자
- 불편한 책을 읽자, 성장을 위해
- 책을 계획적으로 읽는다(이건 내년은 제외)
- 가능하면 함께 책을 읽는다
- 내가 읽고 쓴 걸 어떻게 생산적으로 나눌 수 있을지 고민한다
- SNS에 독서 활동에 대한 기록을 꾸준히 남긴다
- 규칙적으로 쓸 수 있는 루틴, 또는 구조를 만든다
- 이런저런 글쓰기 대회에 많이 응모해보자
안녕 2022년. 2022년을 보내는 데 아쉬움이 크지 않은 걸 보니 내 정신도 어지간히 타락했구나. 내년엔 좀 제정신으로 살자
"오늘도 보람 없이 하루를 보내는구나. 하루를 보내면서 아쉬움이 없다니, 내 정신이 이렇게 타락할 줄은 나 자신도 이때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전태일 일기 중)
202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