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사이
케이티 기타무라 지음, 백지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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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 미국인인 케이티 기타무라의 소설. 주인공 역시 일본계로 어릴 때부터 모국이 아닌 외국에서 살아왔다는 설정이다. 최근까지 살던 곳은 뉴욕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는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주인공은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 재판소에서 계약직 통역사로 근무하고 있다.

떠나온 집과 다시 돌아갈 집이 없는 주인공의 심경이 주는 불안감이 있다. 직장 때문에 살게 된 도시에서 주인공은 겉돈다. 그곳에서 만드는 인간관계도. 소설은 내내 이 불안과 불편함을 표현한다.

주인공에게 자신의 동네로 이사 오라는 친구 '야나'. 하지만 얼마 전 그 동네에서는 노상 강도 사건이 벌어질 만큼 안전하지 못한 곳이다. 주인공과 사귀고 있는 '아드리안'은 사실 아내와 별거 중인 유부남이다. 주인공이 직장에서 통역을 맡게 된 제3국의 전직 대통령은 번듯하고 주인공을 신뢰하지만 양민 학살 명령을 내린 독재자다.

이런 식으로 주인공이 헤이그에서 만든 관계는 친밀해 보이지만 모두 불안하다. 어느 누구와도 진실되게 소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들이 잘 나타난다. 특히 '안톤'이라는 인물에서 가장 세게 느껴졌다. 노상 강도를 당하고 큰 부상을 입은 그에게 동정과 연민을 느꼈는데 이 감정은 어김없이 배반 당하고 만다.

굵직한 사건 중심으로 흐르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출중한 문장으로 미묘한 감정을 묘사하는 소설이다. 서사를 따르기 보다 주인공의 감정을 따라 읽어야할 책이다.

외국으로 이주한 지인들을 내심 부러워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도 고충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타국에서의 내밀한 감정을 표현한 이 소설을 읽으며 좀 더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뉴욕 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 탑 10과 전미도서상 후보로도 선정되었다고 한다.

- 왈칵 두려움이 치솟았다. 나는 여기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159 페이지)
- 재판소의 많은 사람이 비슷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어요. 정처 없음이라는 어떤 특성이 거의 이 일의 전제 조건인 것 같아요. (225 페이지)
- 나는 생각했다 - 집에 가고 싶다. 집처럼 느껴지는 곳에 있고 싶다. 그게 어디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25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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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베토벤인가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장호연 옮김 / 에포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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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베토벤인가>. 제목이 제법 거창한데다 책의 분량이 두꺼워서 읽기 전에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 정통 베토벤 해설이나 평론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몰입하며 읽었다.

저자 노먼 레브레히트는 영국의 음악 평론가이자 소설가로 40년간 활동했다. 그는 slippedisc.com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데 클래식 계에서는 유명한 사이트라고 한다. 국내 클래식 전문지 <객석>에도 기고한다고. 저자가 오랜 기간 활동하는 동력이 대중적이고 직설적인 평론에 있다는데 이 책도 이런 특성을 갖고 있다.

베토벤이 남긴 작품 중 100곡을 추려 한 곡씩 주제로 글을 풀었다. 각 곡에 관련된 베토벤의 삶과 해석이 담겨있다. 또 그 곡을 가장 잘 연주한 아티스트, 음반을 소개했다. 심지어 대놓고 별로인 연주도 거침없이 나열했다. 덕분에 베토벤의 작품, 그의 생애와 곡의 해석, 거기에 그 곡을 연주한 이들에 대한 내용을 모두 알게 된다. 매우 효율적인 접근이다.

책을 읽으며 베토벤이라는 인물에 대한 TMI급 정보까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인간 관계, 특히 여성들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많이 알려졌듯이 베토벤은 많은 여성을 사랑했지만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 성적으로는 일종의 결벽이 있었다고. 때문에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모차르트의 여성 편력은 질색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인간 베토벤의 다양한 모습이 담겼다.

클래식 입문자로서 이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우선은 알지 못했던 베토벤의 작품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얻었다. 여러 곡이 있지만 가장 꽂힌 곡은 '첼로 소나타 3번 op.69'다. 계속해서 듣는 중이다.

