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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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라는 나라는 생소하다. 고작 연상되는 것은 유산균 발효유 정도. 그러니 불가리아의 대표적인 작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라는 이름도 그만큼 낯설었다. 그는 불가리아의 대표적인 작가다.

형식과 구성이 독특하다. 소설 속 화자는 타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르스‘, 초파리 등의 기억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에는 서사 중심이 아닌 소설이라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불가리아의 현대사 속 인물들로 이해하니 흥미로웠다.

몇년 전, 내 또래의 체코 사람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어린시절 사회주의가 한순간에 붕괴된 경험이 꽤 강렬하게 남아있다고 했다. 그 시절의 혼란이 준 미묘한 상처와 갈등, 심지어는 향수도 있다고 했다. 이 소설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불가리아도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개인들은 혼란과 슬픔을 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차 대전 때 참전한 할아버지가 헝가리의 한 시골 과부집에 숨어 살다 서로 사랑하게 된 이야기가 기억난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사이지만 둘은 사랑하게 되고 과부는 남자를 너무 사랑해서 전쟁이 끝난 것도 숨긴채 그를 붙잡는다. 하지만 결국 고향의 아내와 아들에게로 돌아가고 만다.

이렇듯 소설은 슬픔을 간직한 이들의 기억을 풀어내는 동시에 다독이고 있다. 신화 속 괴물 미노타우르스나, 타임캡슐, 물리학, 그림이나 소설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이를 전달한다. (소설 ‘대부’까지 나온다.) 마치 설치 미술이나 실험 예술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의 표현력과 감성, 그리고 풍부한 지식이 돋보이는 소설.

#슬픔의물리학 #게오르기고스포디노프 #문학동네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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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게 웃으며 말 거는 법 - 냉소와 허무를 뚫고 나가는 유머라는 해독제
크리스 더피 지음, 박재용 옮김 / 어크로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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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넘치는 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긴장되고 심각한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유머는 위력을 발휘한다. 이 책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며 TED 팟캐스트, 유머에 관한 워크숍을 진행하는 저자답게 유쾌하다. 번역한 분도 아마추어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원래는 교사였던 저자의 경험부터 재미있다. 한 말썽꾸러기 학생에게서 유머감각을 발견한 그는 학생에게 매일 급식 메뉴를 리뷰하게 했다. 형편없는 음식을 유머 넘치게 표현한 글은 인기를 끌었고 결국 학생의 학교 생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유머는 기술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이라는데 동의한다. 책은 유머가 역할을 한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주는데 결국 대화 상대와 얼마나 공감하는지도 중요하다고. 맞는 말이다.

글의 톤이 매우 유쾌해서 금세 읽을 수 있었다. 미국 코미디와 문화에 맞춰져 있는 내용 이라 다소 낯선 내용도 있다.

#삶에게웃으며말거는법 #키리스더피 #박재용옮김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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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실격 시즌 1 - 이걸 영화라고 찍었냐
Zinn 지음 / 9월의햇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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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안 보태고 읽으면서 한 열번 이상의 폭소가 터졌다. 책 소개와 저자의 이력을 보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현실을 잘 담았을 줄은 몰랐다.

주인공 '최경진'은 첫 연출작 '꼴리는 영화'를 찍었지만 대차게 망했고 그 뒤로 10년 간 차기작을 찍지 못한 상태다. 신생 제작사와 계약은 되어 있지만 시나리오는 번번히 까이고 이래저래 무시 당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서사를 가진 사람을 적어도 수십 명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한때 소설 속의 양서연 피디나 석팀장 같은 커리어를 밟고 있었기 때문인데, 장담컨대 이 소설은 리얼이다. 시종일관 블랙 코미디로 가득하지만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이나 묘사가 너무나 영화판을 잘 반영하고 있다.

정체불명의 악플러를 추적하는 과정이나 의문스럽게 죽음 임감독, 친구 동민이 좋아하는 여배우와의 관계 등 설정도 재미있다. 최감독이 속물스러운 면과 여성에 대한 부적절한 언사는 별로였지만 이 역시 자의식 과잉의 남자들이 다수 포진한 영화판의 일면을 그린 것이라 생각한다.

작년에 재미있게 읽은 소설 <GV 빌런 고태경>도 생각났지만 그 작품보다 더 신랄하고 처절하다. 최근 본 애플 TV의 시리즈 <더 스튜디오>도 생각났다. 곧 방영될 박해영 작가의 신작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도 20년 째 감독 데뷔를 못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비슷한 소재들이 작품화 되는 걸까. 아마도 열정과 꿈을 담보로 착취 당하는 대표적인 직종이라서가 아닐까 싶다.

