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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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인간 또라이 아냐?'

책을 덮은 후 미시마 유키오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고는 내 내면에서 이런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실제 내면에서 솟아오른 소리는 저 문장보다 조금 더 과격하고 환멸감이 담긴 표현이었지만 말이다. 다만, 저 '또라이'라는 표현에는 환멸감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적 재능을 향한 긍정적 평가도 들어있으니 부정적이기보다는 양가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2. "가면의 고백"에 등장하는 화자처럼 병약하고, 허약하고, 기질이 예민한 캐릭터가 낯설지는 않았다. 조모의 과보호는 주로 여성들 사이에서 자란 니체를 떠오르게 했고 허약하고 기질이 예민한, 자아에 관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홀든 콜필드를 떠오르게 했다. 다만, 이 책의 화자는 동성애자이기까지 하다는 점에서 본 적이 없는 특별한 캐릭터였다. 솔직히 좀 신선했다.


3. 미시마를 찾아보면 따라다니는 키워드들이 있다. '탐미주의자', '우익', '남성문학', '할복' 등. 이 중에서도 나는 미시마가 할복을 했다는 사실이 좀 충격적이었던 탓에, "이것은 역시 미시마의 자화상, 자전적 소설이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옳을 것이다."(235)라는 사에키 쇼이치 평론가의 말처럼 이 소설에서 미시마를 찾아 읽어보고자 했다. 즉, 이 소설을 미시마의 자화상처럼 여기고 도대체 미시마의 어떤 요소가 '할복', 나아가 '우익', '전쟁', '남성', '죽음'과 같은 비교적 부정적인 가부장적 모습들로 이어지게 된 것인지에 의문을 품고 읽었다.

이런 또라이스러운(부정적 의미의) 모습에도 어떻게 한국에서 잘 읽히는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건지도 궁금했다. 또한, 이 작품이 미시마의 자화상이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면, 작품의 화자가 내적 갈등과 혼란을 어떻게 마주하고 극복할 것인지, 극복이 아니라면 어떻게 실패하는지, 성장하긴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함께 가지고 읽었다.


4. 미시마는 왜 읽히는 걸까. 미시마 할복 사건에서 느끼는 쇼킹함의 영향도 있지만 이 책이나 "금각사"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탐미주의(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의 영향이 더 큰 듯하다. 책의 초반부에서는 그 유려한 문체가 자아도취로 느껴져 거부감이 있었으나 중반 이후로 넘어갈수록 서사의 몰입도가 증가함과 동시에 문체에 대한 거부 반응도 거의 사라져버렸다. 관념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고 좋은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0대에 썼다는 "금각사"는 이 탐미주의가 어떻게 더 농익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그 손이 나를 두렵게 한 방식은 현실이 나를 두렵게 했던 바로 그 방식과 같았다. 나는 그 손에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꼈다. 사실 내가 공포를 감지한 것은 이 가차없는 손이 내 마음속에 고발하고 소추하는 무언가였다. 이 손 앞에서만은 아무것도 위장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소노코라는 또 하나의 존재가, 이 손에 저항하는 내 유약한 양심의 유일한 갑옷, 유일한 방탄복이라는 의미를 꺼내 들고 나섰다. 나는 반드시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것이 나의, 예의 깊은 밑바닥에서 느꼈던 양심의 가책보다 더더욱 깊은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당위가 되었다…"(143)

 

5. 미시마의 대리인으로 볼 수 있는 화자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는 화자 자신이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실로 교묘한 완성성을 띠고 처음부터 내 앞에 서 있었다. 무엇 하나 빠진 것 없이. 무엇 하나, 후년의 내가 나 자신의 의식이나 행동의 원천을 그곳에서 찾아보아도 빠진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완벽한 형태로. 내가 어린 시절부터 인생에 대해 품었던 관념은 단 한 번도 아우구스티누스풍의 예정설의 선을 벗어나지 않았다."(23)고 직접 말할 정도로 화자 자신을 잘 설명하는 키워드들이다.

"첫번째는 '분뇨 수거인과 오를레앙의 소녀(잔다르크)와 병사의 땀'이고, 두번째는 '분장욕', 세번째는 동화 속에서 '살해되는 왕자'에 관한 이야기이다.”(255) 그렇다면 이 키워드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나는 이 키워드들이 화자의 '동성애적 기질', '남성성에 대한 갈망 및 욕망', '사드마조히스트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봤다. 거칠게 보면 동성애적 기질은 거짓 자아에 대한 관념적 갈망, 남성성에 대한 갈망 및 욕망은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한 동경, 사드마조히스트적 성향은 죽음을 향한, 비애-비장의 미와 관련된 성적 충동과 관련된다.

