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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왜 나한테 편지를 쓰는 거지?"
"아, 사실은 당신한테 편지를 쓰는 거라기보다,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
보고 있는 중이에요."
편지지는 도처에 널려 있었어. 책상 위에도 있었고, 그녀의 발치와 침대 위에도
있었지. 나는 손닿는 대로 아무거나 한 장을 집어들고 읽어 보았어.

........ 소풍가기, 강가에서 낮잠자기, 낚시로 잡은 물고기 구워 먹기, 새우와 크로와상과
쫀득쫀득한 쌀밥 먹기, 수영하기, 춤추기, 당신이 골라주는 구도와 속옷과 향수 사기,
신문 읽기, 가게 진열장을 한참동안 바라보기, 지하철 타기, 열차 시각 확인하기,
둘이 앉는 자리를 당신이 다 차지하고 있다고 투덜대며 옆으로 떼밀기, 빨래 널기,
파리 오페라 극장에 가기, 베이루트와 비엔나에 가기, 시장 보러 가기, 슈퍼마켓에 가기,
바비큐 해 먹기, 당신이 깜박 잊고 숯을 안 가져 왔다고 볼멘소리 하기, 당신과 동시에
양치질 하기, 당신 팬티 사 주기, 잔디 깎기, 당신 어깨 너머로 신문 읽기, 당신이 땅콩을
너무 많이 먹지 못하게 하기, 루아르 지방과 헌터 밸리의 포도주 저장고 견학하기,
바보처럼 굴기, 재잘거리기, 당신에가 마르타와 티노를 소개하기, 오디 따기, 요리하기,
베트남에 가서 아오자이 입어보기, 정원 가꾸기, 당신이 코를 골며 잘 때 시끄럽다고
투덜대며 쿡쿡 찌르기, 동물원과 벼룩시장에 가기, 파리와 런던과 멜로즈에 가기,
런던의 피커딜리 거리에서 돌아다니기, 당신에게 노래 불러주기, 담배끊기, 당신에게
손톱 깎으라고 요구하기, 그릇 사기, 우스꽝스러운 물건들과 아무 쓸모 없는 물건들 사기,
아이스크림 먹기, 사람들 바라보기, 체스에서 당신을 이기기, 재즈와 레게 음악 듣기,
맘보와 차차차 추기, 심심하다고 투정부리기, 변덕 부리기,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깔깔거리며 웃기, 새끼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당신을 놀리기, 소들이 보이는 곳에 있는
집 찾으러 다니기, 점잖이 못한 물건들로 쇼핑 카트를 채우기, 천장에 페인트칠 하기,
커튼 꿰매기, 재미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몇 시간 동안 꼼짝못하게 만들기, 당신 머리
깎아 주기, 잡초 뽑기, 세차하기, 바다 보기, 시시풍덩한 옛날 영화 다시 보기, 공연히
당신 이름 불러보기, 당신에게 야한 농담 하기, 뜨개질 배워서 당신에게 목도리 떠 주기,
그랬다가 보기 흉하다고 다시 풀어버리기, 주인 없는 고양이와 개를 거두어 먹이기,
앵무새와 코끼리에게 먹이 주기, 자전거를 빌려서 타지 않고 그냥 놓아두기, 해먹에
누워 있기, 할머니가 보시던 비코네 식구들의 이야기 다시 읽으며 쉬잔의 드레스 다시 보기,
응달에서 마르가리타 마시기, 게임하면서 속임수 쓰기, 다리미 사용법 배우기, 다리미를
창문 너머로 내 던지기, 빗속에서 노래 부르기, 관광객들 피해 다니기, 술에 취하기,
당신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고 나서 때로는 거짓말이 약이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
당신 말에 귀 기울이기, 당신에게 손 내밀기, 버렸던 다리미 다시 찾아오기, 대중 가요의
가사를 음미하기, 자명종 맞춰 놓기, 우리 여행 가방 챙기는 거 잊어버리기, 조깅 며칠
하다가 그만 두기, 쓰레기통 비우기, 당신이 날 여전히 사랑하는지 물어보기, 이웃집
여자랑 수다떨기, 당신에게 바레인에서 보낸 내 어린 시절 이야기 들려 주기, 내 유모의
반지와 헤나 냄세와 호박으로 된 동글동글한 장신구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계란 반숙
이나 커피 따위에 적셔 먹을 길고 가느다란 빵 조각 만들기, 잼 단지에 붙일 딱지 만들기.....

