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서윤빈 지음 / 래빗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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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누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과 같지 않겠으나 또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기에

미래 사회를 그린 소설을 읽을 때는 설렘 반 걱정 반의 마음이다.


서윤빈 작가님의 장편소설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에서 그리는 미래 사회는 이렇다.


두피에 버디라는 이름의 확장된 두뇌 같은 소프트웨어를 새겨 컴퓨터 수준의 기억력과 연산 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고 육체를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신체 기관을 임플란트처럼 갈아끼워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며 몇 백 년이고 살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임플란트 장기는 정기 구독을 해야 하는데, 이 구독료가 개인의 나이와 건강 상태에 따라 누진적으로 상승한다. 처음에는 모두가 부담없이 이용할 수 있고 누진1단계까지도 감당 가능한 수준. 그러나 누진2단계부터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현재의 '재벌' 수준이 아니고서는 유지가 불가능하다. 문제는 이 단계가 국가가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였다.


54p. 이 나라는 전통적으로 가점은 적고 감점만 수두룩하다. 부당한 생명 정치라고 반발하는 이들이 없었던 건 아니나, 늘 그렇듯 그건 반발하는 이들이 바르게 살지 않은 탓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컸다. 


55p. 과연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는 데는 반세기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특유의 성과주의와 능력주의에 물든 국민 정서를 바꾸는 데는 그 두 배의 기간을 들이고도 실패한 나라 다웠다. ...(중략)... 물론 양쪽 다 밑바탕에는 구독료 폭탄을 맞는 건 그 개인이 제대로 살지 않은 탓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성과주의와 능력주의가 만연하고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 돌려 불행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돈이 모든 결정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섬뜩하지 않은가. 소설은 상상의 세계인데, 그 속에서도 미래 사회는 지금과 똑같다.


주인공 유온의 직업도 그렇다. '가애'라고 불리는데, 가애는 임플란트 장기 유지 비용을 낼 수 없어 곧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사람을 찾아(그들은 '수애'라 지칭) 연인이 된 후 유산을 받아 금전적 이득을 취한다. 가애는 소설 속 미래 사회에만 등장하는 직업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예전에 많았던 '제비' 비슷한 거 아닌가. 돈은 있지만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사람의 심리적 약점을 공략하여 마음을 속이고 돈을 얻는, 비열하고 치졸한 직업. 제비라는 명칭만 바뀌었을 뿐 예전 아니라 지금도 있을 법하다.


​그러니까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기술이 발전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소설이 슬프고 아름답다.

변하지 않는 것은 국가 권력, 자본주의, 생명 경시, 개인주의만이 아니다.



214p. 하지만 아픔은 절대 극복되지 않는다. 다만 썩을 뿐이다. 시간이 아픔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건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악취가 나는 것들에게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229P. 어릴 때였으면 100년 넘게 살았으면 삶에 별 미련이 없지 않겠냐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살아도 살아도 아쉬움뿐이다. 구체적으로 뭐가 아쉬운지도 모르는 채 그저 아쉬웠고, 억울하기도 했다. 


251p. 지금껏 내가 만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어떻게 그렇게 열정을 불태웠던 걸까. 막상 죽음에 바짝 다가서니 그 무엇에서도 의미를 찾거나 즐거움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렇게 많은 시체를 봤는데도 나는 아직도 죽음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슬픔도, 아픔도,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도.


​사람은 아무리 외면하고 무관심한 척해도 본질적으로는 사랑을 그리워하고 사랑을 원하고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 같다.


이 책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시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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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그 말이에요 - 오늘 하루를 든든하게 채워줄, 김제동의 밥과 사람 이야기
김제동 지음 / 나무의마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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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 님의 신작 에세이 <내 말이 그 말이에요>를 읽었어요.


<그럴 때 있으시죠?> 이후 8년 만의 공감 에세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그 책은 못 읽었고 헌법 이야기인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 이후 6년 만에 읽는 김제동 님의 책이에요.


이번 책에서는 김제동 님이 방송을 쉬시면서(?) 먹고 사는 데 집중하는 삶 이야기, 반려견 탄이를 만나고 같이 살게 된 이야기, 중고등학교 강연 봉사에서 만난 아이들 이야기 등을 만날 수 있어요. 