앞으로 돌아가 보자. 화자의 어떤 점이 미시마의 '우익', '남성', '할복', '전쟁', ‘죽음과 같은 비교적 가부장적인 모습들로 이어지게 된 걸까? 헬스에 빠진 이후 강인한 육체와 남성성에 대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미시마의 모습은 이 소설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허약하고, 병약했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소설 속의 화자 또한 강인한 육체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남성성에 대한 갈망이 많은 캐릭터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욕망, 갈망은 동성애적 기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에 조금 더 복잡하긴 하지만 말이다. 소설 속의 화자가 미시마의 자화상이라면, 미시마도 분명 강인한 육체, 남성성과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을 테고, 그것을 갈망했기에 헬스로 몸을 단련하고 그것을 촬영하는 등의 행동을 했을 테다. 자신을 오롯이 인정하고 사랑하기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한 열등감, 콤플렉스를 지녔고, 그것을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해결, 표출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군대도 사기를 쳐 빼 먹은 사람이 우익으로 빠진 이유도 이와 무관하진 않겠다. '전쟁', '우익'이라는 키워드는 비틀린, 부정적 가부장 상과 어울리는 단어니까.

'할복', '죽음'은 화자가 지닌 사도마조히스트적 성향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화자는 인간의 육체를 유물론적으로 해체해 보는 걸 좋아한다. 또한, 그 해체의 과정에서 피학-가학성을 곁들이길 좋아한다. (화자가 자주하는 것 자체가 그 가학의 과정이고 미시마는 실제로 성 세바스티안을 오마주하며 화살에 찔리는 피학성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피학과 가학 사이에는 성적 충동과 죽음에의 충동이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런 충동이 어떻게 죽음을 어떤 대의, 비장함, 비애의 미와 연결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런 미시마였기에, 그만큼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던 그였기에 할복을 할 수 있던 거 아닐까.


6. 하지만 동성애적 기질, 남성성에 대한 갈망 및 욕망, 사드마조히스트적 경향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인 키워드로 볼 수 있다. 동성애 기질은 사랑의 한 스타일일 뿐이고 남성성에 대한 갈망 및 욕망은 그걸 지니지 못한 사람으로서 욕망 할 수 있다. 허약하고 나약하게 자랐기에 강한 남성성을 갈망하는 것도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 사드마조히스트적 성향도 하나의 성적 스타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기질과 성향을 수용하고, 때로는 내적으로 잘 해소하면서도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어나가는 일일 테다. 그러나 소설의 화자는 그것을 내적으로 잘 해소하지도 못했고,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보다 끝까지 타인을 기만하고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이 단상의 초반에 언급했던 성장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의 화자는 성장하지도("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동구처럼), 마주하지도(마주하고 수용한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처럼), 실패하지도(실패하고 절규하는 "포트노이의 불평"의 포트노이처럼) 않았다. 철저히 가면 아래 자신을 숨기며 타인을, 나아가 자신도 기만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끊임없이 흉내 내고 자신을 기만하고, 인공적인 노력을 하고 정상성을 욕망하고, 자기를 수치스러워한다. 과도한 자의식으로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자기가 바라보는 관념의 세계에 빠져 사는 화자에게 맨 얼굴의 삶은 없었다. 가면이 곧 삶이었다. 맞지 않는 가면을 쓴 만큼 내면은 뒤틀렸다. (이런 삶이 곧 미시마의 삶이 아니었을까) 화자는 왜 자신과 결혼하지 못했을까를 묻는 소노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노코는 아직 세상을 잘 몰라. () 세상이라는 건 서로 좋아하는 이들끼리 언제라도 결혼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아. () 그리고 나는 그 편지 어디에도 확실하게 결혼할 수 없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어. () 그렇게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소노코는 급하게 결혼을 해버렸고."(212)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자기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 상황 탓, 정황 탓, 명확하게 말하지 않은 자기 말을 지레 짐작으로 넘겨짚고 다른 사람과 빠르게 결혼을 해버린 상대방 탓을 해버린다. 히라마키를 풀었다가 다시 두르는, 젊고 아름다운 사내를 본 순간 "욕정에 휩싸"이고 "소노코라는 존재를 잊어"버리는 데다가 "저렇게 웃통을 벗은 모습으로 여름이 한창인 거리로 뛰어나가 야쿠자들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날카로운 비수가 저 하라마키를 뚫고 그의 몸통에 꽂히고, 저 더러운 하라마키가 피범벅으로 아름답게 물들고, 그리고 그 피투성이 시신이 들것에 실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상상을 하는 화자는 "지금까지 온 영혼을 기울여 쌓아올린 건축물이 참혹하게 무너져내리는"소리를 들음에도, 재빨리 "가면으로 다시 돌아와, 얼어붙을 듯한 의무관념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이상한 질문이기는 한데, 당신, 이미 해보셨죠? 그런 거. 물론 이미 다 아시겠죠? (…)"

즉각 그럴싸한 대답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응…… 알지. 미안하지만."

"언제쯤?"

"작년 봄에."(227)

 

그는 이렇게,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 도망쳤다.


7. 소설 속의 인물이니까, 타인의 삶이니까, 어떻게 보면 이렇게 쉽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정상성'의 압박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건지, 조금은 더 진실한 나의 모습으로 살고 있긴 한 건지를 묻는다면 떳떳하게 답할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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