이미 알고 있었고 좋아하는 곡들은 관련된 명반을 소개 받았다. 특히 20세기에 활동한 유명 연주자, 지휘자에 대한 정보가 많다. 슈베르트 연주로 좋아하던 스뱌토슬라프 리히테르도 자주 등장했고 그와 쌍벽을 이룬 러시아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를 이참에 듣게 되었다. 브리지타워, 클라라 하스킬,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마리야 그린베르크, 카를로스 클라이버, 아시케나지 등 수많은 음악가들을 접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너무도 유명한 곡들은 저자가 추천한 명반으로 들어봤다. 베토벤이라는 거장의 위업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베토번은 '교향곡 7번'이란다. 그 이유를 분석한 글도 재미있었다.

아무리 정보가 많아도 지루하면 페이지가 더디게 넘어갔겠지만 저자는 재미있게 글을 쓰는 능력자다. 내용 중 '교향곡 6번 <전원>'편에서는 자신에게 클래식 음악을 접하게 한 폭력적인 새어머니와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는데 뭉클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에 등장하는 곡들의 플레이리스트를 잘 정리해서 유튜브에 올려두었다. 언제 어디서든 음악을 쉽게 들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것에 새삼 감사하다.

베토벤과 클래식 음악 전반을 알려주는 유익한 책. 무엇보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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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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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는 어쩐지 선뜻 손이 안 가는 작가였다. 그런데 '흑인임을 숨기고 백인 행세를 한 남자가 등장하는 소설'이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고 강렬한 호기심이 생겼다. 비록 구입한지 몇 달 지나고 페이지를 펼쳤지만 금세 독파한 책.

일종의 액자 구성의 소설이다. 60대 작가인 네이선은 남들과의 교류없이 혼자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의 콜먼 실크라는 그리스 고전문학 교수가 그를 방문한다.

평생을 학자로 살아왔고 대학에서는 학과장을 맡아 혁신적인 인사와 제도를 도입한 콜먼. 하지만 그는 강의에 계속 결석하는 학생들을 무심코 'spooks'라고 불렀고 이것이 인종차별로 몰려 결국 강단을 떠난다. (콜먼은 'spooks'를 '유령'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다른 뜻으로 '흑인, 검둥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

콜먼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작가인 네이선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런 분노도 잠시, 70대인 콜먼은 청소부인 30대 여성 포니아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또 한번 세간의 비난과 소문을 일으킨다.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명으로 평생의 불명예를 얻은 콜먼이 사실은 흑인이었고, 젊은 시절 자신의 흰 피부와 푸른 눈으로 백인, 그중에서도 유대인으로 행세했다. 그가 부모 형제와 절연하고 유대인으로 인종을 세탁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이게 가능할까 의심이 들었는데 콜먼의 가계를 훑어 올라간 설명까지 덧붙여지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미국인 중 어떤 인종인지 잘 모르겠는 경우도 가끔 있으니까.

평생 다른 사람들(심지어 아내와 자식까지)을 속여온 콜먼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역설적이다. 그밖에도 젊은 하층 여성과의 만남이 불러일으키는 갖가지 소문, 오해와 편견이 주는 섬뜩하다. 또 진실보다는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듯 하다.

콜먼과 포니아 뿐만 아니라, 포니아의 전남편 레스터, 콜먼을 음해하는 프랑스인 여교수 델핀, 그리고 네이선까지. 모든 이들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무척 깊이있다. 인간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탐구하고 또 입체감있게 쌓아올리다니. 필립 로스라는 작가에게 절로 경이감이 들었다.

소설의 배경은 1998년, 빌 클린턴이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 섹스 스캔들로 뜨겁던 때였다. 당시 클린턴의 성추문 자체 보다도 그의 위증이 미국인들을 더 분노케 했다고 한다. '거짓말과 그것을 둘러싼 소문'이라는 현상을 보고 아마도 작가는 이 이야기를 쓰지 않았나 싶다. 여러모로 주제를 탁월하게 접근한 작가다.

