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한두 차례 역사기행을 간다. 스물 네번의 역사기행동안 실제로 내가 간 횟수는 아마도 14회 남짓. 예전엔 여름방학 기간 중에 갔으므로 잡지 마감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하고 남아야 했던 적이 두어 차례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12번 정도 역사기행을 간 것일 텐데, 본격적인 역사기행 이전에 답사를 한 차례 다녀오기 때문에 거기에 곱하기 2를 하면 내가 떠난 역사기행의 횟수가 대략 맞아 떨어진다.   

호남권, 영남권, 영동권, 중부권, 강원권 등등... 역사기행을 한 10년 다녀보면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한반도가 참 아름답고 볼만한 곳이 많구나란 생각과 더불어 한반도가 참 좁구나 그런데 그나마도 반토막이 났으니 가보려 해도 이제 더이상 신선한 곳을 찾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 쉽게 말할 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역사기행을 갈 만한 곳은 대략 사찰, 사당, 서원, 폐사지, 유배지, 무덤, 기념관, 박물관 정도다. 그러다보니 전국의 심심산중에 서 있는 작은 암자로 이름난 곳이 아닌 웬만한 명승고찰로 알려진 곳 중에선 안 가본 곳이 거의 없고, 서원도 동네 어귀 작은 곳까지 다녀보았다. 물론 이런 곳을 사람들 끌고 갈 수는 없다. 우리는 가더라도 일반적인 대중을 끌고 그런 곳을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남권이 조선왕조 500년간 사림(지배계급)의 본거지였기에 같은 남부 지방이라도 영남권에는 유배지가 그리 많지 않은데 비해 호남권의 역사 유적지 중 상당수는 유배지다. 당장 이번 역사기행 장소 중 세 군데가 유배지였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강진의 다산초당,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였던 보길도, 그리고 우암 송시열이 제주도 유배 길에 잠시 표류하여 들렀던 보길도의 글씐바위 터가 그렇다. 해남의 대흥사 역시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길에 들렀던 사연이 아로새겨져 있다. 다산초당에 올려진 기와를 보며 실망한 사람들도 많지만 어차피 제대로 고증한다면 그야말로 볼 것 없을 테고, 상상하며 마음으로 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초당이라도 중국의 두보가 살았다는 초당은 풀로 엮은 집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두보가 정말 그런 초당에 살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보길도 세연정에 가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산 윤선도를 욕한다. 1980년대를 거치며 형성된 민중사관 탓인지 아니면 이런 곳에 나오면 저절로 그런 심사가 드는 건지 몰라도, 현대정치엔 보수꼴통일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사람들까지 너나할 것 없이 윤선도가 보길도 마을 주민들 잡아다 이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라고 족쳤으리라 말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그랬겠지만 요즘 사람들이 누리는 사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보길도의 세연정의 화려함보다는 담양 소쇄원의 담박한 풍경을 좀더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다. 세연정의 화려함은 경치가 주는 화려함과 더불어 약간의 인공미가 더해진 탓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나 일본의 정원, 원림이 주는 인공미를 상상할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세연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작은 가설 무대 하나씩(동대와 서대)을 설치하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낼 물길에 보 하나를 더한 것 뿐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무척이나 화려하고 호사스럽게 보이는 것이 도리어 신기할 정도다.     

어쨌거나 인천에서 오전 7시에 출발해 첫 번째 행선지인인 강진 무위사에 당도한 것이 거의 1시쯤 되었고, 그 다음 행선지가 청자박물관, 다산기념관과 다산초당을 둘러 보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마쳤다. 재미있었던 것은 버스 네 대로 움직이는 역사기행단의 피곤함을 하늘도 알았던지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비가 그치고, 다시 버스에 오르면 다시 비가 쏟아지는 일이 첫날 내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첫날 완도의 숙소에 도착해 여장을 푸니 10시가 다 되어 갔다. 둘째 날도 버스에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사실 완도는 강진에서 보길도로 넘어가는 중간 기착지쯤 되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머물진 않았고, 청해진 유적지와 장보고 기념관, 드라마 해신 촬영세트장 정도만 돌아보고 곧바로 보길도로 떠났다.  