김제동 님 책의 특징은 읽으면 자연히 음성지원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ㅎ

읽는 게 아니라 말을 듣는 것 같은 기분으로 책을 읽을 수 있어요. 이번 책 역시도 김제동 님만의 유머 감각까지 그대로 전해져서, 슬며시 웃으면서 책을 읽었어요.


책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동질감'이었어요.


연예인이 아닌 사람 입장에서는 연예인은 딴 세상 사람 같고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 같잖아요? 그래서 연예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볼 때면 상대적 박탈감에 화가 나기도 하고요. 단순히 그들이 돈을 많이 벌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돈 많이 버는 직업이 연예인만인 건 아니니까요. 제가 화가 나는 포인트는 '저렇게 잘 풀리는 인생들은 대체 고민이 뭘까?'라는 거예요. 연예인도 힘들다는 말은 별 공감은 안 돼요.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나요. 소방관은 안 힘든가요? 경찰관은요? 자영업자도 직장인도 힘든 건 다 힘들죠. 다들 힘든 일을 하는데도 연예인들은 일을 통해 얻는 성과가 유난히 크다는 것이 제가 화가 나는 이유인 것 같아요. 


​그런데 김제동 님도 '딱히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뭔가 잘 안 된'다고 하네요. 요즘 딱 제가 그래요. 나는 제대로 해낸 일이 없다, 일이 안 풀린다, 실패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운데, 어찌됐건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성공한 연예인도 같은 고민을 한다는 것이 의외였어요. 이래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고 한 건가요. 뭐 물론 지금 사는 모습은 당연히 다르겠지만 표면적인 모습 외에 속으로는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에서 조금 동질감이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누구인지를 자문한다는 것도요. 김제동 님은 사람들은 누구나 이 질문을 품고 산다고 생각하신다는데, 저는 품고 살다가... 이젠 묻기를 포기했어요. ㅋ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요. 이 질문에 대한 제 결론은 '내가 어디서 왔든 어디로 가든 그냥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자'입니다. 


대신 저 결론에도 하나의 조건은 있어요. 가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몰라도(아, 죽음 빼고. 최종 목적지는 당연히 죽음이잖아요) 가려는 곳의 방향성은 정해져 있어요. 아이 엄마가 된 후,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40대를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결정짓게 된 제가 가야할 방향은 '어른'입니다.


제동 님도 책에서 끊임없이 계속 이야기하고 있어요. '어른'에 대해서.

과거 경험을 통해 바른 '어른'의 모습을 생각하고, 지금 아이들에게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요.

저의 인생 화두입니다.

어른다운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릴 때는 책을 재미로 읽었지만 요즘 제가 읽는 책, 그 중에서 유난히 신경 쓰고 관심을 기울이는 책들은 바로 다 어른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책인 것 같아요.


​제동 님은 나이 어린 세대를 편들어 주는 세대가 되고 싶다 하셨어요.


제가 생각하는 어른이란 나이와 경험을 무기로 이제 막 자신의 삶을 시작하려는 젊은이들의 기회를 빼앗지 않는 사람,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이곳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데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는 나의 어른들에게 많은 걸 빼앗겼지만

(지금의 '헬조선'을 만든 게 누구인가요.)

나는 그런 비열한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제가 김제동 님, 허지웅 님을 좋아하는 이유도 다음 세대를 걱정하며 지금의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네요.


김제동 님 팬클럽 이름이 베드로래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처럼, 김제동 팬임을 부인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데요.ㅋ


팬클럽 회원만 팬이 아니라는 것을 꼭 아셨으면 좋겠네요.

저는 팬클럽 회원이 아니지만 분명 김제동 님 팬입니다.

다른 사람이 김제동 팬이냐고 물으면 부인하지 않을 것 같아서

저는 '베드로'는 아닙니다만 제동 님 팬임을 암호로 증명해야 한다면 말할 수 있어요.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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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아름다운 기분
우아민 지음 / 무니출판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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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민 작가님의 <어딘가 아름다운 기분>을 읽었다.

