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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이 화두다. 국어사전에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특성’이라고 규정되어 있는 ‘창의성’은 ‘평범성’에 대립된다. 요즘세상에서 ‘창의적이지 않다’는 ‘평범하다’와 같고, 이때의 ‘평범함’은 종종 무엇인가를 축내기만 하는 ‘악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초절정 재벌 한분은 만명을 먹여 살리는 한명의 인재를 거론했고, 교육계는 그 만명을 먹여 살리는 한명을 길러내는 교육을 가리켜 '창의성 교육'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집집마다 난리가 났다. 너도나도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영재학교, 영재스쿨, 영재 교육원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소위 ‘수월성 교육’이다. 제때 배우고 배운것을 제대로 익힌다는 ‘학습’의 내밀한 의미는 교문앞에 팽개쳐지고, 학원에서 빨리 배우되 어슬프게 익히는 일차원적 암기기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재벌회장이 거론한 한데 대한민국이 선진국에 들지 못한 이유가 정말 이런류의 창의성 부족에 달린 문제였을까?.

 

우리는 이에대해 한번도 진지하게 논의해 본적이 없다. 사실 결론은 단순하다. 1,2,3차 산업의 전개과정은 나라마다 다르다. 상대적으로 다음 단계로의 전개가 빨랐던 나라들은 서비스업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소위 ‘평범성’으로 상징되는 숙련공의 능력에서, ‘비범성’으로 불리는 감각적 지식을 갖춘 이들을 선호하게 된다. 따라서 요즘 우리가 창의성을 요구하는 것은 산업구조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지, 창의성의 부족이 산업 구조의 변화를 더디게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즉 선후의 인과관계가 틀린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우리나라에 창의성 열풍이 불어 닥친 것 역시 산업구조가 빠르게 3차 산업화하면서 과거 2차 산업의 공간에서 느슨했던 경쟁이 격화되고 있음을 잘 나타내는 신호다. 한데 문제는 이런 조류가 다수에게 비극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3차 산업의 비중 증가는 만명을 먹여 살리는 한명이 아니라 만명이 먹을 것을 다 가져가는 한명이 양산되면서 사회적 양극화와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 구조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창의성, 혹은 수월성은 이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코드로 변해버렸고, 그 고유의 의미, 즉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특성’은 어느새 어느 교육 이상론자의 몽상처럼 들리게끔 되어 버렸다. 어쨌거나 흘러간 강물을 되돌릴수는 없다. 3차 산업이 그 틀안의 패배자들에게 실패의 쓴맛을 보여준 이상, 어떻게던 다음 4차 5차 산업의 시대에서는 생존의 새로운 틀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것이 전세계적인 ‘통섭’ 열풍이다. 수학,물리학,화학이 발전하면서 근원에 접근하게 되고 근원에 접근할 수록 인간은 과학에 대한 곤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진화론은 인정하지만 진화론의 출발인 생명의 탄생은 설명 할 수 없고, 우주의 질서와 법칙은 하나하나 비밀을 벗어 나가지만 그 질서를 구성하는 태초의 출발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기 때문이다.

 

철학을 무너트리고 질주해 온 과학이 일대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즉 실험실에서 성장해온 과학자의 직선적 사고는 갈수록 한계에 부닥칠 수 밖에 없는 국면에 도달한 것이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과학에도 머릿속의 실험실 즉 상상력이 더해져야 했고, 이미 발달해버린 1,2,3 차 산업에도 그 다음을 대치 할 4차 산업의 지적도가 그려져야 하게 된 것이다. 기존의 틀이 아닌 틀, 기존의 생각의 범주를 벗어난 상상이 요청되어 진 것이다. 통섭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이 도살해버린 철학이 부활하고, 양손에 전기톱과 중성자탄을 든 전문 경영인이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이 지점에서 통섭은 그동안 따로 이야기 되어졌던 것들을 하나로 모아 매듭을 짖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이 탄생했다. 일견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천재들, 이를테면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리처드 파인먼, 버지니아 울프, 제인 구달, 스트라빈스키, 마사 그레이엄 등 저자의 관점에서 뛰어난 창조성을 발휘한 사람들이 과학, 수학, 의학, 문학, 미술, 무용 등 분야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사용한 13가지 발상법을 생각의 단계별로 정리했다.

 

그리고 그들의 발상법을 관찰, 형상화, 추상,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 등 13단계로 나누어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뿐 아니라 직관과 상상력을 갈고 닦아 창조성을 발휘하는 방법 또한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이 책이 그래서 아쉽다. 창의력이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사례연구와 분석을 통해 접근한 참신한 시도와, 방대한 자료를 논증과 더블어 소개한 열정과 지적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계발서나 경영전략서의 양식의 범주를 넘지 못했다는 점이 옥의 티다. 이를테면 권력의 법칙이나,경영전략 류의 촉류방통형(觸類旁通形) 집대성의 범주를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대한 평은 호불호가 첨예하게 엇갈린다. 문자 그대로 뻔한 이야기라는 평에서부터 산발적 지식에 대한 놀라운 집적도를 보인 책이다는 평가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창의력이라는 것을 주제로 이 정도의 자료를 정리해서 엮어낸 노고만 해도 충분히 일독할 가치가 있다. 단지 이 책 자체가 창의적이냐는 난감한 질문만 더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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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Justice) 부재(不在)'의 시대다.

 

청문회에 등장하는 ‘권력의 리더’들이 하나같이 ‘관행’과 ‘실수’라 말하지만, 이를 비판해야 할 언론마져 ‘능력을 쓰는 것이지, 성인을 뽑는 것이 아니다’고 여기에 호응한다. 이쯤되면 소위 ‘관행’의 부근에도 가보지 못한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은 실망을 거듭하며 깊은 좌절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제 우리사회에서 감히 ‘정의’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가 면구스러워 진 것이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정의’란 ‘사상가에 의하여 입법자나 위정자(爲政者)가 그 사회에서 궁극적으로 실현해야 할 규범 및 가치로 여겨 온 개념’이다. 이 개념에 따른다면 ‘신(神)’의 몫인 ‘진리(眞理)’에 반해, ‘인간의 몫’이라 할 수 있는 ‘정의’는 ‘진리’와 비슷할 것으로 여겨지는 ‘합의’ 내지는 ‘주장’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진리’를 주장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드러낼 수는 없으나 가늠 할 수는 있는 절대적 가치’인 것이다.

 

때문에 인간이 ‘진리’를 규정하거나, 창조 할 수는 없지만, 대개 그에 부합한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가리켜 ‘정의(正義)’라고 불렀다. 또 정의는 ‘사적정의’와 ‘공적정의’로 나뉜다. ‘공적 정의’란 앞서의 선각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주장한 일종의 ‘원리’에 해당한다. 유가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리(理)’라 하고 도가에서는 ‘(道)’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런 ‘공적 정의’의 원리는 ‘사적정의’를 규율한다.

 

‘사적정의’란 ‘공적정의’의 바탕위에서 인간끼리 관계하고 맞부닥치며 행위하는 규범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 ‘내가 덕을 보기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지 않는 것’등이 이에 해당 할 것이다. 이 사적정의를 우리는 ‘법(法)’으로 규정하고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심판관’과 ‘집행관’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한데 요즘들어 이런 ‘사적정의’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있다.

 

좁게는 인간이하의 성정(性情)을 가진 범죄자들이 타인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고, 때로는 소외된 가장들이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우유와 빵을 훔치기도 한다. 하지만 사적 정의에는 이런 단순한 것만이 아닌 좀 더 고차원적인 ‘통치의 원리’라는 것도 있다.

 

‘통치의 원리’는 리더쉽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를 규율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적절한 통제를 행하는 규율이다. 이것은 공적 정의와 사적 정의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한데 여기서도 ‘정의’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입법자들은 대중을 강제하는 법을 만들지만, 정작 자신은 그 법을 지키지 않는다. 행정가들은 규범을 정하지만 스스로는 치외법권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명료하다. 지난세기 우리가 추격성장기를 살았기 때문이다. 선두에 선 그룹들이 먼저 앞서나가며 닦은 길을 내쳐 달려온 것이다. 저 멀리 뒷꼭지조차 보이지 않는 ‘선도그룹’을 따라 잡기위해 모두가 앞만보고 내달려온 시기를 살아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조리’가 잉태되었다. 빨리 선두를 잡기위해 앞을 가로막는 사람의 뒷덜미를 채고, 다리에 걸려 넘어진 이들을 외면했다. 뒤처지는 이들은 야멸차게 버려졌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양심의 가책’을 외면한 시대였던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다. 추격성장기를 거쳐 선도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지난 세기에 용인되었던 ‘관행’들은 더 이상 ‘원리’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시대가 온 때문이다. 선두를 따라잡고 보니, 이제 ‘남이 낸 길’이 아닌 ‘우리 스스로 새로운 길을 내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뒤를 돌아보면 이제 우리를 쫓는 수많은 추격자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나아갈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선도성장을 위해서는 지도를 보는자, 나침반을 보는자, 길을 딲는자, 그들을 위무하는자, 모두가 필요하지만, 추격성장의 과정에서 합의하고, 아무르고, 손을 잡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회는 그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순간 추격성장 시대의 리더쉽을 가졌던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나를 따르라. 과거의 겸험을 살려 우리가 이끌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따라잡는 추격에는 성공했지만, 대신 집단의 동질성을 훼손하고, 슬픔과 분노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익숙하지 않다.

 

이제는 과거의 리더쉽이 아닌 새로운 리더쉽이 필요한 세상이 된 것이다.

 

과거와 달리 ‘위로하고, 이해하고, 위무하고, 따뜻하게 머리를 맞대는 리더쉽’, 그것이 바로 공적, 사적 정의를 모두 만족시키는 새로운 리더쉽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리더 한 명이 천 걸음을 앞서며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리더쉽이 아닌, ‘천 명의 손을 잡고 같이 한 걸음’을 설득하며 나아가는 리더쉽이 대중이 기다리는 혹은 선도 성장기의 새로운 테제이자, 새로운 시기 리더쉽의 모형인 것이다.

 

그점에서 ‘안철수 박사’는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쉽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동시대인과 서로 돕고 좋은 관계를 맺고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이 짧은 한마디 속에 새로운 리더쉽의 핵심이 들어 있다. ‘함께하는 사회’, 수직이 아닌 수평의 사회, 직렬이 아닌 병렬의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외부적 성공이 개인의 성공은 아니다. 남들은 성공과 실패를 평가해도 자신은 반대일 수 있다. 이런 걸 성공으로 생각하면 추락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겸손의 코드다. 하지만 이 말에는 나의 성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연대의 메시지가 숨어있다. 어느 순간, 사회에서 평균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것은 사회가 내게 나누어 준 것이지, 내가 창출한 것은 아니라는 ‘공존’의 키워드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지금 세기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우리나라는 지금 가장 위험한 흑백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좌파, 우파는 머리 나쁜 사람들의 사고다.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는 탈권위주의로 나가고 있다. 정치• 사회•문화•기술까지 모두 그렇다. 기술 역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기술만 살아남고 선택되고 강해진다. 20세기에는 정보를 독점하고 가공하고 전달하는 기득권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대중의 시대다”.