------------------------------------- 안나 가발다 소설, "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중에서..

아.. 어째서 이런 글들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 걸까... 

 2002년 12월. 29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해변의 카프카"를 고대하고 고대하던 중,
눈이 번쩍 뜨이는 걸작을 하나 만났다.

대강의 작품 소개는 12월 8일자 "essay" 에 대충 나와 있다. 며칠 째,
표제 글로 올라갈 것이다. 주옥 같은 문장이 수도 없이 많다.

한 여자가 있다. 한 남자를 사랑해서, 아이까지 둘이나 둔 가정 주부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말은 건넨다. '나,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어'
그리고는, 여행 가방을 챙겨서 집을 떠난다.

소설의 전반부는, 남겨진 여자의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며느리를 안타깝게
여긴 시아버지는 그녀와 손녀 둘을 데리고 시골 별장에 내려 간다.
그곳에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잔잔하고도, 가슴 뭉클한 대화가 이어진다.

소설의 후반부는, 시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을 때를 이야기 한다.
떠나지 못한 자의 슬픔에 관해, 남루하고 퇴색한 일상에 발이 묶일 수 밖에
없었던 젊은 날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토록, 평범한 일상을 따뜻하고도, 이해심있게 그려낼 수가 있다니...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고, 눈물이 날만큼 감동적이었다.

무엇이 올바른 것일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현실은 여전히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면, 버리고 가기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자신에게 얽매여 있다면.

은근히 불륜을 부추기는 듯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글의 요지는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요지는,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이다. 가정을 지켰다고 해서,
전통적인 사회 규범을 따랐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더 가치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 순간, 분명 하나를 잃게 된다.
 
사랑을 선택하면,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가정을 선택하면,
전통과 규범을 지키는, 지극히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나오는
피에르(시아버지) 처럼, 삶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평생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겠지만, 정말로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100%의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구절로 글을 끝맺자. 세상에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이 얼마
든지 있다.

----------------------------------

"그낭 앉아 있어요."
눈물 때문인지 불빛 때문인지 그녀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어.

"나는 내가 바라던 걸 얻었어요. 그 동안 당신을 떠날 수 없었어요. 당신을 기다리면서
평생을 보낼 순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에요. 당신을 떠나기 위해서는 그런 말을
들을 필요가 있었어요. 당신의 비겁하고 치사한 모습을 볼 필요가 있었던 거지요.
내 손가락으로 당신의 비열함을 느껴볼 필요가 있었다고요, 알겠어요?
아니에요, 그냥 앉아 있어요........ 가만히 있으라고요!
난 이제 가야 돼요. 너무 지쳤어요......... 내가 얼마나 지쳐 있는 지 당신이 알까요?
피에르.........나....... 나 이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어.

"나 그냥 떠나게 내버려둘 거죠? 지금 그냥 떠나게 해 줘요.
날 붙잡지 말아 줘요........"
그녀는 목이 메어서 말끝을 흐렸어.

"나 그냥 떠나게 내버려두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비로소 말문을 열었어.

"하지만 당신 알고 있지? 내가 당신 사랑한다는 거. 그거 알지?"
그녀는 멀어져 가다가 문을 밀기 전에 몸을 돌렸어. 그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지. 
 

2002년 12월.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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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의 마지막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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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결국 마릴린 먼로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야.>
그런 억지스런 의견을 종종 듣는다. 예의 사강도 그런 말을 한 듯하다.

하지만, 나는 여자 역시, 결국은 <항상 같이 있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시장을 보러 갈 때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나, 파티에 참석할
때나, 어디든. <그런 남자, 있을 턱이 없잖아.> 남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남자를.

아아, 그러고 보니 사강은 어쩌면 그런 말도 했는지 모르겠다. 과연, 많은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요컨대, 양쪽 다 나름대로 할말이 있는 것이다.