'제주 동쪽 마을에서 펼쳐지는 상실, 은둔 그리고 삶을 구하는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이라는 정보만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상실이라고 해서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생각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었으나 그 이유가....


'내가 사랑한 사람이 나를 가해한 사람이 되는 것(22쪽)'이라는 표현이 그저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었다. 경찰, 검찰, 훈계, 벌금, 처벌, 변호사, 법원 등의 어휘를 보면 분명 범죄 피해를 입고 헤어졌다는 것인데, 그 이후의 감정이 슬픔이라는 것에 놀랐다. 분노나 배신감이 아니라.


작가님은 슬픔이 '걷고 있으면서도 길을 잃은 듯한 마음이 드는 것(11쪽)'이라고 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삶의 길을 인도해주는 존재였다면,

사랑하는 이의 부재는 길을 잃은 듯한 마음이 맞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이별은 그 원인에 상관없이 슬픔이겠다.


깊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제주로 '은둔'했다고 하셨지만,

책을 읽고 나니 견딜 힘이 없이 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


만약 나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분노와 배신감에 자기파괴적인 생활을 했을 것 같은데

분노와 배신감은 이별의 원인에 집중, 곧 상대에 생각을 집중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 아닐까. 슬픔은 내가 믿는 이의 부재가 주는 감정, 다시 말해 나의 상태에 집중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인 것 같고.


그래서 가만히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제주의 은둔 생활이 슬픔을 잘 이해하고 이겨낼 수 있게 만들었던 것 같다. 작가님은 이 글이 애도 일기라고 했다. 애도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인데, 나는 작가님의 애도는 슬픔을 지워가는 과정으로 읽혔다. 그래서 슬픔의 죽음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그러니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다.

슬픔이 머문 자리를 희망으로 채우려는 마음,

사랑이 떠난 자리에 절망을 채우지 않고 다시 사랑으로 채우려는 마음이 아름다움이 아니고서야 뭐라 할 수 있나.



📌 어떻게 사랑을 미워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모르는 건 사람을 두렵게 하니까 조금은 알 것 같은 사실을 믿기로 한다. 사람이, 사랑이 그렇게 단순한 색일 리 없다. 23쪽


📌 나는 내가 잃었다고 생각한 마음들이 살아야 할 땅의 색으로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삶에는 변덕의 몫이 있어야 한다. 74쪽


📌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잘라도 계속 자라나는 머리카락이라면, 누군가와 이별하는 일은 집안의 어디에나 머리카락이 있는 것이다. 결국 같은 뿌리를 가져서 잡아당기면 아플 뿐이다. 126쪽


📌 이름이 정해진 불행과 처지를 달라지게 할 수 있는지 경험한 적은 없다. 운명이 등 뒤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짐작한 적도. 그러나 삶을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느꼈을 때, 나는 비로소 삶이 말을 걸어 온다고 느꼈다. 136쪽


#에세이 #우아민 #어딘가아름다운기분 #무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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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 - 마흔,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처방
정신과 의사 토미 지음, 이선미 옮김 / 리텍콘텐츠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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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베스트셀러인 정신과 의사 토미 시리즈.

그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는 두 번째 책이 

<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으로 출간되었어요.


'마흔,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처방'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요.

저는 여러 권의 책을 여기저기 놓고(?) 병렬독서를 하는 편인데요.

<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은 제목 그대로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어서

짧게 짧게 읽기 좋더라고요.


획기적으로 새로운 내용은 아니고 이미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말들이긴 한데

굳이 생각하지 않고 무심히 지내다가 책을 보고 되새겨볼 법한 내용이 많아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 때문에 울고 웃고 치이는 그 많은 일들이 가끔은 모두 다 피로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인간관계는 개선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마음을 편안해지게 해줬어요. 서로의 호감은 어느 정도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고 상황이 알아서 관계를 결정지어줄 거라는 말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에너지를 조금 덜 써도 된다는 말로 들리지 않나요.


​그리고 저는 제가 정말 일이 안 풀려서 괴로운데, 뻔한 말이지만 그것도 타이밍이 있다는 말에 좀더 힘을 내보기로 했어요. 언젠간 되겠죠. 안 돼도 어쩔 수 없고요.