 

그는 구시대의 리더쉽을 가슴이 없는, 정의가 개입되지 않는 리더쉽이라 생각하는 듯 하다. 그의 핵심 코드는 ‘대중의 시대’라는 것이다. ‘선도성장기’의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여기서 인식의 또 다른 중요한 한 단면을 감추지 않는다. 추격성장기에 심판의 휘슬을 무시하고 달린 사람들이 구축한 아성(牙城)에 접근 할 수 없는 대중들이 미래의 기회를 상실하고 사회적 마이너리티로 고착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시스템을 가지느냐에 따라 교육은 달라지는데 지금 우리 시스템은 사회가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결국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없으면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는 법인데, 이런 게 위기라는 인식이 없는 것이 진짜 문제다. 공감대 형성이 시급한데도, 지금 우리사회에 공감대가 없고 그것을 이끌어 낼 리더와 리더십이 없다”.

 

즉 ‘결과 평등주의’와 ‘성과주의’라는 이념적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닌, ‘기회균등’이라는 제 3지대의 접점을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기회가 균등하다면 그 이후의 문제는 스스로의 근면과 노력에 달린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빌 게이츠’등이 말하는 가슴이 따뜻한 자본주의와 맥이 통하는 것일 수도 있다. ‘태만과 나태’를 방치하면 문명과 역사는 후퇴한다. 하지만 근면과 성실이 성과를 얻지 못하면 사회는 붕괴한다는 논리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겸손’을 잃지 않는다. 추격성장기에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등수를 나누어 일,이,삼등을 매기면 그만이다. 등수에 든 자와 들지 않은 자는 그 자체로 승패가 갈린다. 그 과정에 누가 반칙을 했건, 그 과정에 누가 다른 이에게 손을 내밀다가 늦어졌건 가리지 않는다. 기계적인 성과만 강조한 것이다. 그 결과 승자의 논리가 마치 모두가 받들어야 할 원리처럼 변질되고, 그 결과 정의는 ‘훼손’되어 버린다.

 

그는 여기에 대해 완곡한 표현으로 이야기한다

 

“재단하려는 것이다. 집집마다 가훈이 있다. 하지만 그것의 등수를 매길 수 없다, 건방진 생각이다. 사람의 생각에 우위가 없는 것이다. 모든 가치관은 중요하다. 그 사람의 역사가 반영된 것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가치판단이 미숙하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그렇지 않은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어렵게 만든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흑백논리를 가지면 훨씬 위험지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히 일등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선민이 되고, 뒤쳐졌다는 것만으로 열위가 된다면 모순은 마그마처럼 들끓고, 합의와 타협이 사라지고 분열과 절망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결국 안철수의 리더쉽은 간명하다.

 

‘정의’, 혹은 ‘정의로움’의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가 사라진 사회는 미래가 없다. 이것이 안철수가 젊은 청년들에게 ‘백마타고 온 초인’처럼 여겨지는 이유이자, 안철수 리더쉽의 근본인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donodo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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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16)


늘 새로운 것을 꿈꾸는 사람 안철수 


정부가 사령관 역할 하던 시대는 갔다


 

 

영웅이 역사 만든다고 생각지 않아 … 실패 용인하면 성공 확률은 높아진다
영재교육·수월학습 안 믿어 … 교육은 기능과 속도 위주로 가면 실패
위험한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 좌파·우파는 머리 나쁜 사람들 사고




 

인터뷰 동안 단 한 번도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살면서 가장 두려운 것이 ‘어제의 안철수’보다 ‘오늘의 안철수’가 더 못한 것입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안철수 박사는 모든 언론사에서 1순위 인터뷰에서 후보로 꼽는 사람이다. 하지만 직격인터뷰에서는 늘 다음 순위로 밀려났다. 그의 이야기가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너무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에서다. 검색창에서 안철수를 쳐보면 그를 인터뷰한 기사가 넘쳐난다. 더구나 10년 이상 수 많은 인터뷰를 해왔음에도 그의 말은 늘 수미일관하다. 허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러니 인터뷰어의 입장에서는 그를 만나서 물어볼 새로운 거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이를테면 그는 전투에 임하기도 전에 상대를 주눅 들게 하는 장수인 셈이다.



안철수 교수, 안철수 사장, 안철수 교수, 그리고...



안철수 박사를 만난 곳은 대전에 있는 ‘카이스트’ 연구실이었다. 수인사를 나누자마자 그가 먼저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참 질문이 중요한 시대인 것 같아요. 제가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누군가가 물어주면, 대답을 하면서 스스로 생각들이 정리가 되죠. 좋은 질문이 얼마나 어려운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21세기 컨버전스(융합)의 시대에는 좋은 질문의 역할이 좋은 답변보다 중요한데, 우리는 너무 좋은 답에만 익숙해 있어요.”

(허를 찔렸다. 의도했건 아니건 그가 선공을 날린 셈이었고, 깊은 내공이 실린 초절정 고수의 부드러운 일격에 인터뷰어는 깊은 내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Q. 선생님은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던진 화두, ‘좋은 질문’에 대해 고민하며 던진 첫 번째 우문이었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겸양도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저는 늘 고생 좀 안하고 실력을 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요. 한 분야도 제대로 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무언가 하나를 하기 위해서는 정말 죽을 만큼 괴롭죠. 절대 꿈에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대입에서 일등을 한 친구들이 늘 교과서에 충실했다고 말하듯, 그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고시 삼관왕이 거만한 표정으로 '나는 원래 머리가 나빴다'고 말하는 유의 겸양은 아니었다. 진짜 그렇게 믿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재능이상으로 노력을 했던 수재형 인간이다.)

Q. 선생님은 계속 변신하면서 자신의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를 키워 온 대표적인 사람으로
여겨지는데요. 그렇게 자신의 가능성을 계속 키워 온 이유는 무엇 입니까?


음, 레버리지를 키운다는 것은 효율성을 극대화 한다는 뜻인데요. 저는 오히려 가장 비효율적인 선택을 해 온 사람입니다. 의학을 20년 공부했지만 결국 활용하지 못했고, 프로그래밍을 1만 시간 이상 했지만 프로그래머를 그만두었죠. CEO 역시 10년 정도 하면서 좀 편해질 만 할 때 다른 공부를 하러 떠났고, 지금은 학교에 있잖아요. 만약 효율성을 ‘과거 가치를 활용하는 연속성’이라고 정의한다면 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Q. 그렇지만 이런 변신들은 스스로 택한 일인데, 말씀하신 대로 ‘과거가치’를 버리면서
그렇게 숨 가쁘게 변신해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종교가 없어서 내세를 믿지는 않지만, 인생을 수동적으로 사는 것에 반대합니다. 동시대인과 서로 돕고 좋은 관계를 맺고 살고 싶어요. 과학자로서 생각하면 우주는 먼지로 (Star Dust) 구성되어 있잖아요. 여기서 만들어진 생명체가 나인 것이지,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거에요. 다시 우주먼지로 가는 거죠. 그래서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이 가장 두려워요, 그 마지막 순간에 실패다 싶으면 더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그 순간의 ‘의미와 재미 그리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요. 변신처럼 보이는 것은 그런 선택의 결과물일 뿐이에요.

Q. 다음 ‘변신’은 어떤 것 입니까?

나도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는 모르겠어요. 총장님께 임명장을 받을 때 임기가 2027년까지로 되어 있어요. 테뉴어(석좌교수)인 셈이죠. 한데 제 명함에는 ‘안철수 연구소 이사회 의장’이 가장 먼저 적혀있어요. 교수는 상근이고 이사회 의장은 비상근인데 말이죠. 총장님께는 죄송하지만 과연 내가 정년까지 있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건 자신이 없어요.

Q. 그럼 이미 다른 변신을 위한 준비를 하고 계신가요?

그건 아니에요. 앞으로 어느 순간 더 의미가 크고 보람과 재미가 있는 일이 닥치면, 혹은 그걸 안 하면 후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럴 수 있다는 뜻이죠. 하지만 의사를 그만둘 때 6개월, 안 연구소 그만 둘 때 1년을 고민했어요. 1년 내내 그것만 고민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결과 죽을 때 후회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야 그렇게 하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고민거리가 없어요.

Q. 지금까지 의사, 기업가, 교육자로 사시면서 단순히 그 역할 자체가 아닌, 일종의 사회적 메시지를 많이 던지셨는데, 혹시 앞으로 정치를 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정치… 우선 저는 정치를 몰라요. 하지만 저는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영웅이 역사를 만든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시 시대의 부름에서 앞에서 어떤 사람이 영웅으로 불렸을 뿐이다’고 생각하죠. 하물며 제가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Q. 참여정부 시절 정통부 장관 제의가 왔을 때 거절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까?

그때는 잘할 자신이 없었어요. 내 기준으로 성공이라는 기준에 맞출 자신이 없었던 거죠. 당시에는 시야가 넓지 못했고 실행능력도 부족했어요. 스스로 덜 여문 과일이라 생각했죠. 그러고 보니 ‘내 기준에 불충분했다’가 정답인 셈이네요. 그리고 저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를 좋아하지 않아요.

Q. 국가사회가 다시 요청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건 그때 가서 또 생각할 문제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니에요.

(통상 인터뷰에서 대개 이런 질문들은 상당한 긴장을 유발한다. 서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인터뷰이와, 속내를 살피려는 인터뷰어의 탐색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철수 박사는 담담했다. ‘그의 말은 의미가 투명하다’는 세간의 평가들이 괜한 말이 아닌듯했다.)

Q. 앞서 말한 ‘내 기준의 성공’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성공하는 사람들은 재능이 있어서 그랬다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죠. 하지만 한 사람의 성공은 사회가 그에게 가치를 준 것이에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다른 사람이 개입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전형적 의미에서의 성공은 의미가 없어요. 내 것이 아니니까요.

Q. 그런 측면에서 선생님은 스스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저는 다른 것을 만들고 싶은(Make difference)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름을 남기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크로마뇽인이 그린 그림을 보고 후세에 ‘누군가가 그림을 남겼구나’라고 하지, 그걸 누가 그렸느냐에 의미를 두지 않잖아요. 저 역시 뭔가 다른 걸 남기려는 것뿐이죠. 그런 것을 남기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여기고요. 그 점에서 저는 아직 성공과 실패를 판정 할 수가 없어요.



 
 

Q. 그것은 지나친 겸손인 것 같은데요. 이미 ‘안철수 박사’는 한국사회의 성공코드가 아닙니까?

외부적 성공이 개인의 성공은 아니죠. 남들은 성공과 실패를 평가해도 자신은 반대일 수 있잖아요, 나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들이 추락하는 것을 많이 보았어요. 누구나 처음에 무엇인가 꾸준히 노력하면 실력이 쌓이죠. 그때 주위에서 과대평가하죠. 그런데 그 다음 단계에서는 이 사람이 꾸준히 노력하는데도 저평가 받는 시기가 와요. 하지만 노력을 계속하면 다음에는 또 재평가를 받으면서 오버슈팅을 하기도 하죠. 주변의 평가란 그런 것이에요. 이런 걸 성공으로 생각하면 추락하는 거죠.

