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페이지 터너 소설이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은 오래 전 임신과 유산을 다룬 <KN의 비극>만 읽었고 걸작으로 소문이 자자한 <제노사이드>는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수년 째 머물고 있다.(이렇게 리스트에 머물러 있는 책만 수백권이다. 이걸 다 읽기 위해서라도 장수해야 한다.)<13계단>은 저자의 데뷔작이다. 일본의 저명한 미스터리 소설상인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미야베 미유키였다. 책 뒷부분에 미미 여사의 극찬을 담은 추천사도 재미있었다.사형 집행을 앞둔 사형수 기하라. 그는 하필이면 사건 당일의 기억을 상실해서 자신의 무죄를 밝힐 수 없다. 기하라의 무고를 밝히기 위해 은퇴한 교도관 난고와 상해 치사로 복역 후 가석방 중인 준이치가 한 팀이 되어 사건을 추적한다.구조가 무척 뛰어나다. 어쩌면 이렇게 설계를 잘 했을까 싶을 정도다. 무엇 하나 허투루 설정된 것이 없는 빌드업이 잘 된 스토리다. 무엇보다 기하라의 사건과 준이치의 사건을 연결시킨 것이 가장 놀랍다.재미적 요소 뿐만 아니라 주제 의식을 세련되게 녹여낸 점도 훌륭하다. 사형 제도의 모순과 악인을 단죄한다는 의미 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난고와 준이치의 관계도 좋다. 난고의 믿음이 결국 준이치를 구한다는 것도. 굳이 안타까운 점을 뽑자면 다소 찝찝한 결말인데, 소설의 주제를 놓고 생각하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역자 후기를 보니 작가는 자료 조사와 취재를 엄청 자세히 한다고. 근데 실제 집필은 두 달 밖에 안 걸렸다니 대단하다. 리스트에 묶여있는 <제노사이드>도 곧 읽어봐야겠다.*도서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13계단 #다카노가즈아키 #황금가지 #일본소설 #추리소설 #미스터리 #범죄소설 #사형제도 #에도가와란포상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더디긴 해도 조금씩 이성과 인류애가 발전하는 방향으로 흐른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사실에 회의가 들 때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접할 때다.사뭇 먼 나라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이스라엘의 태도와 최근 정세 때문에 불안도 많아졌다. 미국이 이란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는 않을지 걱정되어 읽게 된 책이다.이 책은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저항 운동인 '하마스'를 제대로 알리고자 쓰였다. 불과 1년 전인 2024년 5월 '하마스의 역사와 성장'이라는 주제로 열린 웨비나 대담의 내용을 담았다.다섯 명의 팔레스타인 전문가들과의 대담을 통해 그동안 알려진 '하마스'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는다. 이들에게 붙은 과격한 이슬람 광신도, 여성 억압, 무차별적 테러와 학살이라는 수식어가 이스라엘의 관점으로 악마화된 것을 알린다. 오히려 이슬람주의 여성들이 하마스 때문에 대학 교육이나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반대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과 학살은 왜 축소되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공격을 '잔디 깎기'로 부른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상심리와 미국이라는 든든한 뒷배, 거대 자본 등을 업은 이스라엘의 폭력은 과연 옳기만 한가.책은 하마스를 옹호하자는 단순한 논리를 펼치지 않는다. 다만 편견과 조작없이 바르게 이해하자고 역설한다. 무엇이든 원인과 맥락없이 악마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생각했다. 팔레스타인 추방의 역사와 시오니즘에 따른 이스라엘의 건국을 모르고 현상만을 비판할 수는 없다.역자인 이준태 님의 후기가 흥미로웠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과 우리의 식민주의 과거가 겹쳤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팔레스타인 저항운동과 일제시대 우리의 독립운동의 결이 비슷한 것도 같다. 우리 역사를 모르는 외국인이 안중근, 이봉창, 의열단의 의거를 단순히 테러로 규정한다면 얼마나 분노할 일인가.대담을 정리한 글이라 팔레스타인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로서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신 관련된 주요 인명과 용어가 따로 정리되어 있다. 대신 읽으면서 팔레스타인을 다룬 다른 콘텐츠로 관심이 확장되었다.*도서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당신은하마스를모른다 #헬레나코번 #라미g쿠리 #이준태옮김 #동녘출판사 #하마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벽돌책 깨기의 쾌감이란 엄청나다. 1월에 구입한지 딱 5개월만에 완독했다. 스스로가 무척 자랑스럽고 기특하다.3년 전에 <오뒷세이아>를 읽었고 그때 대강 그리스 고전의 맛을 봤기 때문에 <일리아스>는 읽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작년 12.3 계엄 덕분에 생각이 바뀌었다.트위터에서 많이 회자된 에피소드인데 탄핵 집회 당시 어느 그리스 고전 덕후가 <일리아스>의 첫 구절을 담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광장의 수많은 깃발들 속에 그것을 알아본 웬 중년 남성이 있었는데 그분은 바로 서울대에서 그리스 고전을 연구하는 교수님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덕후 하길님은 성덕이 되어 <일리아스> 관련 글도 밀리로드에 연재하고 이 책을 번역한 이준석 교수와 공저책을 낼 예정이란다. 계엄과 탄핵이라는 민주주의의 파도 속에서 펼쳐진 너무나 극적이고 훈훈한 스토리다.(자세한 내용은 하길 님의 '일리아스를 좋아하세요?'를 참고하면 된다. 글을 너무 잘 쓰시고 그리스 고전에 대한 해박함과 애정이 담겨서 놀랐다. 