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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왜 나한테 편지를 쓰는 거지?"
"아, 사실은 당신한테 편지를 쓰는 거라기보다,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
보고 있는 중이에요."
편지지는 도처에 널려 있었어. 책상 위에도 있었고, 그녀의 발치와 침대 위에도
있었지. 나는 손닿는 대로 아무거나 한 장을 집어들고 읽어 보았어.
........ 소풍가기, 강가에서 낮잠자기, 낚시로 잡은 물고기 구워 먹기, 새우와 크로와상과
쫀득쫀득한 쌀밥 먹기, 수영하기, 춤추기, 당신이 골라주는 구도와 속옷과 향수 사기,
신문 읽기, 가게 진열장을 한참동안 바라보기, 지하철 타기, 열차 시각 확인하기,
둘이 앉는 자리를 당신이 다 차지하고 있다고 투덜대며 옆으로 떼밀기, 빨래 널기,
파리 오페라 극장에 가기, 베이루트와 비엔나에 가기, 시장 보러 가기, 슈퍼마켓에 가기,
바비큐 해 먹기, 당신이 깜박 잊고 숯을 안 가져 왔다고 볼멘소리 하기, 당신과 동시에
양치질 하기, 당신 팬티 사 주기, 잔디 깎기, 당신 어깨 너머로 신문 읽기, 당신이 땅콩을
너무 많이 먹지 못하게 하기, 루아르 지방과 헌터 밸리의 포도주 저장고 견학하기,
바보처럼 굴기, 재잘거리기, 당신에가 마르타와 티노를 소개하기, 오디 따기, 요리하기,
베트남에 가서 아오자이 입어보기, 정원 가꾸기, 당신이 코를 골며 잘 때 시끄럽다고
투덜대며 쿡쿡 찌르기, 동물원과 벼룩시장에 가기, 파리와 런던과 멜로즈에 가기,
런던의 피커딜리 거리에서 돌아다니기, 당신에게 노래 불러주기, 담배끊기, 당신에게
손톱 깎으라고 요구하기, 그릇 사기, 우스꽝스러운 물건들과 아무 쓸모 없는 물건들 사기,
아이스크림 먹기, 사람들 바라보기, 체스에서 당신을 이기기, 재즈와 레게 음악 듣기,
맘보와 차차차 추기, 심심하다고 투정부리기, 변덕 부리기,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깔깔거리며 웃기, 새끼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당신을 놀리기, 소들이 보이는 곳에 있는
집 찾으러 다니기, 점잖이 못한 물건들로 쇼핑 카트를 채우기, 천장에 페인트칠 하기,
커튼 꿰매기, 재미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몇 시간 동안 꼼짝못하게 만들기, 당신 머리
깎아 주기, 잡초 뽑기, 세차하기, 바다 보기, 시시풍덩한 옛날 영화 다시 보기, 공연히
당신 이름 불러보기, 당신에게 야한 농담 하기, 뜨개질 배워서 당신에게 목도리 떠 주기,
그랬다가 보기 흉하다고 다시 풀어버리기, 주인 없는 고양이와 개를 거두어 먹이기,
앵무새와 코끼리에게 먹이 주기, 자전거를 빌려서 타지 않고 그냥 놓아두기, 해먹에
누워 있기, 할머니가 보시던 비코네 식구들의 이야기 다시 읽으며 쉬잔의 드레스 다시 보기,
응달에서 마르가리타 마시기, 게임하면서 속임수 쓰기, 다리미 사용법 배우기, 다리미를
창문 너머로 내 던지기, 빗속에서 노래 부르기, 관광객들 피해 다니기, 술에 취하기,
당신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고 나서 때로는 거짓말이 약이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
당신 말에 귀 기울이기, 당신에게 손 내밀기, 버렸던 다리미 다시 찾아오기, 대중 가요의
가사를 음미하기, 자명종 맞춰 놓기, 우리 여행 가방 챙기는 거 잊어버리기, 조깅 며칠
하다가 그만 두기, 쓰레기통 비우기, 당신이 날 여전히 사랑하는지 물어보기, 이웃집
여자랑 수다떨기, 당신에게 바레인에서 보낸 내 어린 시절 이야기 들려 주기, 내 유모의
반지와 헤나 냄세와 호박으로 된 동글동글한 장신구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계란 반숙
이나 커피 따위에 적셔 먹을 길고 가느다란 빵 조각 만들기, 잼 단지에 붙일 딱지 만들기.....
------------------------------------- 안나 가발다 소설, "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중에서..
아.. 어째서 이런 글들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 걸까...
2002년 12월. 29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해변의 카프카"를 고대하고 고대하던 중,
눈이 번쩍 뜨이는 걸작을 하나 만났다.
대강의 작품 소개는 12월 8일자 "essay" 에 대충 나와 있다. 며칠 째,
표제 글로 올라갈 것이다. 주옥 같은 문장이 수도 없이 많다.
한 여자가 있다. 한 남자를 사랑해서, 아이까지 둘이나 둔 가정 주부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말은 건넨다. '나,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어'
그리고는, 여행 가방을 챙겨서 집을 떠난다.
소설의 전반부는, 남겨진 여자의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며느리를 안타깝게
여긴 시아버지는 그녀와 손녀 둘을 데리고 시골 별장에 내려 간다.
그곳에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잔잔하고도, 가슴 뭉클한 대화가 이어진다.
소설의 후반부는, 시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을 때를 이야기 한다.
떠나지 못한 자의 슬픔에 관해, 남루하고 퇴색한 일상에 발이 묶일 수 밖에
없었던 젊은 날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토록, 평범한 일상을 따뜻하고도, 이해심있게 그려낼 수가 있다니...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고, 눈물이 날만큼 감동적이었다.
무엇이 올바른 것일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현실은 여전히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면, 버리고 가기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자신에게 얽매여 있다면.
은근히 불륜을 부추기는 듯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글의 요지는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요지는,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이다. 가정을 지켰다고 해서,
전통적인 사회 규범을 따랐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더 가치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 순간, 분명 하나를 잃게 된다.
사랑을 선택하면,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가정을 선택하면,
전통과 규범을 지키는, 지극히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나오는
피에르(시아버지) 처럼, 삶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평생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겠지만, 정말로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100%의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구절로 글을 끝맺자. 세상에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이 얼마
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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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낭 앉아 있어요."
눈물 때문인지 불빛 때문인지 그녀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어.
"나는 내가 바라던 걸 얻었어요. 그 동안 당신을 떠날 수 없었어요. 당신을 기다리면서
평생을 보낼 순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에요. 당신을 떠나기 위해서는 그런 말을
들을 필요가 있었어요. 당신의 비겁하고 치사한 모습을 볼 필요가 있었던 거지요.
내 손가락으로 당신의 비열함을 느껴볼 필요가 있었다고요, 알겠어요?
아니에요, 그냥 앉아 있어요........ 가만히 있으라고요!
난 이제 가야 돼요. 너무 지쳤어요......... 내가 얼마나 지쳐 있는 지 당신이 알까요?
피에르.........나....... 나 이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어.
"나 그냥 떠나게 내버려둘 거죠? 지금 그냥 떠나게 해 줘요.
날 붙잡지 말아 줘요........"
그녀는 목이 메어서 말끝을 흐렸어.
"나 그냥 떠나게 내버려두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비로소 말문을 열었어.
"하지만 당신 알고 있지? 내가 당신 사랑한다는 거. 그거 알지?"
그녀는 멀어져 가다가 문을 밀기 전에 몸을 돌렸어. 그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지.
2002년 12월.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