Q. 그런 자세 때문인지 선생님은 적이 없는 것 같더군요. 어쩌면 저명인사 중에서 가장 적을 만들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대체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저는 99년에 두 가지 큰 경험을 했어요. 99년 11월에 '벤처의 99%는 망한다'는 발언을 한 후에 너무 욕을 많이 들어서 인생에서 가장 힘든 하루를 보냈었죠. 한국말로 그렇게 많은 욕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Q. 저도 그때 생각이 나는데, 그 말은 벤처거품을 공개 경고한 것이었는데,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습니까?

당시 SKT 시가총액을 KTF가 추월했어요. 명백한 버블이었죠. 단지 코스닥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으니까요. 그것을 보고 버블을 확신했죠. 그래서 이 버블에서 적절한 경고를 해서 희생을 줄여야 벤처에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데 그 발언 이후 ‘벤처 기득권자가 후배들의 성공에 배 아파한다’는 비판을 심하게 들었죠. 심지어는 그 후 코스닥이 좀 더 오르자 '시장이 안철수를 심판했다'고 까지 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Q.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이익이 개입되어 있는 일에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격한 반응을 보이죠. 그럼 두 번째는 어떤 일이었습니까?

99년 말 ‘Y2K’ 문제가 불거졌을 때죠. 다들 걱정을 하기에 저는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죠. 그랬더니 모든 언론과 여론이 그것을 외면하더군요. 당시 안 연구소가 제법 공신력이 있을 때였는데도 ‘Y2K’ 라는 자체가 하나의 큰 시장이었으니 모두 애써 외면한 거죠. 그 후 발언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 사람이 아무리 말해도 사회적 시스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밀려왔어요.

Q. 그럼 어떤 계기로 다시 발언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 후 4년이 지나서 참여정부에서 관료, 벤처기업인, 투자자들이 모여서 '벤처산업조망' 회의를 하는데, 말미에 이헌재 당시 부총리께서 ‘벤처의 99%가 망하는 것은 국민의 상식’이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맞장구를 쳤어요. 예전에 제가 그 말을 했을 때 심하게 비난했던 분들도 있었죠. 그분들은 제가 한 말을 다 잊은 거죠. 그때 ‘사람은 기억을 왜곡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벤처산업이 보증수표라 믿고 예전에 욕을 하던 사람들도 마치 자기가 오래 전부터 그렇게 생각한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는구나, 생각했죠.

Q. 그래서 이젠 바른말을 해도 욕을 먹지 않겠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아뇨. 사실 저는 그것이 오히려 감동적이었어요. 사람은 생각이 바뀐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처음에는 그 발언으로 고생했지만, 나중에는 돌이 굴러가는데 밀알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거죠. 그것이 더욱 가치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Q. 그런 선생님의 시각으로 본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사회입니까?

우리나라는 지금 가장 위험한 흑백논리가 지배하고 있어요. 좌파, 우파는 머리 나쁜 사람들의 사고죠.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것이니까요. 지금 시대는 탈권위주의로 나가고 있어요. 정치• 사회•문화•기술까지 모두 그렇죠. 기술 역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기술만 살아남고 선택되고 강해지죠. 20세기에는 정보를 독점하고 가공하고 전달하는 기득권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대중의 시대고요.

Q. 흑백논리 아래서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재단하려는 것이죠. 집집마다 가훈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의 등수를 매길 수 없잖아요, 건방진 생각이죠. 사람의 생각에 우위가 없는 것인데요. 모든 가치관은 중요해요. 그 사람의 역사가 반영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타인에게 ‘가치판단이 미숙하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가끔 그렇지 않은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곤 하죠.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어렵게 만들고요. 머리 좋은 사람들이 흑백논리를 가지면 훨씬 위험해지죠.

Q, 말씀을 들으면 ‘마이너리티의 정서’가 강하게 느껴지는데, 하지만 사실 선생님이야 말로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이너서클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던가요?

저는 항상 ‘마이너리티 오피니언 리더’이더군요. ‘오피니언 리더’라는 사실까지 부인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저는 이너서클에 대한 소속감도 없고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더 없어요. 사람의 소속은 상대적이거든요. 결국 기득권이란 ‘나에게 안 보이는 세상을 없는 세상으로 보느냐, 상대적으로 이해하느냐의 차이’일 텐데 그 점에서 저는 마이너리티에 가깝죠.

Q. 하지만 우리사회의 리더십이 점점 엘리트 교육에서 나오고 있는 상황인데 이것은 어떻게 보시나요?

저는 영재교육이나 수월학습을 안 믿어요. 조기 졸업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누가 있던가요? 없어요. 사회에서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는 일부일 뿐인데 그런 사람들은 더 중요한 대사회․대인관계에 소홀하거든요. 지금같이 엘리트 스포츠선수처럼 뽑아서 도덕적인 리더와 엘리트 리더가 나올 수 있겠어요? 미국금융위기의 핵심은 전부 와튼․하버드․스탠퍼드 MBA 출신들이었어요. 과연 이런 엘리트들이 사회에서 보탬이 될 것인가 생각해보면 차라리 없는 게 낫죠. 교육은 기능과 속도위주로 가면 실패하죠.

Q. 그래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요?

맞아요, 인위적 시스템이 문제죠. 어떤 시스템을 가지느냐에 따라 교육은 달라지는데 지금 우리 시스템은 사회가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죠. 결국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없으면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는 법인데, 이런 게 위기라는 인식이 없는 것이 진짜 문제죠. 공감대 형성이 시급한데도, 지금 우리사회에 공감대가 없고 그것을 이끌어 낼 리더와 리더십이 없어요.

Q.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해법이 있나요? 위기의 크기에 비해 문제의식이 분산되어 있어요. 그러니 해법이 제각각이고요, 그것이 진짜 위기죠. 그런 점에서 현재는 유례없는 위기입니다. 지금 경제위기 위기지만, 크게 보면 5년 내에 새로운 방향을 찾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 몰라요.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위기의식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에요.

Q. 그래도 위기의식은 많이 있는 것 같은데요. 선생님이 말하는 위기의식은 다른 것인가요?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자꾸 ‘대기업이 잘 돼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국가경제도 포트폴리오가 있어야죠, 환란 때 이미 증명되었듯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벤처가 공존해야하고요. 대기업 근로자가 130만, 공무원이 약 100만인데 그럼 나머지 4000만은 어디서 먹고 살아야 하겠어요? 문제의식의 포커스가 자꾸 대기업으로 가면 안 되는 거죠. ‘대기업총수들 사면시켜줘도 일자리 창출을 안 해서 섭섭하다’ 이렇게들 말하지만, 그것은 이미 기득권을 가진 대기업에 자선사업을 요구하는 것과 같아요.

Q.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나 벤처 육성이 필요하다는 얘기인가요?

대기업이 파트너 죽이기로 나가면 미래의 이익을 빼앗아 가져오는 것과 같아요. 예를 들어 요즘 환율이 올라도 수출 대기업들의 이익이 안 나죠? 이유는 중요부품을 ‘글로벌 아웃 소싱’, 즉 일본이나 대만의 중소기업에서 수입하기 때문이에요. 건실한 중소기업을 못 키운 대기업이 지금 그 칼을 맞고 있는 거죠.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국가의 미래가 없어요.

Q. 중산층의 붕괴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하시는군요?

우리나라 대기업이 이익의 상당부분을 국내에서 내면서 글로벌 기업이라고들 하죠. 한데 스스로 자문해봐야 해요. 국내 소비자가 사주었기 때문에 기술이 안정되어 해외로 나간 거죠. 그런데 중소기업을 죽이면 그곳에 다니는 중산층들이 무너지고, 결국 소비자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지금의 구조로는 글로벌 기업의 국외 경쟁력이 없어요, 중소기업을 도와주는 것이 ‘시혜’라는 생각을 하는 한 아직 멀었죠.

Q. 한데 ‘벤처’를 살리자는 말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가, 과거 벤처기업의 ‘자본놀음’이
라는 부정적 정서도 상당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2003년도 그때 회의에서 이헌재 전 총리도 '제 2의 벤처붐'을 이야기했었죠. 하나의 용어가 자리 잡으면 안 바뀌는 거예요. 이젠 새로운 용어와 개념적 접근이 필요해요. 그래서 저는 벤처란 말을 쓰지 말자고 했죠. 벤처는 ‘첨단기술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 빠르게 성장한다’는 엘리트적 의미가 강했거든요. 진짜 기업가 정신은 ‘구멍가게라도 만들어서 고용을 창출하고 같이 산다는 생각’인데 말이죠. 벤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정신이 중요한 풍토가 되어야 하죠.

(여기서 화제를 돌렸다. 지금까지의 질문은 이번 인터뷰의 주제인 ‘사회적 멘토’로서의 안철수를 기준으로 던진 것들이었지만,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오늘날 안철수를 만든 과정과 그의 개인적 철학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Q. 2000년 초 상당한 자본이익이 가능했는데 ‘안철수 연구소 지분’을 지금까지 그대로 가지고 계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구나 코스닥 시장의 거품까지 예측했었는데요.

스스로 ‘지금은 버블이다, 올해 많은 기업가들 중에서 금융사범이 나올 것이고 코스닥이 하강할 것이다’고 하면서 내가 뒤로 이익을 내는 것은 안 되는 일이죠. 인생과 사업은 굴곡이 있고 안 될 때 어떻게 보내느냐가 핵심이거든요. 그래서 어려울 때 내가 모범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Q, 혹시 선생님은 청교도주의자(혹은 금욕주의자) 이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청교도적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어요. 어떨 때는 하고 싶은 것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살았나 싶을 때도 있어요.


Q. 지난 10년간의 인터뷰를 찾아봐도 한 번도 말을 뒤집거나 표리부동한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던데, 대체 그런 일관성을 어떻게 유지 하십니까?


노력한 적은 없어요, 과거의 결정을 돌아봐서 지금과 맞추려고 하면 오히려 자꾸 달라지죠. 자기 스스로 마음 편하게 살고, 스스로 들여다보고 스스로 느껴가야죠. 앞을 보고 살아가야 원칙이 생기는 거지 뒤를 돌아보며 살면 원칙이 없어지죠.

Q. 스스로 생각하는 안철수 박사는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저는 ‘내부가치 지향적인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나와의 비교가 가장 중요해요.

Q.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나중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저는 살아간 흔적이 남고 싶어요. 내가 죽고 나면 내가 없었을 때와 같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사고’이건, ‘제도’이건 무엇이건 간에 그저 흔적이 남기를. 아까 말씀 드린 차이와 흔적을 만드는 일(Make difference)을 했으면 좋겠네요.