덕후는 위대하다.)이런 미담이 있는데 안 읽어볼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한 챕터 정도 읽으려 했는데 쉽지 않았다. 특히 그리스 고전은 인물 판별 난이도가 러시아 소설 이상으로 힘들다. 같은 인물을 본명 대신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와 같이 다양하게 지칭하기 때문이다. <오뒷세이아> 때처럼 노트에 이름을 적어가며 읽었다.<일리아스>는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에서 일부분만을 담았다. 초반에 진입할 때는 의외로 영화<트로이>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킬레우스를 브래드 피트, 헥토르를 에릭 바나로 생각하니 몰입이 잘 되었다.전투 장면이 매우 사실적이고 세부적이다. 또 신들이 개입하는 장면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불멸의 신들이 '결국 죽게 마련인' 인간들에 개입하지만 전지전능하게 다스리는 것은 또 아니다.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있다는 것이 새삼 다가온다.클라이막스 격인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의 만남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아들 헥토르를 죽인 원수 앞에 무릎을 꿇은 아버지 프리아모스. 그를 통해 아킬레우스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상심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적이었던 상대를 자신과 동일한 인간으로 여기며 큰 인간적 성찰을 하는 아킬레우스. 최근 뉴스에서 보도되는 전쟁 소식에 겹쳐지면서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중간중간 삽화가 있어 이해에 도움을 준다. 또 부록으로 실린 인물 소개와 역자 후기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일리아스>의 구조와 인물 세팅이 매우 탁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읽히고 있나보다.#일리아스 #호메로스 #아카넷 #이준석옮김 #하길 #고전 #그리스고전 #벽돌책
요새 즐겨보는 유튜브는 프랑스인 안무가 '카니'의 채널인데 그의 취미는 한국 막장 드라마를 보며 욕하기다. 모두가 알다시피 막장 드라마의 필수 요소 중 하나가 불륜. 하지만 막장을 걷어내고 얼마든지 고급스럽고 진지하게 다룰 수 있는 소재도 불륜이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불륜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매혹적인 스토리임이 틀림없다. 이런 불륜을 소재로 한 앤솔로지라니. 좋아하는 장강명 작가가 포함되어 있어 더 기대되었다. 장강명의 <투란도트의 집>은 유부녀 직장 상사와 바람을 피우는 싱글남의 이야기다. 오페라 <투란도트>의 스토리와 아리아가 비중있게 묘사되는데 소설 속 인물들과 중첩된다. 차무진의 <빛 너머로>. 은퇴한 60대 영문학 교수가 버려진 일체형 PC를 복구하다 기묘한 동영상을 발견한다. 수록 작품 중 가장 독특했는데 오히려 불륜보다는 미스터리적 요소가 강했다.소향의 <포틀랜드 오피스텔>은 불륜이라는 소재를 가장 잘 녹여냈다. 미국 포틀랜드에서 가족과 3년 간 체류하게 된 남자는 아내가 새로 사귄 아들 친구의 엄마에게 첫눈에 반한다. 익숙한 코드지만 나름의 반전도 있고. 하여간 재미있었다.정명섭의 <침대와 거짓말>은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남한의 707부대 출신이고 나머지 하나는 북한 요원 출신이다. 이들이 불륜으로 인해 벌어진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데 두 사람의 케미가 좋다. 두 캐릭터가 나오는 장편소설이나 시리즈를 보고 싶다.앤솔로지의 좋은 점은 접하지 못한 작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새롭게 알게된 작가의 다른 작품도 살펴봐야겠다. 각 작품마다 음악이 등장하는 것도 특별했다. 또 작가 후기에 이 책이 기획된 비화도 소개되어 있다. 원래는 작년에 작고한 정아은 작가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슬프고도 허망한 일이다.#우리의연애는모두의관심사 #장강명 #차무진 #소향 #정명섭 #정아은 #마름모출판사 #불륜 #앤솔로지 #단편소설
아, 부럽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책의 작가님이 가장 부러운 사람이다. 그림을 전공하고 다수의 저서를 낸 저자는 시골에서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살고 있다. 이 책은 사계절 직접 키우고 해먹은 음식을 소개한다.책의 제목처럼 간소하지만 건강하고 맛난 제철 먹거리들.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간략한 레시피만 봐도 흐뭇하다. 도시 사람은 감히 꿈도 꾸기 힘든 낙원으로 느껴졌다.작물마다 키우게 된 계기나 과정을 담았고 그것을 수확하여 조리하는 법도 소개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군침이 돈다. 각종 채소를 거둘 수 있는 텃밭도 부러웠지만 과실을 얻을 수 있는 나무가 여러 종류가 있다니. 오디, 복숭아, 감 등을 직접 따먹는 즐거움을 나도 느껴보고 싶다.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은 선드라이드토마토다.아파트에 살면 토마토를 볕에 말리기가 쉽지 않은데 시골이라면 얼마든지 자연 건조가 가능하다니. 또 직접 굽는 빵과 피자도 맛있겠다.갖가지 반찬이나 저장식품 뿐만 아니라 빵, 디저트까지 메뉴가 다양하다. 저자의 안주 메뉴만을 담은 <안주는 화려하게>라는 책도 궁금해진다.먹이를 구하려면 마트나 온라인몰을 이용해야 하는 삶이 오히려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만큼 정직하게 먹거리를 얻고 요리하는 삶이 풍요롭게 그려진 책이다.*도서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먹이는간소하게 #노석미 #사계절 #노석미에세이 #시골생활 #요리책 #건강식 #텃밭 #에세이 #서평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요리 #푸드 #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