저는 굳이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카페 가는 것을 즐기는데, 그 이유도 책을 통해 알았네요. 그 자체가 제게는 일상의 '여행'처럼 느껴졌던 거예요.ㅎ


마흔 즈음의 인생이란 이런저런 고민과 부담이 무겁게 느껴질 시기잖아요.


​<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공감하게 되는 것들도 있고,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이유를 찾거나 새로운 각도로 생각해보게 된 것들도 있었네요.


#지극히짧고도사소한인생잠언 #리텍콘텐츠 #정신과의사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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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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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님의 신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를 읽었어요. 정보라 작가님이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2023년 국내 최초로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로 선정되어 출판계가 떠들썩할 때에도 작품이 왠지 무서워보여서 못 읽었는데 이번 책은 표지 분위기도 밝고 제목도 유쾌해서 기대감이 생겼어요.


자전적 SF소설이라는 홍보 문구에서부터 빵터졌지 뭐예요.

자전적 소설도 알겠고 SF소설도 알겠는데 자전적 SF소설이라니,

정보라 작가님은 삶을 SF처럼 살아오셨단 말인가요?


목차도 범상치 않아요. 연작소설집인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에 실린 단편들의 이름은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

대체 무슨 내용일까. 해양 동물을 소재로 한 자전적 SF 소설?!?!?

도무지 연결성이 떠오르지 않는 단어들이잖아요.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잔뜩 띄우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 시작부터 너무 웃겼어요.


"그걸 대체 왜 먹었습니까?"

"아니 그냥, 잠결에 이렇게 보니까 뭐가 여기로 오고 있어서..."

"그렇다고 뭔지도 모르고 그걸 먹어요?"

"뭔지도 모르긴요, 문어잖아요."

"무슨 근거로 그게 문어라고 확신했습니까? 잠결이었다면서요?"

"그냥, 딱 보니까 문어같이 생겼던데..."

"그렇다고 그걸 먹습니까? 대학교 건물 복도에 문어가 돌아다니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


이 무슨 코미디 같은 상황이냐고요.ㅋ


강사법 시행에 반대하는 대학 노조의 농성 현장에서 만난 나와 위원장님(이후 남편)은 복도를 걸어다니는 문어를 목격한 이후 계속해서 노동 착취 당하다가 잡혀온 러시아 대게, 사기꾼에 의해 불법 수조에 갇힌 붉은 상어 , 큰 덩치 덕분에 여유로운 개복치, 하늘에서 성운으로 빛나는 해파리, 지구를 떠나는 검은 고래를 마주치거나 얽히며 자꾸 해양정보과 소속이라는 검은 정장 덩어리들에게 끌려가는 일이 반복돼요. 이 이야기들이 엄청 빠르게 전개되면서 유머러스해서 꼭 '맨인블랙' 같은 코믹SF영화 같은데, 그 안에서 그리고 있는 사회적 배경은 전혀 코믹하지가 않지요.


첫 수록작 문어의 배경이 시간강사법 개정으로 인한 강사들의 대량 해고 사태잖아요. 저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아서 남다른 동질감을 느끼며 책을 읽었어요. 그러다 후반부에 '그리고 내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었을 때 이렇게 싸울 방법이 있었다면 그렇게 숨죽이고 12년 동안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263쪽)'는 문장에서는 서글픔에 눈물을 삼켰네요.


그밖에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일본의 원전 폐수 방류 등 국제적 사회 이슈도 나오고 노동, 장애, 기후 위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자연스럽게 등장해요.


작가님은 그 문제 제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안도 소설 속에서 알려주고 계세요.

그것은, '싸워야 한다는 것'

싸운다는 말이 작품 전반에 걸쳐 나와요.


이길 것 같지 않아도(66p), 열받으니까, 안 싸울 수는 없으며(67p)

질 줄 알면서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끌려 나가 사라지더라도(69p)

선우한텐 선우의 방식이 있(179p.)는 것처럼

자기 방식으로 생존하기 위해, 존엄하기 위해, 자유롭기 위해 싸우고 있다(244p)는 것.


그리하여 지구 생물체인 우리는 결코 항복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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