Q. 요즘 시대에 정부는 어떤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정부의 역할이 예전에는 모든 권한을 다 가지고 끌고 가는 커멘더, 즉 사령관 역할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사회 각 분야가 성숙했어요. 이젠 정부가 끌고 갈 일보다 각계각층을 설득하고 조율하며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이 중요하죠. 예전에는 깃발 들고 나가면 그만이지만 이제는 정부가 힘들고 일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답답하고 티가 안 나고 시간이 걸리겠죠. 정부가 이 티 안 나고 답답한 것을 받아들여야 우리사회가 제대로 갈 수 있어요.

Q. 그럼 기업과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미국 실리콘밸리는 실패의 요람이죠. 하지만 실패를 용인한다는 게 달라요. 점점 성공의 확률이 높아지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실패를 하면 재기가 어렵기 때문에 20대 인재들이 도전을 꺼려요. 그래서 20대가 안정지향이 되는 거죠. 사회시스템이 이들을 소떼로 몰고 가는 거예요. 불량 청소년은 없어요. 불량어른만 있지요.

Q.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말씀하신 ‘닌텐도’가 우리에게는 왜 없냐는 화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참 좋은 화두를 던졌어요. 정말로 좋은 질문이죠. 그러나 질문만으로 그치면 안 돼요. 그런 회사가 안나오는 사회요인을 먼저 바꿔야죠. 그것이 정부가 할 일이고요. 대통령이 ‘닌텐도가 왜 안 나와? 왜 아이디어가 없어?’ 라고 한 건 얄팍한 질문이 아닐 거라 믿어요. 그럼 이제 정부가 고민해봐야 할 것이 생겼네요. 세계적으로 표준을 장악하고 소프트웨어 산업을 키워야죠, 상생으로요.

Q. 최근 들어 안철수 연구소가 다소 정체된 느낌인데요. 선생님이 CEO를 그만둔 때문일까요?

퇴임 시 매출 300억, 영업이익 100억이었는데 지금 매출은 두 배, 이익은 비슷하죠. 저는 공익적 기업이라는 안 연구소의 정신을 믿어요, 그것이 안 연구소의 펀더멘털이죠. 이번에 이어받은 신임 CEO가 이 정신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죠. 지금 사업구조를 프로덕트에서 서비스 비즈니스로 바꾸는 중이에요.

Q. 그 동안 안 연구소의 변신노력이 더뎠다고 보시나요?

우리 회사가 예전에는 백신에서 보안사업을 했지만 이제는 ‘보안 서비스’로 가고 있어요. 문어발 확장보다 한 분야에서 퍼져 나가야 하는데 그 점이 약간 부족했죠. 지금 인터넷에서 ‘사회적 네트워크’에 기회가 많아 보이는데 이쪽에 실험이 진행 중입니다. 사내 벤처로 시작한 고슴도치 같은 것도 새 영역에 대한 작은 실험 같은 것이죠. 약간 늦었지만 진행 중입니다.

Q.그럼 안철수 연구소는 이사회의장 안철수 박사를 믿고 장기 투자해도 되나요?

우리 회사의 가치는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가격에서 부족한 부분은 노력 할 것입니다.

Q. 요즘 코스닥 시장이 뜨거운데. 우리나라 코스닥 시장의 문제점은 어떤 것이라고 보십니까?

우리나라 코스닥 시장은 효율적 시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루머와 테마 같은 불투명성이 오히려 프리미엄이 되고, 투명성이 반대로 평가절하 요인이 되는 시장이죠. 이런 점은 국가적 망신이에요. 코스닥 시장은 불투명함을 제거해야 하는 숙제가 있어요.

Q. 상당한 독서광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서가에 전공 이외의 책이 가득한데요?

저는 활자 중독증이 좀 있어요. 정신병처럼 눈에 글자가 띄면 마지막 글자까지 읽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 도서관의 책을 모두 읽었죠. 덕분에 자의식이 강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어떤 책을 읽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나의 에고(자아)에 어떤 것이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어요.

Q. 많은 책을 읽으셨는데 독서법도 남달랐다고요?

독서방법은 좀 달랐어요. 예를 들어 소설을 읽으면 줄거리에 관심이 없었어요. 대신 주인공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 관심이 갔어요. 예를 들어 ‘금삼의 피’를 읽으면서 ‘왕인데 왜 이렇게 불행할까, 나라면 어떻게 할까. 왜 화를 내지?’라고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해봤어요.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니까 정작 주인공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스토리를 잊어 먹더군요.

Q. 선생님이 마음이 약해서 거절을 잘 못하신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저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해요. 고졸여사원에게도 아직도 반말을 못하거든요. 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다 이해가 되는 일이에요. 저는 가장 불행한 시간이 이메일로 거절의 답을 쓰는 것인데 하루에 한 시간 반이나 걸려요, 때론 그런 처지가 서글퍼 보일 때도 있어요.

Q. 의사로서도 성공했을 것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의대교수로서 3가지 조건에 부합되더군요. 우선 저는 신경생리가 재밌었어요. 또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고요. 그러나 이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백신개발은 당시로서는 나 혼자였거든요, 내가 안 하면 사라지는 거였죠. 그래서 처음에는 7년간 낮에는 의대교수, 밤에는 백신개발자 일을 했는데, 피곤한데도 일단 개발을 시작하면 새벽까지 푹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같은 정도로 잘하는 일이라면 더 재밌는 일을 해야겠다 싶었죠.

Q. 마지막으로 앞으로 인생의 계획은 어떻게 세우고 계십니까?

나는 장기계획을 세우는데 잘 안 맞는 사람이에요. 어릴 때는 아버지처럼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진료하는 의사가 될 줄 알았어요. 열심히 살면 의사가 될 줄 알았는데 열심히 사니까 의사를 그만두게 되더군요. CEO 때도 마찬가지고요. 지금도 가장 편한 일은 안 연구소 CEO 일 테지만, 결국 교수를 하고 있죠.

마치며

대개 인터뷰를 하기 전에는 늘 대상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게 마련이다. 자료를 조사하고 저서를 읽다 보면 인터뷰이에 대한 간접적 판단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면 그 느낌의 생소함에 당황하곤 한다. 때문에 때로는 인터뷰이의 약점은 최대한 가리고, 가능하면 장점을 부각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것이 인터뷰에 응해준 수고로움에 대한 예의이자 사람 사는 세상의 예(禮)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철수 박사는 딱 느낌 그대로였다. ‘정돈되고 정갈하며, 투명한 사람’. 사실 이 이상의 상찬을 못하는 것이 아쉬울 만큼 그는 인격적으로 인터뷰어를 매료시켰다. 다만 이번 인터뷰의 주제가 ‘어려운 시기의 멘토’였기 때문에, 그의 인간적 매력을 외면하고 건조하고 딱딱한 인터뷰로 진행했다는 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이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donodo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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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직격인터뷰] 재미를 선택한 삶 주철환

 

 

‘주철환’이라는 이름은 예능 프로듀서로들 사이에서 하나의 신화다. ‘모여라 꿈동산’부터 ‘대학가요제’, ‘퀴즈 아카데미’, ‘일요일 일요일 밤에’, ‘우정의 무대’ 등 그가 연출한 프로그램들마다 ‘대박’이 터졌고, 그는 예능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렸다.

이렇게 잘나가던 주철환이 현장을 떠나 이대교수로 강단에 서더니, 7년 만에 다시 경인TV(OBS)의 CEO로 변신을 거듭했다. 질주였다. 하지만 최근 경인TV CEO를 ‘타의’로 그만두면서 처음으로 ‘실패’라는 평가와 마주하게 되었다. 세간의 관심이야 온통 그 부분에 쏠려 있지만, 오늘의 직격인터뷰의 주안점은 그의 ‘변신’이 아니라 ‘인간 주철환’에 있다.


 



꿈꾸는 낭만주의자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한 인간을 규정하는 기호는 대개 '직함'이다. 때문에 사람을 만날 때 ‘그’를 부를 마땅한 사회적 호칭이 없을 때 우리는 당황한다. 그를 두고 잠시 고민했다. 전(前) 사장, 전 피디, 전 교수라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리포터 안경에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수줍은 손을 내미는 그를 향해 유일한 현직 호칭인 ‘주 박사님’이라 부르기도 조화롭지 않았다. 그에게 물었더니 아무렇게나 부르라고 했다. 그래서 ‘선생님’이라 부르기로 했다.

Q. 선생님은 낭만주의자십니까?


그건 아니에요. 물론 때로는 그럴지도 몰라요. 낭만을 견지 할 때는 낭만주의자고 때에 따라서는 고전주의자나 현실주의자도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낭만’이 제가 좋아하는 삶의 유형이긴 해요.


Q. 처음에 중학교 국어교사에서 PD로 전업한 것도 특이한 이력인데 계기가 있었나요?


원래 모교에서 교사를 하는 것이 꿈이었죠. 한데 군대가 좀 늦었어요. 제대 전에 MBC 앞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게시판을 보고 있더라고요. 채용공고였죠. 호기심에 들여다보니 과목이 ‘국어, 영어, 상식, 작문’인데 국어는 원래 전공이고(그는 국문학 박사다), 당시 카추샤 복무중이라 영어는 약간 자신이 있고, 자질구레한 상식도 많은 편이라고 착각하고 살았죠. 게다가 중고등학교 교내 백일장에서 두 번의 장원을 한 적이 있으니 그 과목들이 와 닿아 그냥 원서를 받아왔죠.


Q. 아무리 그렇다고 난데없이 교직을 버리고 ‘예능 PD’를 선택하나요?


당시 MBC 최병윤 PD가 후배 병사였는데 그가 신방과 출신이었죠. 그때 그에게 PD시험 한 번 보면 어떨까하고 물었더니, ‘당신은 죽어도 안 된다 합격하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오기가 나서 시험을 쳤는데, 필기에서는 합격하고 최종면접에서는 당연히 떨어졌죠.


Q. 왜 당연히 떨어졌다고 생각합니까?


PD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내가 왜 PD를 하고 싶은지도 몰랐으니 당시 면접을 보던 이웅희 사장이 오히려 당혹스러워하더라고요. 그 후 ‘내 길이 아니다’고 생각 했는데 몇 달 뒤 추가모집으로 합격했다는 통보가 왔어요. 그 순간 재밌을 것 같아서 입사를 결심했지요.


Q. ‘재밌을 것 같아서’라면 정말 특이한 이유인데, 그 후에도 다시 교수, CEO까지 숨 가쁜 변신을 했거든요. 말씀을 듣고 보니 변신을 놀이처럼 하는 것처럼 생각되는데요?

그건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실례죠. 내가 선택하고 도전하는 곳의 공통점은 ‘재미있는 곳’이라는거죠. 나는 어릴 때 TV와 라디오를 좋아했고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 변신도 교육 아니면 방송쪽이었으니, 그건 ‘변신’이라기보다는 ‘진화’라고 할 수 있죠.

Q. 마지막 진화였던 경인TV(OBS) 사장으로 갔을 때,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왜 그 제안을 받아들였나요?

PD를 하다보면 늘 ‘내가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죠. 사장이 프로그램 존폐에 영향을 미치는 최종 결재자니까요. 저도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뜬금없다. 황당하다’라고 생각했지만, 내 마음대로 좋은 프로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나를 그쪽으로 이끌었죠.