몰입감도 있고 장르적이기까지 하다. 2003년 안소니 홉킨스와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필립 로스, 완전 인정.
그 동안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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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천국 가는 날
전혜진 지음 / 래빗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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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사람들, 그리고 보통의 음식이 갖는 특별함.

열 편의 연작소설집이다. '김밥천국'은 아마도 편의점이나 노점을 제외하고는 가장 손쉽고 저렴하게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곳일 것이다. 이 책은 이토록 흔한 분식집 메뉴를 소재로 다양한 인물들에게 조심스럽게 렌즈와 스피커를 들이댄 듯한 이야기를 담았다.

학습지 교사, 워킹맘, 삶의 끝자락에 있는 싱글 동성애자, 민원에 시달리는 공무원, 이주노동자, 성폭력 피해자 등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열 편의 이야기들 중 서로 연결되는 것들도 있지만 제각각 다른 상황과 서사를 지니고 있다. 읽으면서 든 생각은 작가가 그동안 정말 다양한 인물들을 관찰하고 수집했겠다는 것이다.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소설의 배경이 동인천이라는 것도 알았다. 각종 분식 맛집이 포진해 있는 그곳을 떠올리니 더 실감났다. 에피소드로도 나오는 '쫄면'이 최초로 개발된 곳도 동인천이라던데, 소설에 등장하는 식당을 조만간 가봐야겠다.

'오므라이스'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가족의 식단을 책임지는 삶에 대한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좋았다. 이를 분식 메뉴와 연결시킨 아이디어도. 소수의 특권자들이 아닌 이런 보통 사람들의 힘을 느끼게 해준 최근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더 특별하게 읽었다.


※ 도서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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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수반캄 탐마봉사 지음, 이윤실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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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반캄 탐마봉사'라는 작가 이름이 낯설었다. 도무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어서 확인하니 라오스 계 캐나다 사람이다.1978년 태국 농카이에 있는 난민촌에서 태어나 한 살에 캐나다로 이주하여 토론토에서 자랐다. 저자를 설명하는 이력이 작품의 많은 것을 설명한다.

열 네편의 단편 소설이 담긴 책이다. 표제작인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작품이 라오스 이민자들의 삶을 그렸다. 언어, 문화적으로 너무도 다른 낯선 곳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부모를 보는 자식의 시선, 그리고 이민 1.5세대로서의 좌절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나이프(knife)라는 단어의 첫 글자 k는 왜 발음하면 안되는지 부모는 알려주지 못했다.(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또 해골 코스튬을 입고 부자 동네 집들의 문을 두드리며 '트릭 오어 트릿'대신 아빠가 알려준 '치-카-치'라고 소리치면 사탕을 얻는다.(치-카-치!) 이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엄마는 결국 다시 라오스로 떠난다.(세상의 가장자리)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닌 다른 라오스 이민자들의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이들은 결코 주류 캐나다인으로 살 수 없다.

네일샵 직원인 전직 복서는 단골 손님을 짝사랑하지만 그녀는 다가갈 수 없는 대상이다.(매니 페디) 캐나다 이민 후 스쿨버스 기사로 사는 남편은 아내가 알바하는 카페 사장과 바람을 피워도 뭐라고 하지 못한다.(스쿨버스 기사)

그밖에도 70대 할머니가 옆집 30대 남자와 사랑에 빠진 '슬링샷'(2019년 오헨리상 수상작)도 여운이 대단했다.

단편소설만이 줄 수 있는 강렬함과 페이소스가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서늘한 이야기, 웃픈 이야기들이 섞어있어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읽다보니 초기 이민을 떠난 한국인들의 이야기도 생각났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도 떠올랐다. 캐나다 사람들이 라오스 이민자를 대하듯이 우리도 그들을 대하고 있지는 않을까. 언젠가 한국어에 능통한 외국 이민자 작가가 등장해서 탐마봉사처럼 한국 사회를 꼬집는 문학작품을 내놓는 날이 올 것 같다.

책 표지가 예뻐서 독서가 더 즐거웠다. 원서보다 훨씬 디자인이 좋더라.(디자인 표지 최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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