나는 먼로 같은 여자도 아니고, 더구나 하치는 자기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아무데도 같이 가지 않는다. 어디든 같이 갈 수 있는 남자 따위, 지긋지긋해서 싫다.

곧잘, 하치와 나는 대체 뭘까, 하고 생각했다. 남자와 여자이기도 하고, 유일한
친구 사이기도 하고, 선생과 제자이기도 했다. 사랑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그저 마냥 만나고만 싶은 연애의 초기이기도 했다 .

타인인데, 내내 따로따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이토록 가까이 함께 있는 것일까?

------------------------------- '하치의 마지막 연인' 본문 중에서.

설레임에서 시작해서 익숙함으로 전이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익숙함에서 설레임으로 가는 경우란, 우정이 사랑으로 변하는 경우인데,
그런 경우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항상 가까이에 있는,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사이란, 결국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인데, 현실에서는 100%  맞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야, '정서적인 거리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야?' 라고 물을 수 있지만,
처음에 공간적으로 멀어지고, 그 다음에 통신상으로 멀어지고, 그 다음엔
정서적으로 멀어진다. 그렇게 해서, 서로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기간이 일주일이
넘기 시작하면, 그 다음엔 이 주일이 되었다가, 한 달이 되었다가, 1년이 되었다가,
영영 사라지게 된다. 기억속에는 살아 있어도, 서로 연락을 못하게 되는 사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하고, 통신 수단이 첨단화
되어도 예외없는 법칙이다.

개인적인 일과 업무적인 일 때문에 몇 가지 열  받는 일이 있었지만,
나 자신이 작은 감정에 휘둘리는 건 자기 수양이 덜 되었기 때문이라고 해 두자.

비록, 완벽하지 못할 지라도,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살아가자.
기죽거나, 열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2002년 12월.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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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까치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라디오" 중에서.. 

특정한 상황이 되면 반드시 머리에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이를테면 하늘이 깨끗한 밤에 별을 올려다보며,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Like Someone in Love)"이라는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린다. 재즈 세계에서는 잘 알려진 스탠더드 곡이다. 아시는지.

요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혼자 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기도 하고,
기타 소리에 넋을 잃고 있기도 해,
마치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사랑을 하고 있으면 그런 일이 있다. 의식은 어딘지 기분좋은 영역을 살랑살랑 나비처럼 떠돌고,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잊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긴 시간이 흐른 뒤이다.

생각건대, 사랑을 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는 열여섯에서 스물 하나까지가 아닐까.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으니 간단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아래라면 뭔가 유치해서 우스울 것 같고, 반대로 이십대가 되면 현실적인 것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그보다 많은 나이가 되면 쓸데없는 잔꾀가 늘게 되고 말이다.

그러나 십대 후반 소년소녀의 연애에는 적당하게 바람이 빠진 듯한 느낌이 있다.
그들은 깊은 사정을 아직 모르니 현실에서는 투닥거리는 일도 있겠지만, 그만큼 모든 것들이 신선하고 감동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런 날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영원히 잃어 버린 뒤라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러나 기억만큼은 신선하게 머물러 우리의 남은 (아프디 아픈 일이 많은) 인생을 꽤 유효하게 따뜻하게 해 줄 것이다.

나는 줄곧 소설을 써오고 있지만 글을 쓸 때도 그런 '감정의 기억'이란 몹시 소중하다.
설령 나이를 먹어도 그런 풋풋한 시원(始原)의 풍경을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몸 속의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는 것과 같아서 그다지 춥지 않게 늙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이유로 귀중한 연료를 모아 두기 위해서라도 젊을 때 열심히 연애를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돈도 소중하고 일도 소중하지만, 진심으로 별을 바라보거나 기타 소리에 미친 듯이 끌려들거나 하는 시기란 인생에서 극히 잠깐밖에 없으며, 그것은 아주 좋은 것이다. 방심해서 가스 끄는 것을 잊거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일도 가끔 있겠지만 말이다.

--------------------------------------------------------------------------------------

'사랑을 하고 있으면 그런 일이 있다. 의식은 어딘지 기분 좋은 영역을 살랑살랑 나비처럼 떠돌고' 란 표현에 별 네개.