Q. 하지만 아무리 숙원이 있어도 그렇지, 정년과 명예가 보장된 대학교수보다 미래가 불투명한 지역방송사장이 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이었을까요?

저는 지금도 후회는 정말 하지 않아요. 인생은 다양하게 살다가 죽는 게 좋죠. 65세까지 이대 교수로 있는 것도 좋지만 ‘우여곡절 있는 삶이 밋밋한 평화로움보다 재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Q. OBS에서 고통스럽지 않던가요? 재직시절 간간히 괴로운 심경을 내비쳤는데요.

오히려 그 괴로움이 나를 키웠죠. 저는 태생적으로 성공보다는 성장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Q. 경인TV에서 결국 ‘토사구팽 당하고 말 것이다’는 주변의 우려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나요?

그런 생각은 못했죠. 그렇게 생각했다면 아마 가지 못했겠죠. 사냥개가 마지막 순간에 보신탕집에 끌려가면서 ‘보신탕집 주인도 측은지심이 있겠지’하고 가지는 않죠. 나는 만남의 의미를 중시해요. 그냥 ‘재미있을 것이다. 즐거울 것이다’라고 생각했죠. 몇 개의 측면에서 억울하달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사라졌어요.

Q. 앞서 낭만주의자는 아니라고 했는데, 사장을 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면 그 자체가 낭만주의적 사고가 아닌가요?

그건 솔직히 인정!

(연배가 위인 사람에게 이런 표현이 예(禮)는 아니지만, 그는 무척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인터뷰이에게 꽤 신랄한 느낌일 수 있는 질문에도, 그는 어린아이가 장난을 걸듯 탄력적인 반응을 보였다)

Q. 그곳에서 지낸 2년은, 선생님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요?

서로 의미 있었고, 앞으로도 서로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쪽에서 초기에 내 달란트가 필요했다면 그것으로 다행이고, 나로서도 일부라도 해보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만 한 10년 정도에 걸쳐 제대로 만들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죠.

Q. 프로듀서로서의 이상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현실 같은 것을 생각하지 못했나요?

지금은 강하게 절감해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모으려면 ‘돈과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것들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주주들이 볼 때는 ‘철없는 생각이다’고 보였겠죠. 본질적 입장차이죠. 그쪽에서 서로 헤어지며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하던데, 저는 그 말이 진심이라고 받아들여요.

(그는 직원들과 정이 너무 많이 들어 아직도 송별회 중이라고 했다. 아울러 주주들과의 이견과, 임기 중에 후임이 거론되던 난감한 전후사정 등에 대해서는 애써 말을 아꼈다. 그 전후사정이란, 그가 사장으로 재직하던 중 모 인사가 대주주인 영안모자 부회장과 후임사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더니, 그리 머지않아 그가 퇴임한 것을 가리킨다)

Q. 이쯤에서 PD시절로 돌아가 보죠. PD 주철환은 다른 프로듀서들과 어떤 다른 점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교육시스템에 들어가 본 PD예요. 교사에서 PD로 다시 교수에서 CEO로 갔으니까요. 교육은 사람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것이고, 프로듀서는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니 일치점이 있었어요.

Q. 방송연출 못잖게 책도 많이 쓰셨는데요?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는 그동안 무려 11권의 책을 썼고, 그 책들은 지금도 프로듀서를 지망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PD는 프로그램으로 말한다고 하죠. 하지만 아니에요. 시인은 시로 말해도 되죠. 왜냐? 독자가 시어를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니까요. 하지만 프로듀서는 ‘뽀뽀뽀’부터 노인프로까지 시청자가 열려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기획의도를 가져도 그대로 되지 않죠. 모든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는 다 좋아요. 심지어는 막장드라마도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전달되지는 않죠. 그래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쓰고 싶어지는 거예요.

Q. 기획의도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과 이상의 차이인가요?

맞아요. 예를 들어 기획은 ‘기쁨을 줘야한다’로 되어 있지만, 현실은 그 기쁨이 ‘마음을 끌기보다 눈길을 끄는 것’으로 변질 될 수밖에 없죠. 방송은 자본과 결합되어 있으니까요. 폭력을 예를 들면 예전에는 뺨을 때렸다면 지금은 음식을 얼굴에 던지죠. 분노의 표현이 점점 자극적이 되어가죠. 그렇게 방송이 추락하고 타락하는 것이죠.

Q. 그렇다면 ‘OBS’에서는 자본의 속성, 즉 시청률로부터 독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나요?

그 점은 OBS가 ‘본의 아니게’ 나를 속인 셈이죠. 처음에 ‘공익적 민영방송’을 한다고 했고, 회사의 슬로건도 ‘희망과 나눔의 빛’이었거든요.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었죠. 그래서 저는 신입사원을 ‘희나리’라 불렀어요. ‘희망, 나눔, 빛’이라는 의미로요. 그런데 금세 시청률이 아닌 시청자 지상주의로 변질되어 버렸죠. 결국 PD의 낭만적 기획의도와 다를 바 없는 것이죠.

Q. 스스로도 그 점을 이제서 인식하신 것인가요? 스스로 쓴 기획의도와 스스로 만든 프로그램이 다르듯, 기업의 슬로건과 실제가 다르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요?

음. 어쩌면 낭만주의자가 도달한 막다른 골목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이 부분에서 ‘본의 아니게’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경인TV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실수라고 말하고 싶어했다)

Q. 스스로를 ‘카메라를 쳐다보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던데, 카메라는 어떤 세상을 비춰야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세상은 동물농장이지 않나요? 소, 돼지도 있고 심지어는 바퀴벌레도 있어요. 이 중 어떤 것을 무조건 다 박멸해야하나요. 그걸 인정하고 다양성이 존중되면 좋겠어요.

Q.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으신데…?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성서에 나오는 말이 다 맞는 말 같아요. ‘사랑하면 이익이 있다. 또 화난 사람이 적어졌으면 좋겠다’ 싶어요. TV뉴스를 보면 모두 화내고 또 화를 낼 만한데, 하지만 다들 좀 차분히 생각하면서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정의를 위해 무조건 싸워야만 하나요? 너무 거칠어요. 거친 말과 거짓말이 너무 많죠. 저는 말이 음악처럼 되었으면 좋겠어요.





Q. 언어에 대단한 감각이 있으신데, 그렇게 언어에 천착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말은 원래 가족이었는데 요즘은 이산가족이 된 것 같아요. ‘두운, 요운, 각운’이 비슷한 말이 많죠. 저는 그런 말을 찾는 것을 ‘언어의 핏줄 찾기’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예전에 개그맨 서경석, 이윤석에게 ‘꿈, 꼴, 꾀, 끼, 깡, 끈’을 가지라고 말했죠. 또 이대에서 신입생들에게 ‘스티븐 코비의 일곱가지 습관’을 얘기하면서는 ‘ㄱ’역으로 시작하는 일곱 가지 단어를 이야기했어요. ‘관찰, 경청, 기억, 기록, 관리, 결합, 극기’와 같은 식이죠. 경인TV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는 ‘오성’을 얘기했는데, ‘개성, 품성, 지성, 근성, 정성’과 같은 것이죠. 어떤 사람은 말장난이라고 싫어하지만 제게는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라고 할 수 있죠.

(최고의 예능 PD답게 그의 말은 현란하고 감각적이었다. 그는 그동안 인터뷰어가 만난 어떤 사람보다 뛰어난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위에 소개한 조어능력(造語能力) 뿐 아니라, 그가 말을 할 때 줄줄이 따라 나오는 ‘고전, 시, 가사’ 등에 이르는 화려한 인용구들은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Q. 이런 언어능력이 예능 PD로서 성공의 요인이 되었나요?

아니요. 나는 그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을 뿐이에요. 수업이라면 그것을 달아오르게 하는 기폭제가 있어야 하듯 프로그램 역시 그렇죠. 저는 그래서 노래를 많이 부르는데 노래는 움직이는 시(詩)라고 할 수 있죠. 시는 언어의 농축액이니까요. 시를 ‘쓴다’고 하는 것은 인생이 쓰기 때문이고,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 것은 누가 부르면 ‘네’ 라고 대답하듯 노래를 부르면 메시지가 ‘대답’하기 때문이며, 그림은 ‘그린다’고 하는 것은 그리운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듯, 저는 부르고 응답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죠.

(어쩌면 선문답 같은 이 대답 하나에 ‘주철환’이라는 사람의 철학과 특질들이 모두 녹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Q. 현장을 오래 떠나있었는데, 본인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끼’가 넘쳐난다고 여기지는 않으십니까?

아 그건 흐뭇한 지적이에요.

Q. 부정적인 관점에서는 카리스마가 없는 것 같고, 긍정적으로는 성품이 상당히 부드러운 것 같은데요. 이점은 프로듀서로서는 약점이 되지 않나요?

‘퀴즈아카데미’ 시절에 어떤 기자가 문제가 너무 가볍다는 기사를 써서 지적을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럼 민주주의의 장점 같은 것을 내야 할까요? 그런 것은 토론프로 같은 곳에서 다뤄야죠. 저는 퀴즈는 문제를 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라고 일부러 대답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그때 상대가 ‘참 친절하군요’ 라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어찌 보면 저는 솔직히 친절해서 뜬 건지도 몰라요.

Q. PD협회보 인터뷰에 나의 주특기는 약간의 창의력과 약간의 친밀감이라고 했더군요.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은 행복이죠. 따라하는 것은 기능이구요. 물론 기능도 중요하지만 덜 행복하죠. 이것이 일에 대한 제 철학인데, 그러려면 내 자신이 먼저 작품이 되어야하죠. 주철환이라는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예요. 새롭지 않고 붙박이로 남아있으면 매력이 없어요. 퀴즈아카데미에서도 당시에는 보통 퀴즈에 우승하면 돈과 선물을 줬지만 나는 여행을 보냈죠.

Q. 대중음악에 조예가 상당하시다면서요?

어릴 때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부터 사랑해왔죠. 초등학교 4학년 때 문주란씨와 윤복희씨를 너무 좋아했지만 예능 PD를 하면서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참 미스터리한 일이었죠. MBC에는 추억의 가수가 나오는 프로그램이 없었거든요. 윤복희씨는 이후 OBS에서 사장으로 만났죠. 그때 ‘나의 우상이 지금 내 앞에 있다니’라며 혼자 행복해했었죠.

Q. 요즘 예능프로에 비판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항상 당대가 옳다고 봐요. 원로 코미디언 한 분이 요즘 애들 기본이 없다며 유재석, 강호동을 안 좋게 얘기 하시기에 이런 얘기 안하셨으면 좋겠다 싶었죠. 또 원로 가수 한 분이 처음에 서태지 노래를 두고 ‘소음이다’라고 하실 때, ‘나중에 후회할 걸’ 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막장 드라마도 마약 남용 같은 것이라면 말리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것이 시청자의 삶을 참혹하고 불행하게 만든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Q. 그럼 막장 드라마까지도 나름대로 세태를 반영하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는 뜻인가요?