보길도에서 다시 해남 땅끝전망대를 보고 나니 그날 하루 일정도 끝이었다. 대흥사 앞 숙소에 여장을 푸니 밤 9시 함께 간 동료들이 술 한 잔만 하자고 하도 졸라대서 하는 수 없이 맥주를 한 여서일곱 캔 정도 마셨다. 간만에 음주였지만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술 취하는지도 모르고 새벽 2시까지 마시고 죽은 듯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사람들 인솔하고 대흥사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왕복 40분여가 걸리는 대흥사를 다녀왔더니 술이 다 깼다. 대흥사 다녀온 뒤 두륜산 케이블카 타고 전망대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직접 산행을 하여 갔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어르신들이 많아서 그건 불가능하고, 마침 이틀 전에 비가 내린 뒤라 조망이 좋은 편이었다. 두륜산에서 다시 해남 윤씨 종택인 녹우당으로 향했고, 녹우당에서 왕인박사 유적지를 둘러보고 서둘러 인천행.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나는 재단에서 하는 일 중에서 역사기행 사전답사를 가장 좋아하고, 역사기행을 제일 싫어한다. 워낙 많은 수의 사람들을 밥 굶는 사람 하나 없이 고르게 먹이고, 잠자리 투정하는 사람 없이 잘 재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길 잃거나 다치는 사람 없이 잘 보살피려면 여간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노력하고 애를 쓰다보면 공연히 작은 실수 하나, 타박 하나에도 속이 상하고, 인간이 미워지고 싫어진다. 절간 앞의 멍멍이는 사람들 손을 많이 타면 탈수록 순해지는데 사람은 사람 손을 많이 타면 탈수록 더 예민해지고 상처받는다. 역사기행을 다녀오고 나면 내가 예민한 탓이겠지만 한동안은 사람들이랑 말 섞는 일조차 피곤하게 느껴진다.  

인천 사무실에 도착해 2박 3일간 역사기행을 잘 따라와준 어르신들과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나니 다시 한밤중이었다. 일요일엔 죽은 듯이 자고, 월요일 아침엔 20분 지각... 오전 10시부터 다시 다가오는 음악회 행사 준비로 서울 마포에 있는 디자인실 사무실로 출동했다가 좀 전에 들어왔다. 2박 3일간 신문도, TV뉴스도 없이 살았더니 그 사이 세상이 어찌 돌아갔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곳 알라딘도 조용했는지, 잘 지냈는지 알 수 없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잘 지내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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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9-08-31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잘 지내고 있었답니다 ..저만일지도 모르겠지만요.^^
보길도까지 2박 3일이었으니, 정말 빡빡한 일정이셨네요.
저도 조교로 답사간 적 있었는데, 어휴 애들한테 술 적당히 마시라고 신신당부하고, 선생님과 애들 사이에서 눈치보며 쫓아다니다 보니 2박3일 갔다오면 파김치가 되곤 했지요.
수고많으셨네요. 근데 사진은 더 없나요? ㅎㅎ

바람구두 2009-08-31 21:04   좋아요 0 | URL
사진이야 더 있지요.
답사로 한 번, 역사기행으로 한 번씩
한 장소를 한 달 사이를 두고 두 번이나 가잖아요. ^^
좀 올려볼까요?

마노아 2009-08-31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헷, 끄트머리 안부 인사에서 짠해요. 빡센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신 것을 축하해요. 푹 쉬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힘들겠지요. 마음에라도 여유가 가득 찼으면 좋겠어요. 아, 그리고 사진 저도 원츄에요!!!

바람구두 2009-08-31 21:05   좋아요 0 | URL
너무 피곤해서 끝나자마자 들어왔어요.
아, 선덕여왕 봐야 하는데...ㅠ.ㅠ

2009-08-31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9-09-01 10:06   좋아요 0 | URL
전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
원고의 질은 문제가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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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분량이 다르잖아욧!!!

2009-08-31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9-09-01 10:06   좋아요 0 | URL
예....계속 피곤하네요. ^^
어제도 제법 일찍 잤는데...
선덕여왕 다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