'사랑을 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는 열여섯에서 스물하나까지가 아닐까' 라는 표현에 별 세개.

'나이를 먹어도 그런 풋풋한 시원(始原)의 풍경을 가슴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몸 속의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는 것과 같아서 그다지 춥지 않게 늙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표현에 별 다섯 개.


그 나이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2002년 11월.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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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 레이먼드 카버 소설 시리즈 1, 개정판
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 집사재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레이몬드 카버에게는 2번째 단편집이 되는 이 소설집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특징적인 면이 몇가지 있다.

첫째, 소설의 필치가 아주 사실적이다.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처럼 일상적인 모습들과 일상적인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둘째, 그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이 느껴진다. 하루키의 장편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어떻게든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희망은 어떤 형식으로든 존재한다' 라는 주제를 극히 짧은 단편 속에서 구현해 냈다. "상처에 대한 치유 의식으로써의 글 읽기" 에 아주 적합한 소설들이다.

셋째, 형식의 완벽함이다. 이 단편집에는 1인칭으로 쓰여진 소설 9개와 3인칭으로 쓰여진 소설 2개가 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형식이 느껴진다.

뭐니뭐니 해도 이 소설의 좋은 점은 앞서 이야기했던 두 번째에 있다. 같은 책 2번 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 책은 다시 한 번 더 읽고 싶어 졌다. 책을 읽으면서 드는, '뭔가 알 것 같다. 뭔가 나아지고 있고, 치유되고 있다.' 는 느낌은 이 단편집을 더욱 빛나게 한다.

단편집에 있는 단편 소설들에 대한 감상평.

코끼리

동생과,딸과,어머니와,이혼한 전처에게 매달 생활비를 부쳐 주어야 하는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 있다는 절망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날 꿈을 꾸게 되고, 꿈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나서는, 자기에게 무언가 변화가 일어 났음을 알게 된다.

분명히, 코끼리는 무겁게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를 이야기한 것이겠지만, 그 코끼리는 냉장고에 넣고는 비행기 위에서 떨어뜨릴 수도 있는 존재다!! 읽고 나서는, 읽는 독자마저도, 무겁게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가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다.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이 단편집의 표제작이다. '나'와 아내 로라, 멜과 멜의 두 번째 아내인 테레사, 이 4명이서, 식탁에 둘러 앉아 나누는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다. 어떤 이는 험난한 사랑이고, 어떤 이는 잃어 버린 사랑이며, 어떤 이는 상식을 초월한 사랑이고, 어떤 이는 증오로 변해 버린 사랑이다. 하나의 사랑이 끝나면 그 사랑은 잊혀지고, 언젠가는 또 다른 사랑이 찾아 온다는 여러 가지 사랑의 방식과,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의 구절의 읽어 보자.

"하지만, 당신들은 서로를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과 결혼한 경험이 있지. 아마 틀림없이 당신들도 그 전에는 그 다른 사람을 사랑했을 거야. 테리와 나는 같이 산 지 오년이 되었고, 결혼한 지는 사 년 째야.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뭔지 아나? 가장 끔찍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지. 예를 들어서 말야, 내일 당장 우리 가운데 한 사람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이런 얘기는 하는게 아닌데 미안하네- 어떻게 되겠나?
물론,처음에는, 그러니까 당분간 혼자 남게 된 사람은 슬픔에 젖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지. 하지만 머지 않아 그 사람은 다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할 거야. 지금까지 우리가 얘기한 사랑, 그런 사랑은 한낱 과거의 추억으로 묻혀 버리는 거야. 어쩌면 추억 거리조차 되지 않을 지도 모르지." 
 

고요

아마 이 단편집에 있는 소설 중에서는 제일 짧은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발소에서 '나'는 어떤 사람의 사슴 사냥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사슴 이야기 때문에 소란을 겪게 된 후, 그 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내게 된다. '삶의 새로운 변화는 언제나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매운 인상 깊은 하나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라는 교훈을 이 소설에서 얻었다.