시간이 지나고서도 남는가가 중요하겠죠. 서태지 이후 많은 비슷한 그룹들이 나왔지만 서태지만 남았고, 조용필 이후 많은 남성가수가 나왔지만 조용필만 남았어요, 또 패티김 이후 많은 여류가수가 나왔지만 패티김만 남았죠. 그것이 가치고 진정성일 테죠.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과 사라지는 것이 있는데, 지금 너무 고민하면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마음’ 즉 ‘노파심’이죠. 그런 걸 두고 ‘인간정신을 훼손시킨다’와 같은 걱정들은 문자 그대로 오버죠.

Q. 만약 지금 다시 예능 PD로 컴백하신다면 다시 좋은 프로를 만들 자신이 있나요?

지금 나는 무한도전의 김태우 PD를 이길 자신이 없어요. 말하는 것을 보니 기능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생각이 뚜렷해요. 지금 제가 그와 싸워서 어떻게 이겨요.

Q. 그래도 주철환의 생각이 반영된 프로가 만들어질 수 있지 않나요?

차범근 감독도 당대의 선수였지만 지금은 해설가로 충분하죠. 가끔 축구 해설가가 경기 중에 선수들을 많이 지적하지만, 저는 제가 캐스터라면 ‘선생님도 같이 뛰시죠’라고 농담 한 번 하고 싶어요. 주철환이 지금 PD들과 겨루는 것이 바로 웃음거리가 될 수 있죠. 패티김이 ‘랩과 댄스’를 할 수 없듯이 말이죠. 다만 ‘55세의 주철환은 경륜으로 만들 수 있는 프로를 30대 PD는 할 수 없는 여건’이라면 다시 할 수 있겠죠.

Q. 대중문화에는 ‘재미만 있지 위로가 없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로의 정의가 뭐죠? 그것을 즐거움과 기쁨으로 바꾸면 되지 않나요? 저는 이렇게 말해요. ‘비극적으로 살려면 비교만 해라! 즐겁게 살려면 비유를 하라!’ 그래서 지금 저를 어떤 라이벌 PD와 비교하면 둘 중 한 사람은 화가 나겠지만, 대신 ‘그 분은 장미, 나는 프리지아’ 이렇게 비유를 해주면 둘 다 행복하지 않을까요? 따지는 삶은 곤혹스럽죠. 다지는 삶을 살아야죠.

(준비한 듯, 거침없이 답이 흘러 나왔다. 심지어 그는 답을 하는 과정에서 직접 작곡한 ‘모여라 꿈동산’과 ‘퀴즈 아카데미’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 문득 저런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 짐짓 근엄해야 하는 CEO를 하면서 삶이 꽤나 심심했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Q. 상당한 독서를 하신 것 같은데, 평소 얼마나 읽습니까?

많지만, 다 읽은 건 아니에요. 저는 청소년이 독서에 대해 질문하면 서점 가 볼 의향은 있지? 그 중에서 가장 땡기는 걸 읽어! 이렇게 얘기하죠. 핵심 메시지를 자기화하면 되는 거죠. 예를 들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아침형 인간’ 같은 책을 다 읽을 필요가 뭐 있어요? 제목을 보고 핵심어 키를 뽑아서 발췌독을 하죠. 이를테면 박경철의 책은 대충보고, 그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는 왜 이렇게 살까? 왜 이런 말을 할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 생각보다 독서를 많이 한 것은 아니죠. 대신 11권의 책을 썼으니 많이 쓰긴 한 거네요.

Q. 문장보다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생각의 지평을 넓힌다는 뜻인가요?

뜬금없는 대답이지만 나는 송도삼절 이것을 누가 정했나? 저는 그게 궁금했어요. 알고 보니 황진이가 스스로 정했더군요. 그게 매력적이었어요. 그럼 저절로 이어지죠. 그렇다면 주철환은? 이렇게요. 그래서 나도 내 자신으로 수식어로 만들어야겠다고 많이 생각했죠. 재밌게 살고 의미 있게 죽는 사람. 분석보다 해석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렇게요.

Q. 분석보다 해석하는 사람이란 무슨 뜻인가요?

이를테면 서태지는 왜 랩을 했을까? 라는 의문을 갖는 거죠. 미국에서 랩은 흑인들이 시작했죠. 불만이 많으니까요. 그 불만을 궁시렁궁시렁하다가 이게 랩이 된 거죠. 그래서 저는 고려시대 ‘만적’이 우리나라 랩의 시초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만적의 말에도 리듬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죠. 불만을 평화롭게 표현하는 게 랩이라면 홍길동도 랩퍼가 아닐까? 이런 것이 제 방식의 해석이죠.

Q. 진지한 질문으로 돌아가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덕목을 꼽는다면 어떤 것일까요?.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약간 귀엽고 적당한 돈과 지위와 재미가 있어야하지요. PD에는 3 ‘ㅅ’ 이 필요한데 ‘상상, 설득, 순발력’이죠. 순발력은 시간을 절약해주죠. 누구든 말을 길게 하면 싫어지고 길게 하는 말은 수용자 중심의 사고가 아니죠. 시간 도둑질이에요. PD시절에도 윗사람이 잔소리를 길게 하면 속으로 노래를 부르죠. 나중에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으면 ‘일리가 있네요’ 라고 대답해요. 어떻게 보면 못된 거죠.

Q. 너무 빨리 달려온 만큼 빠른 은퇴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조바심은 없어요. 조만간 기념음반을 낼 생각이에요. 선물로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책도 낼 계획이죠. 특강 요청도 많고요.

Q. 다음 다섯 번째로는 어떤 변신을 할 계획인가요?

그건 감히 말할 수 없죠. 건방진 거예요.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지만 말로하면 교만하죠. 나를 원하는 사람의 제안을 받고 싶어요. 이를테면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누군가 요청한다든지.

Q. 지금까지 네 번의 변신이 모두 제안을 받아들인 수동적 변신이었다면 마지막 변신 역시 수동형일까요? 어느 인터뷰에서 ‘내가 우울할 거라고? 9월을 기다려봐’라고 하셨던데요.

아마 그럴 거예요. 지금 걱정해주는 사람이 많죠. 친구들도 전화를 많이 하고요. 하지만 솔직히 어이가 없죠. 하지만 실제 그렇게 말하면 건방진 거죠. 그래서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9월에는 뭔가 할 거야. 라고 말했죠. 사실은 아직은 아무런 계획도 없어요. 하하하.

Q.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신데 왜 능동적 계획을 세우지 않나요?

나는 계획적인 사람이 되기 싫어요. 지금도 매우 즐겁고 이 인터뷰도 유쾌해요. 박경철의 프리즘으로 비춘 나는 어떨까? 기대되죠. 예전에는 주철환이 만난 사람 이런 것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대상이 되어 행복하죠.

Q. 주례를 많은 선다고 알려져 있는데 주로 무슨 얘기들을 하시나요?

무지개를 보려면 비가 많이 내려야죠. 직전에 고통이 있는 것이에요. 한데 무지개도 한 가지 색이 아니라 일곱 색이나 있잖아요. 인생 역시 모자이크를 만드는 과정인데 그 과정만 보고 한 마디씩 거들죠. 여기는 검다, 여기는 텅 비었다, 이렇게요. 그러나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얼굴이라면요? 검은 것이 눈이고, 빈 것이 입일 텐데요. 그러니 불만으로만 너무 긴 시간 보내지 마라!고 말하죠.

Q.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친구가 중요하죠. 공자를 존경하는 이유도 논어 1장부터 ‘배워라! 왜 불만을 가져!’ 그리고 2장에는 ‘친구를 사귀어봐. 옛날 친구 연락도 좀 하고!’ 그리고 3장에서는 ‘그래도 불만 있어? 그럼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너무 화 내지마!’ 이렇게 말하잖아요. OBS에서 친구가 많이 생겼죠. 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들을 사랑해요. 얼마나 좋아요? 화내지 않고. OBS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 바로 ‘얼마나 좋아?’ 라는 말이었어요.

Q.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어린아이 같아요. 어린아이의 특징을 가지고 있죠. 결국 순수하지만 유치하다는 말인데 유치한 것 인정해요. 그러나 순수하고 싶죠. 성경에 ‘어린아이의 얼굴이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없다’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이 얼굴이 동안이 아니라 동심이라고 생각해요.

Q. 하지만 ‘OBS에서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는데요?

내게 괴로움 많았던 시기였던 것 인정해요. 하지만 OBS에서의 기억이 내게 흉터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 적이 있지만 지금 보니 예방주사 자국이었어요. 이제 어떤 전염병에도 건강해진 거죠. 그래서 OBS는 내게는 성장통이었고 통과의례였죠.

Q. 처남인 손석희 교수는 어떤 사람인가요?

선택과 집중에 성공한 사람이죠. 시간의 평등과 효율에 관심이 많고 시선집중과 100분 토론만으로 일주일을 사는 사람이죠. 심지어 내가 대학가요제를 맡았을 때 그렇게 부탁을 해도 진행을 맡아주지 않더군요. 그 결과 1분 뉴스가 100분 토론이 되었으니 100배가 성장한 사람이죠. 그는 읽기를 거부하고 목소리를 냈어요. 그 점에서 존경스러워요.

Q. 자신의 삶을 평가한다면?

나는 눈치 보기로 살아온 인생이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러면 인기영합주의자라 하겠지만 그건 아니에요. 진심으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보는 대로 믿는다(seeing is believing)’라는 말을 항상 고민하죠. 누가 내게 이렇게 고민을 상담해요. ‘남들이 내게 건방져 보인대요’라고요. 그럼 저는 ‘너는 건방져’라고 말하죠. 남이 그렇게 말하는 게 걸리면 아예 개의치 말든지 아니면 신경 써서 고치든지 해야죠. 부족할수록 경쟁심이 많아져요. 샘(妬)이 많으면 자기의 샘(泉)이 없어요. 특히 사람에 대해 싫어하되 미워하지 말아야죠. 진부하지만 저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고 싶어요.

Q. 역설적으로 선생님의 이런 부분이 OBS에서 CEO로 적응하지 못한 이유가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기업은 적재, 적소, 적시를 중시하는데 이게 좀 어긋났겠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새도 되고 쥐도 될 순 없었죠.

Q. ‘새도 되고 쥐도 될 수 없었다’는 말은, 노(勞)의 입장도 사(使)의 입장도 모호했다 이런 뜻인가요?

‘이용의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이게 얼마나 가슴을 두드리는 가사인가요? 나는 강한 사람은 될 수 있으나 독한 사람을 될 수 없어요.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면 그렇게 되게 한 1순위는 사장이죠. 그러니 나를 먼저 자를 것이라고 안심시켰죠. 대주주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학교라고 생각합시다. 저는 경영대학을 다니고 회장님은 교육대학원 공부를 제가 시켜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학교가 아니라 병원이었어요. 더구나 내가 의사로 온 게 아니라 환자로 온 경우거든요. 나중에는 빨리 퇴원해야겠다 싶었고, 더 시간이 지나니까 감옥 같아서 빨리 출소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마치며

인터뷰를 끝내고 원고를 정리하면서도 그를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주철환은 ‘꿈꾸는 낭만주의자’, ‘다빈치형 인간’, ‘제너럴 리스트’와 같은 진부한 표현으로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 시간 동안의 인터뷰에서, 그가 스스로 부른 노랫말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이 한 대목이 기나 긴 낭만의 여정에서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고 있는 ‘인간 주철환’을 표현하기에 그나마 가장 적합한 ‘응답’이 아니었을까. 