한창 이야기가 가속을 타는데 끊겨서 아쉽다. 시즌 2가 빨리 나오길 고대하며 모든 망한 영화 감독과 감독 지망생들을 응원해본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감독실격 #zinn #9월의햇살 #서평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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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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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사소한 계기로 이 책과 닿았다. 아마도 이 책의 편집자인 듯한 분이 올린 SNS 글을 보게 되었는데, 자신이 편집한 책 중 <루시 게이하트>를 아낀다는 내용이었다. 찾아보니 피아니스트가 주인공인 소설이어서 호기심이 생겼다.

저자 윌라 캐더(1873-1947)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로 이 소설은 그가 가족의 죽음 등 힘든 시기를 겪은 뒤 집필했다고 한다. 소설은 작은 마을 '해버퍼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데 시작부터 묘사되는 겨울 풍광이 인상적이었다.

'루시 게이하트'는 명랑하고 생기있는 젊은 피아니스트로 음악 공부를 위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인 시카고로 가게된다. 그곳에서 루시는 유명한 성악가 서베스천을 만나고 동경과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고향 유지의 아들이자 루시를 좋아하는 청년인 해리가 시카고로 루시를 찾아온다.

문장들이 놀랍도록 감성적이다. 풍경이나 인물들의 상황, 감정이 묘사된 문장들이 보석같다. 피아니스트인 루시의 일상에서는 많은 오페라 아리아나 가곡이 등장하기도 한다. 루시가 일련의 아픈 사건들을 겪으며 성장하는 내용인 줄 알았다가 뜻밖의 비극이 벌어진다. 언제나 그렇듯 비극은 느닷없이 찾아오고 그 안타까움은 평생을 지배하기도 한다.

루시가 해리가 아닌 서베스천에게 매료되는 이유도 무엇인지 너무 알겠다. 해리가 루시에게 느낀 배신감과 증오도. 하지만 이들이 맞는 비극은 운명의 장난처럼 아팠다.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루시 게이하트'가 시멘트에 남긴 발자국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 단 한 가지 갈망으로 별에 손을 뻗었고 별이 그의 손을 맞잡았으며, 그 사이에서 깨달음이 반짝였다. (17 페이지)

- 어떤 사람들은 신변과 재산에 일어난 변화로 인생이 바뀌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감정과 생각에 일어난 변화였다. (38 페이지)

- 열정과 맹렬함, 앞뒤 살피지 않고 하나의 충동에 자신의 온 존재를 오롯이 불태우는 성정, 바로 그것이 그가 루시에게 발견한 경이였다. 루시는 감정의 불씨가 붙으면 불화살이 되어 끝까지 날아가는 사람이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227 페이지)


#루시게이하트 #윌라캐더 #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세계문학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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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틈새 사계절 1318 문고 152
이금이 지음 / 사계절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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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이 작가의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 중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 이어 읽은 책이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불운한 역사 속에서 기구한 운명을 맞았지만 끝내 버텨낸 여성들의 이야기는 뭉클하고 아름다웠다.

단옥의 가족 이야기는 너무나 가혹하다. 일제시대 강제징용과 차별, 한국 전쟁과 분단, 소련 공산화를 겪으며 한 가족이 이산을 맞는 과정은 너무 극적이라 차라리 거짓말 같다. 나는 조선에 남은 선조들 덕분에 운좋게 디아스포라를 피할 수 있었을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할린 탄광촌으로 간 남편을 찾아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난 단옥의 엄마 덕춘의 삶도 생각해 본다. 고작 1년 반만을 살고 또다시 일본으로 남편을 보낸 뒤 혼자 네 아이를 키워낸 삶. 결국 죽을 때까지 고향에 가지도 못하고 헤어진 남편과 자식들을 보지 못했다. 너무나 안타깝다.

단옥이 보여주는 당찬 생활력과 삶에 대한 의지는 사할린 한인들을 대변한다. 비극적인 운명을 탓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아낸 이들에게 경의감이 든다. 조국의 문화와 언어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도 감동적이었다.

재일조선인들을 다룬 <파친코>가 생각났을 만큼 한 가족을 둘러싼 장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슬픔의 틈새>는 더 압축적으로 단옥 가족을 보여주었다. 소설이 아니었으면 사할린 한인 역사에 관심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책에 수록된 참고 자료들도 찾아보고 싶다.

청소년판으로 재출간된 책의 디자인이 예쁘다. 청소년들이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우리집 중학교에게 건네야겠다.

[본 리뷰는 사계절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슬픔의틈새 #이금이 #사계절 #청소년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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