비타민

지극히 사실적인 일상의 모습이 묘사된 소설이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를 꿈꾸다가도 별 것 아닌 일상적인 방해들에 의해 주저 앉고 마는 무기력한 현대인의 모습을 그렸다. 병원에서 일을 하는 '나'는 아내 패티가 비타민 장사를 시작해서는, 성공했다가 몰락해 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게 된다. 파티에서 만난 아내의 후배 돈나와 하룻밤의 사랑을 시도하지만, 바에서 만남 불량스런 흑인들 때문에 좌절되고 만다. 돈나는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아스피린을 찾지만 그 마저도 쉽지 않다.

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

일상에서 작은 '사랑' 의 위대한 힘 (어떤 형태로든 개인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나'는 J.P와 함께 금주 학교에 들어오게 되고, 굴뚝 청소부인 J.P로부터 어떻게 아내를 처음 만났는지, 그가 어떻게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금주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J.P 아내로부터 행운의 키스를 받게 된 후, 아내와,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 용기를 얻게 된다.

체프의 집

남편 웨스와 별거해서 살고 있던 '나'는, 웨스로부터, 체프의 집을 임대했으니 다시 같이 살자는 제의를 받고는 현재 생활과, 남자를 정리하고 그 곳으로 간다. 여름 한철 그곳에서 부족할 것 없는 마음의 평온과 사랑을 확인한다. 체프가 와서 자기 딸 린다를 핑계로 집을 다시 비워 달라는 이야기에 나와 웨스는 실망하지만, 계속해서 같이 살 것을 다짐한다.

-이렇게 적고 보면 너무 평번하지만, 그 속엔 따스한 여운이 있다. 레이몬드 카버의 훌륭한 점은 짤막짤막한 글 안에, 따사로운 햇살같은 평온함이 있다는 점이다.  

열병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 있는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카알라일은 아내 에일린이 케이스와 사라 두 아이를 내 버려둔 채 그의 동료 리차드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나 간 후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고등학교에 강의를 나가야 하기 때문에 애들을 돌보아 줄 유모를 찾게 되고, 그렇게 구한 첫번째 유모 데비는 집을 엉망으로 만든 채 사흘만에 쫓겨 난다. 그러다가, 에일린이 소개시켜 준 할머니 유모인 웹스터 부인 덕에 새로운 일상을 경험한다. 약 6주의 평온한 일상이 흐른 후, 그는 심한 열병에 걸리고, 그 때를 같이 해 웹스터 부인은 자신은 아들 내외가 살고 있는 곳으로 떠나게 되었음을 알려 온다. 웹스터 부인을 마중하면서 손을 흔드는 순간, 카알라일은 무언가가 자신의 내부에서 막을 내리고 있음을 알게 되고, 비로소 에일린을 놓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였을까? 가슴 깊이 공감하고, 희망을 읽었던 작품이다. 다음의 구절은 특히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이다.

그 순간, 카알라일은 그렇게 현관 앞에 서서, 무언가가 그 막을 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 무언가는 에일린, 그러니까 이 순간 이전까지의 인생과 관련된 것이었다. 내가 에일린을 향해 손을 흔든 적이 있었던가? 물론 있기야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카알라일은 그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비로소 그녀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삶은 한때 조금 전 그가 웹스터 부부에게 얘기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인 것이다. 비록 지금까지는 잊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고 몸부림쳐 왔지만, 그렇게 흘러가 버린 과거 역시 이제 그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뒤에 남겨 놓은 그 모든 것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깃털

직장 친구인 버드의 초대로 그의 집에 찾아 가게 된 '나'와 아내 프랜은 그 곳에서 버드의 아내 올라와 함께 저녁을 먹게 되고, 그들의 '대단히' 못 생긴 아기를 보게 된다. 훗날 나와 프랜은 그 때를 기분 나쁘게 회상한다. 그 날 이후로 나와 프랜은 그 때까지 원치 않았었던 아기를 가지게 되고, 그 아기는 못 생긴 것에 비할 바 없는 '내 놓고 말하기가 무엇한 문제' 가 있다.

일상의 변화가 언제나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마저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겠지. 우리가 감내하고, 안고 가야 할...