[출처] http://blog.naver.com/donodo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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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스터디 손주은 대표는 사교육의 ‘레전드(전설)’라 불린다. 그가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손사탐’이란 이름을 날릴 때, 자녀들의 강의 신청을 하려고 엄마들은 전날 밤부터 학원 앞에 줄을 섰다. 그것은 전설의 1막에 불과했다. 2000년 학원 강의를 온라인으로 가지고 들어간 뒤 7년 만에 시가총액 1조원을 돌파했다. 그런 그가 최근 한 신문을 통해 “교대생과 사범대생(교직과목 이수자)만 교사가 되는 것은 산업사회 시대의 기득권 보호 장치”라며 공교육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일을 계기로 구설에 올랐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사석에서 한 말이었다”고 했지만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솔직한 속내를 들어보고 싶었다.

첫인상은 ‘열정가’에다 놀랄 만큼 ‘꾸밈이 없는 사람’이었다. 인터뷰는 내내 파격이었다. 집무실의 ‘뽀샵’ 처리한 ‘손사탐’ 대형 브로마이드와, 인터뷰어 앞의 ‘손 대표’ 사이에는 엄청난 부조화가 있었다. 그가 과외강사를 시작하게 된 이유도 색달랐다.





 

 


Q.학생 때 결혼하셨던데요.

사실은 과외를 시작하게 된 이유가 첫사랑 때문이었어요. 424일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만난 여자가 있었죠. 가난한 이대생이었는데 등록금을 대주려고 한 달에 여섯 명 그룹 과외지도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대학 1학년 때인 81년에 헤어졌죠. 그 충격으로 헤매다 학사경고를 받았어요. 촉수가 날카로울 때였죠. 2학년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지만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어요. 3학년 때 또 학사경고를 받았죠. 절망의 나락으로 빠졌고 군으로 도망갔죠. 서울대 보낸 아들놈이 그리 되었으니 아버지는 충격으로 말씀도 하지 못하셨죠. 제대하고 복학하자 결혼을 시키더군요.

Q. ‘대책 없는 결혼’의 책임은 손 대표가 져야 했나 보군요?

그런 셈이죠. 결혼을 했기 때문에 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어요. 그때 어머니들과 죽이 맞았죠. 먹고살려니 일반 강사로는 안 되겠고 ‘객단가’를 높이려고 당시로서는 유례 없는 혼자서 전 과목을 가르치는 고3 입시지도를 시작했죠. 처음 가르쳤던 10명 중에 9명이 대학에 갔어요. 다음 해에는 4배의 수업료를 받았죠. 2년 동안 그때 돈으로 2억원 정도를 벌었어요. 그렇게 2년이 지난 뒤 유학을 고민해 보았는데 준비도 안 돼 있고 유학을 다녀와도 자리 잡을 자신이 없더군요. 다시 쉬운 선택을 했어요.

Q. 그냥 ‘과외를 천직으로 삼자’ 뭐 이런 거였나요?

사시를 보기로 했어요. 그해 3월 공부를 시작했는데 형법 책을 펼치니 머리가 아파요. 1주 만에 포기하고 신림동 당구장에 출근했죠. 와이프에게는 사시 준비를 한다고 했으니까요.

Q. 사시 준비라기보다는 도피였군요? 과외선생을 하기에는 그렇고, 다른 것은 자신이 없고, 뭔가는 하는 척해야 하고….

맞아요. 5월 8일 사시 1차 시험을 치르고 나니 9일에 어머니들이 찾아와 ‘놀면 뭐하냐’ 그러면서 다시 과외를 부탁하더군요. 그 길로 다시 과외를 시작했고, 90년에 양재동에 학원을 열었죠. 91년부터 학원을 본격적으로 키워가려는데 사고가 났죠.

(손 대표의 세 가족 교통사고를 말한다. 아들은 현장에서, 딸은 9개월 후 세상을 떠나지만 혼수상태에 빠졌던 아내는 몇 달 후 극적으로 회복됐다.)

Q.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군요?

인생에 더 이상 손해볼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들이 죽고 석 달이 힘들었죠. 자살 충동이 계속 생겼어요. 그런데 딸마저 가고 나니 갑자기 담담해지더군요. 딸아이가 새벽 4시 반에 사망했는데 11시에 장례를 치르고, 그날 오후 6시에 학원에서 강의를 했어요. 그 후로 본격적인 강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어쩌면 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주당 70시간의 수업을 했으니까요. 그러다 96년에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Q.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 사이 딸과 아들 하나씩을 더 낳았지만, 그때까지 늘 먼저 간 아이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죠. 어느 날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아득하더군요. 돈은 좀 벌었지만 내겐 잃은 것만 있더군요. 더구나 이 일(과외)조차 목적의식이 아니라, 단지 먹고살기 위해 한 일이라 마음 한편으로 원죄의식이 있었어요.





Q. ‘원죄의식’이란 교육을 상업적으로 접근했다는 뜻인가요?

과외는 사회 불평등을 심화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돈 많이 받고 뒤에 있는 아이를 밀어 올리면 결국 누군가는 뒤로 밀려나죠. 사교육은 개인적 관계에서는 ‘선’이지만 사회적으로는 구조적 ‘악’이죠. 이것을 정직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거죠.

Q. 철학적 고민에 빠진 셈인데, 고민의 결과는 어떤 것이었나요?

어머니의 소망이 목사이니 신학공부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내 삶의 내용이 목사는 아닌 것 같았고, 과외와 학원만으로 30억원은 넘게 벌었으니 그것을 종잣돈 삼아 사립학교라도 하나 세울까 했는데 그것도 안 되겠더군요.

Q. 과외로 번 돈으로 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은 신선한 발상인데요?

사교육에서 더럽게 번 돈으로 공교육에 투자하면 남 보기에 그림은 나오죠. 하지만 진짜 헌신이 아닌 ‘폼으로 사립학교 이사장을 하는 것은 얄팍한 수작이다. 내가 정말 많이 타락했구나’ 하는 반성이 들더군요.

Q. 그래서 장고 끝에 다시 학원으로 간 건가요?

잘할 수 있는 게 뭐냐? 자문해 보니 결국 강의더군요. 하지만 지금처럼 고액의 프리미엄 수업이 아니라 과목당 3만원짜리 소위 ‘막 단가’ 강의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Q. 박리다매로 ‘고액 강의로 인한 불평등도 해소하고 돈은 돈대로 벌 수 있다’ 뭐 이런 결론이셨군요. 그래서 ‘깨끗한 장사’는 어떻게 시작을 했나요?

당시 내가 운영하던 학원(진리와 자유학원)에서 월 5000만~6000만원의 수입이 나왔지만 포기했죠. 대신 대중강의를 위해 학원가를 찾아가 다른 학원에 나를 ‘강사로 써 달라’ 하고 원서를 들이밀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죠. 그때 원장들에게 ‘당신이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실패가 될 것임을 기억하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죠.

Q. 그래도 결국 학원 강사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지인에게 부탁해 강남의 한 학원을 소개받았어요. 우여곡절 끝에 97년 1월 2일 첫 대중강의를 시작했어요. 광고지 10만 장을 뿌리고 ‘손선생 통합사회’라는 타이틀을 내걸었죠. 그때 다섯 개 반을 모집했는데 겨우 3개 반에 총 8명의 학생이 등록하더군요. 그래도 확신했어요. 목숨을 걸고 강의했죠. 7월이 되니 2000명이 등록했어요. 8월이 되니 등록을 위해 전날부터 어머니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더군요. 그때부터 ‘손사탐’이라고 불리기 시작했고요.

Q. 소위 재벌급 강사가 된 건데, 왜 굳이 메가스터디를 설립하셨나요?

97년부터 고민을 시작했어요. 지난 삶과 새 출발에 대한 고민을 하다 2000년에 기업을 만들었죠. 진리와 자유학원, 친구가 하던 다른 학원, 또 다른 학원 3개를 합병해 10년 안에 매출 1000억원을 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죠. 그게 안 되면 ‘10년이 되는 2007년에 다시 고민하자’ 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2006년에 1000억원을 달성했죠.

Q. 일련의 과정이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로군요. 강의로 이름을 날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온라인 기업을 설립하겠다는….

그건 아니에요. 첫째는 그 이전 삶에 대한 반성이었고, 둘째는 앞으로는 ‘리더가 되려면 장사꾼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었고, 세 번째는 기득권을 버리고 사회적 부채의식을 덜겠다는 목적이었죠. 저에게 지금 자긍심이 하나 있다면 온라인 교육으로 인해 사교육의 불평등을 상당히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죠.

Q. 현재로 돌아가죠. 온라인 교육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주에 풀로 대중강의를 하면 72시간을 할 수 있었죠. 1년에 40억원을 벌었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죠. ‘마흔 넘어서도 이 짓을 하면 내 인생은 망하는 것이다. 평생 이 짓을 하고 살면 돈 벌어 뭐가 남나’라고 고민하던 중에, 98년께 케이블 TV를 보며 영감을 얻었죠.

Q. 케이블 TV에서 영감을 얻었다면, 계획한 일은 아니었군요?

맞아요. 그때 ‘학교와 학원이 집으로 오는 시대가 열린다’ 생각하고, 유니텔에서 실험으로 음성파일 강의를 시작했죠. 생각보다 많이 듣더군요. 그래서 2000년 4월에 전자공학을 하던 동생을 끌어들여 5월에 오피스텔에서 회사설립을 준비했어요.

(그의 기억력은 놀라웠다. 인생의 주요 곡절과 고비의 순간들의 날짜와 시간을 모두 정확하게 기억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놀라운 기억력을 ‘굳이’ 드러내곤 했다. 뛰어난 강사 출신 CEO의 ‘의도된’ 자질인지, 감출 수 없는 천재성의 현현(顯現)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시험 잘 치르게 하는 것이 참교육이다

Q.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사교육 업체’라는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나요?

우리가 아무리 사교육의 불평등을 줄여도, 시대가 사교육을 때리는 원색적 비난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않죠. 사회는 선과 악을 통째로 구분하는 법이죠.

Q. 같은 사교육이라도 고액 과외와 온라인 교육은 다른데 도매금으로 취급을 받아서 억울하다는 뜻인가요?

그런 셈이죠. 하지만 저는 입시 중심 사교육은 미래 전망이 없다고 봐요. 우리가 가는 길도 그게 아니고요. 입시 사교육은 10년 내 급격히 약화될 것이 확실해요.

Q. 사교육 1위 기업이 사교육 쇠퇴론을 주장하는 건가요?

우리나라 사교육의 팽창은 압축성장의 결과물이었죠. 과거에는 판잣집에 비비고 살면서도 자식을 대학 보내는 것이 신분상승의 가장 쉬운 길이었어요. 부모들이 이런 경험치를 가지고 있죠. 이런 경험들이 사교육을 키웠지만 이제 우리 사회의 압축성장은 끝났죠. 신분 상승, 계층 변화가 약해져요. 이 때문에 앞으로는 교육의 영향력이 크지 않아요.

Q. 그것은 오히려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면서 교육비를 부담할 수 있는 계층과 없는 계층, 혹은 SKY와 비SKY로 신분 세습이 이루어지는 탓이 아닐까요?

냉정하게 보죠. 지금 특목고, SKY대 졸업하면 별 볼일 있나요? 이 아이들이 애를 낳으면 교육에 투자하지 않아요. 스스로 생각해도 별 볼일 없거든요. 미래사회는 오히려 개인의 창의성, 변화감지력, 부모 재산 이런 것이 변수가 되겠죠. 그럼 대학은 중요도가 떨어지죠. 그 때문에 현재 메가스터디 사업도 10년 내에 약화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평생교육, 실버교육과 같은 새로운 분야로 나가지 못하면 무너지겠죠.

Q. 대학의 중요도가 떨어진다는 뜻은 어떤 의미인가요?

나는 장기적으로 대학이 유니버시티로 존재 가능할 것이라고 믿지 않아요. 교육 수혜자인 학생은 대학이나 교수와 같은 교육권력이 만든 시스템에 놀아나지 않게 되겠죠. 지금은 무조건 자기 대학 강의만 들어야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겠죠. 온라인 강의가 제공되면 학생이 타 대학의 좋은 강의를 골라 듣게 되고 그럼 학교의 틀이 무너지는 거죠.

Q. 너무 앞서 나간 말씀 같은데, 그럼 손 대표께서는 교육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교육은 시험을 잘 치르게 하는 것이죠.

Q. 파격적인 말씀인데요?

사회가 정직하지 못해요. 서울대 사범대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 교육이 왜곡되었죠. 교육근본주의는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가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죠. 하지만 자연주의적 관점은 피교육자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것이에요. 많은 사람이 후자에 박수를 치죠. 하지만 전자가 없는 후자는 없어요. 예전에는 서당에서 천자문, 사자소학을 배우고 그 과정에 인지력이 확대되곤 했지만, 지금의 열린 교육은 솔직히 엉망이죠.

Q. 열린 교육보다 시험을 잘 치르게 하는 것이 참교육이라는 말씀인가요?

시험을 잘 치르는 기술이 아니라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는 지식을 고스란히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죠. 한데 우리는 이것을 너무 값싸게 평가해요.

Q. 그건 사교육 업체의 대표로서의 인식입니까? 아니면 소신입니까?

제가 야구를 좋아하는데요. 한국과 일본이 이번 WBC 결승에서 연봉이 100배나 되는 메이저리거를 이긴 것은 주입식 훈련의 반복에 의해 안정적 수비 포메이션이 나오고 안정적 타격을 하기 때문이었죠. 한국과 일본은 주입식 교육의 대표거든요. 한데 자율야구와 자율교육은 어느 날은 잘되고 어느 날은 엉망이 되죠. 우리의 입시결과주의가 일부 문제는 있지만 그로 인한 반복식 교육은 의미가 커요.

Q. 오히려 그 때문에 열심히 배워도 우리 학생들이 창의력이 없다는 평을 듣지 않습니까?

천만에요. 주입식 교육은 우리 국가 능력의 기초였어요. 한국야구도 이렇게 된 것 아니겠어요. 저는 김성근 감독을 세계 최고의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주입식 야구를 반복하고 거기다 정신력을 가미하는 거죠.

Q. 그것이 향후 우리나라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평가하지 않나요?

10년 전 소니TV가 있는 집은 부자였죠. 지금 소니TV 있는 집은 돈이 없어 TV를 못 바꾼 집이죠. 10년 만에 삼성이 소니를 이겼는데 70년대 후반 서울대 공대생들이 오늘날의 삼성전자를 만든 것 아닌가요?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주입식 교육의 대표선수들이었죠.

Q. 글쎄요. 압축교육이 과거 우리를 앞서간 나라를 따라잡는 데는 유용했겠지만 그런 교육으로 앞서갈 수 있을까요?

우리 교육은 엄청나게 기초가 튼튼했죠. 오히려 그래서 가장 앞설 수 있었어요. 교육이 기본적 토대를 튼튼히 하지 않으면 말만 그럴듯하지 교육이 아니에요. 메가스터디를 두고 시험기계를 양성한다고 비판하는데, 그런 말은 우리 강의 한 번 들어보고 하면 좋겠어요. 우리 강의가 입이 쩍쩍 벌어지게 전달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교육이란 학생들의 사고를 확장시켜 주는 것이고, 그러려면 좋은 선생이 필요하죠.

Q. 아까 말씀하신 주입식 입시교육과 사고 확장은 모순 아닌가요?

입시는 단순 암기라고 생각하시나요? 천만에요. 그 과정에서 앎의 기쁨과 쾌감을 느끼는 아이들만 성공해요. 수능 문제는 엄청난 사고를 요구해요. 사고력 시험이죠. 언론도 수능 문제 한번 풀어보고 ‘수능식 반복교육’이라는 기사를 써야죠.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교육이 아니에요. 오히려 정치논리로 악용하는 거죠.

Q. 교육논쟁이 정치논리로 악용하는 것이라고요?

대학만 해도 보세요. 지금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면 사교육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대학들이 떠들고 다니잖아요.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 실정으로는 안 된다던 사람들이 지원금 따먹으려고 태도를 싹 바꾼 거죠.

Q. 손 대표 말대로라면 주입식에서 성공한 10%를 제외한 나머지 90%의 아이들은 버리나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은 현재 지배구도에서 만들어진 교묘한 논리예요. 과연 이 문제에 정직한 고민을 했을까요? 전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90%를 향한 대체교육을 고민해야죠. 그 90%가 실패한, 경험과 상처가 좋은 성과가 되도록 말이죠.

Q. 공부에서 탈락하는 아이들의 상처가 곧 좋은 경험이라는 것은 좀 억지 같은데요?

동창회를 가면 성공한 친구들의 공통점이 있죠. 첫째 부류는 야간자습하는 것이 행복했던 아이들이죠. 둘째 부류는 야간자습이 지겨워 미친 아이들이고요.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에너지가 넘쳐 학교 담을 넘죠. 그러면 꼭 따라 넘어가는 녀석이 있어요. 그때 먼저 넘어간 녀석이 ‘야, 이왕 나왔으니 중국집에 가자’ 그러고는 짬뽕 국물과 배갈을 시켜 먹고는 ‘에라 내일 쥐어터지더라도 집에 가자’고 해 버리죠. 그런데 그런 녀석들은 다 성공했더군요. 따라 넘어간 애들과 따라 마신 애들이 성공하지 못했고요. 중요한 것은 에너지예요. 부드럽고 조화로운 에너지든 다이내믹한 에너지든 에너지가 커야 성공하죠.

Q. 지금의 학교 교육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 체제로는 안 돼요. 교사들이 안전한 밥그릇을 유지하려는 관행부터 깨야 해요. 수업시간표가 교실에 붙어 있는 게 말이 되나요? 사교육은 듣고 싶은 과목을 듣고 싶은 선생에게 듣지만 공교육은 싫건 좋건 정해진 선생님이 들락거리죠. 사교육을 지나치게 욕하는 것은 공교육의 면죄부를 얻기 위한 작당이죠.

Q. 강남 아이들이 최고의 성적을 내는 것은 역시 훌륭한 사교육 때문인가요?

천만에요. 강남이 최고 성적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전국에서 석·박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인데 그런 부모를 둔 아이의 공부 유전자가 뛰어나겠죠. 거기에 경제적 뒷받침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한데 강남·서초·송파의 입시 결과가 그만큼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단순 숫자로 보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여건에 비해 오히려 성과가 가장 낮은 곳이 이곳이에요.

Q. 투입된 노력이나 여건에 비해 성과가 나쁘다는 뜻인가요?

소득과 부모의 학벌 수준을 놓고 봤을 때 강남 1%와 지방 1%가 같지 않죠. 나도 강남 1%에 못 들어요. 그런 부모 수준에 사교육비 수준을 생각하면 강남의 입시 결과는 허무하죠. 그 때문에 본질적으로 사교육의 효과가 있느냐는 회의가 들게 돼요. 냉정하게 볼 때 사교육이 입시에 미치는 영향은 많아야 25%이고, 결국 학생의 의지가 있느냐가 75%죠. 사교육이 입시 격차를 만들었다는 것은 정치논리로 만들어진 허구죠.

Q. 사교육도 공교육도 답이 아니라 단순히 학생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뜻인가요?

그것이 가장 본질적이죠. 우리나라 사교육은 정말 엄청난 자기파괴적 성격을 가지고 있죠. 나도 영업하고 살지만 우리는 억지 수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교육 수요에 대응하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그나마 깨끗한 수준을 유지한다고 생각해요.

Q. 지금 이 말은 메가스터디 대표로서 한 치의 사업적 고려 없이 한 건가요?

나는 철학적 가치를 배반할 만큼 타락하진 않았어요.

Q. 마무리를 해야겠네요.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시나요?

솔직히 천재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초등학교 때 월반해 5년 만에 졸업했어요. 내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무의식중에 숨어 있죠. 그때 초등학교 담임이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이죠. 아이들은 자신감이 가장 중요하죠.

Q.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요?

깨끗한 장사꾼으로 남고 싶어요. 이게 가장 큰 소망이죠. 사교육이라 교육자 대접을 받을 수는 없죠. 메가스터디가 아무리 깨끗이 하려 해도 오물을 던지겠죠.

Q. 솔직히 이렇게 달려온 인생이 행복하십니까?

나는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는 것은 근거 없다고 생각해요. 인생의 시작과 끝이 자기 의지로 되지 않는데, 행복이란 인간이 너무나 행복하지 않아 만들어 낸 형이상학적 추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죠. 즉 ‘행복을 위해 산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말이에요. 저는 대신 ‘몰입의 평화와 성취감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고 믿어요.

Q. 독특한 철학적 가치이군요.

아이들을 잃는 큰 사고 뒤 미련이 사라진 탓일 수도 있죠. 약간의 해탈을 가져온 측면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마치며

손주은 대표는 지금도 오전 4시에 잠자리에 든다고 한다. 일과는 살인적이지만 강의를 마친 강사들과 강의를 두고 밤새 격론을 벌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신학 박사인 누이와 몇 시간씩 신학논쟁을 하기도 한다. 인터뷰를 마친 오후 11시에 손 대표와 콩나물국밥집에 들어섰더니, 주인이 단골이라고 반색하며 파전 한 접시를 서비스로 올려 준다. 그는 규정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체력은 황소 같고 넘쳐나는 에너지는 화산 같다. 다른 이들이 그 열정에 공감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거침없는 그의 말을 다듬으며, 원고를 정리하는 이 순간에도 인터뷰에 달릴 댓글들이 걱정스러워지니 말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donodo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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