대성당

아내와 오랜 친구 사이인 장님 한 명이 '나'의 집에 방문하게 된다. 처음에 나는 탐탁치 않게 여기나, 차츰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그에게 대성당의 모습을 설명해 주다가 그와 손을 포갠 채 대성당을 같이 그리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루키가 글 말미의 해설에서 극찬한 작품이다.
완벽한 형식과 함께, 고통은 넘은 마음의 상태를 실감하게 하는 내용의 완벽함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

평화롭던 가정에, 생일을 맞은 아이가 뺑소니 차에 치여 죽게 되고, 호워드와 앤은 절망에 휩싸인다.그러나 간단한 추리 끝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 내게 되고, 그를 찾아간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한 그(제과점 주인)에게서 빵을 얻어 먹게 되고, 그를 용서하게 된다. 하루키의 평가를 보자.

'아이를 잃은 부부는 이상한 전화를 걸어 온 제과점 주인을 찾아간다. 마치 죽은 아이의 혼을 쫓아 어두운 저승을 헤매는 것처럼 밤늦게 제과점을 향해 그들은 차를 달린다. 그곳은 세상의 끝이며 사랑의 종말이다. 거기에서 사랑은 잊혀지고 파괴되어 있다.
제과점 주인은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고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도 포기하고 있다. 부부는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은 어이없게도 갑자기 없어져 버렸다. 제과점 주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을 위해서 빵을 굽는 것뿐이다. 그것은 세상의 끝에서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a small, good thing)" 이다. 얼만큼 도움이 되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대신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슬픈 이야기다. 정말로 슬프고 심오한 이야기다. 그러나 마지막에 문득 빵의 온기가 손 안에 남는다. 이것은 정말로 멋진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침대에 누웠을까

결코 희망적이지만은 않은 작품. 마지막 장면- "하지만 내가 그 여자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아이리스가 재빠리 테이블 밑으로 허리를 굽히더니 모든 게 끝나 버린다. 전화는 먹통이 되어 버렸고, 내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은 새명 유지 장치의 코드를 뽑아 버리는 행위에 대한 암시라고 한다.

말년의 카버의 모습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는 4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해서 카버적인 따뜻함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이 작품에도 그 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2002년 11월.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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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에쿠니 가오리라는 여류 작가. <냉정과 열정사이 - Rosso> 에 이어 두번째다. 문체가 정말 Cool해서, 일순 '요시모토 바나나'의 느낌을 받는데, 그녀보다는 감정이 깊이가 농밀하다.

다케오와 리카는 8년동안 동거해온 연인 사이다. 그러나, 다케오가 하나코라는 여자애를 본 지 단 사흘만에, 다케오는 리카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다케오는 리카의 집을 나오지만, 어이없게도 그 집에 하나코가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다.

하나코는 감정의 군더더기는 하나도 없을 정도로 건조하고, 담백하고, 단순한 여자다. 리카는 다케오와의 끈을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하나코를 받아들이지만, 점차 하나코의 매력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하나코는 결국 자살하고, 리카는 혼자 남게 된다.

'하나코' 라는 이름은, 예전에 읽었던 최윤씨의 '하나코는 없다' 라는 단편 소설에서 접했던 이름이라, 그 이미지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이 책 자체의 주인공의 모습 위에, 그 단편 소설이 주었던 이미지가 덧씌워져, 아주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결국은 여러 남자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팜므 파탈'이면서도, 주위의 사람들 -심지어는 여자들에게서도 -로부터 사랑받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완전하지 않으면, 그래서 진공처럼 비어 있으면 모든 것을 받아 들일 수 있게 된다. 무언가 부족하면, 끊임없이 타인으로부터 그 결핍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물론, 그 결핍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그 자신이 아무런 욕망과, 기대에 쌓이지 않을 때에 가능한 이야기다.

역자 -김난주씨- 는 이 소설은 다케오와 리카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완전함을 추구했던, 그래서 결국 자살할 수 밖에 없었던 하나코의 사랑 이야기 라고 했다. 읽다 보면, 정말 주인공이 리카가 아니라, 하나코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섬세하고 여린 감정의 변화들을 아주 냉철한 문체에 담아내서, 읽어나가다 보면 쉽게 감정에 동화되어 버린다. 아주 슬퍼지는,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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