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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책을 읽는 방식은 다르다

 


내 경우에는 약 세가지의 방식으로 책을 읽는데 그것이 비교적 많은 양의 독서를 가능하게 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내 서재와 책 창고에 있는 책이 대강 12500 권 정도인데 그중에서 전공서적이나 아버지 유품으로 보관중인 책과 전집류에서 제대로 읽지 않은 책. 그리고 기증이나 선물받은 책들 중에 손을 대지 않은 책을 제외하면 20살 이후로 대략 만권쯤 읽은 것 같으니 최소 하루에 한권은 책을 읽은 셈이다.

 


그것은 요즘도 습관처럼 굳어서 요사이는 일주일에 대략 10 여권의 책을 읽는데, 가끔 사람들이 언제 그렇게 책을 읽을 시간이 있느냐고 묻곤한다.

 

하지만 사실 더 읽을 수 있는 시간도 충분히 있다.

 

나는 화장실에, 침대 머리에, 가방에, 차에, 진료실에, 심지어는 식탁에까지 책을 두고 내 동선이 닿는 곳에서 짚히는대로 책을 읽는다. 그러니까 내가 책을 읽는 시간은 대개 특정한 시간을 할애 한다기 보다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셈이다.

 


그래도 사실 하루에 1.5 권의 책을 매일 정독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내가 그정도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내 나름대로의 책을 읽는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기전에 가능하면 그 책에 대한 정보를 먼저 구한다. 그것은 저자의 서문일수도 있고 서평일 수도 있고, 혹은 순전히 느낌에서 일 수도 있는데, 하여간 읽고자 하는 책이 세부류중의 어느 부류인지를 먼저 결정한다,

 


세 부류는 이렇다,

 


책은 플롯이나 얼개가 중요한 책이 있다.

 

이런 류의 책들은 대개 작가의 사상이나 주장, 철학등이 중요하다.

 

예를들면 실용서라면 불루오션 전략이나 롱테일 경제학과 같은 책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책에서 중요한 것은 개념, 혹은 슬로건일 뿐,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나 사례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개 이런류의 책들은 한가지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책의 대부분을 사례로 채우기 때문에 일단 저자의 주장이나 개념이 잡히면 나머지는 대강 흘려버린다.

 

문학에서도 그렇다,

 

예를들어 '세풀베다'의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과 같은 경우에는 책의 분량도 많지 않지만, 이야기 자체가 다양한 이야기와 사건들이 중심이다. 이 경우는 이야기의 구성과 작가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이면 된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때는 '단어'나 '문장'이 아닌 아닌 문장으로 읽는다.

 


우리 눈이 글자를 읽는 방식은 먼저 음절, 단어, 문장, 문단을 따라간다. 눈은 먼저 각각의 음절을 따라 읽은 후, 그것을 연결해서 단어를 한 개의 덩어리로 인식한다,하지만 우리는 글을 읽을 때 대개 단어 단위로 읽는다고 착각한다.

 

그것은 뇌가 그렇게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은 태어나면서 망막에 사물이 맺힐 때 카메라의 원리처럼 거꾸로 인식한다.

 

즉 어린아이는 사물을 뒤집어서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게 뒤집어서 보는 것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기는 점점 뇌에서 그것을 다시 한번 뒤집는 방법을 익힌다. 즉 우리 눈은 사물을 거꾸로 보지만 뇌의 작용으로 그것을 바로 본다고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처럼 글을 읽을 때도 워낙 빠른 속도로 음절을 읽고 뇌가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단어 덩어리로 묶어서 인식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독서를 할 때는 단어 단위로 글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더구나 그것은 워낙 찰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과정을 인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같은 관점에서 우리는 트레이닝에 의해 단어 단위를 한 덩어리로 묶어서 문장을 한 개의 의미덩어리로 이해하는 훈련도 가능한데. 그것이 바로 속독의 원리다.

 

원래 속독은 눈을 빨리 돌리는 연습을 하는것이 아니라 덩어리로 마치 사진을 찍듯이 문장 자체를 동시에 읽는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언어 구사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즉 문장의 의미는 알 수 있지만 말의 아름다움을 인지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렇게 읽는 방식으로 시를 읽거나, 혹은 윤대녕의 소설을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즉 책을 읽을 때 언어의 미학이 중요한 경우라면 단어 단위로 숙독해야 하고, 맥락이나 의미가 중요하다면 문장 단위로 읽으면 된다는 뜻이다.

 


그 다음으로는 문단을 읽는 방식이다.

 


이렇게 문단을 읽는 방식은 책을 섭렵하거나, 이미 아는 내용을 리마인드 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예를들어 내 경우에는 '내가 사랑한 클래식'과 같은 책은 읽어야 할 목록에는 들어 있지만, 그 책의 내용이 내게 새로운 공부나 학습의 기회를 주는 내용은 아니다.

 

이럴때는 저자의 글과 느낌. 음악에 대한 저자의 애정등을 간접적으로 스쳐가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은 저자나 작품을 폄하하는것이 아니라, 나와 관심사가 같고 내가 그 분야에 나름의 입장이 있을 경우에는 그곳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기 보다는 익숙한 느낌을 즐기려는것이기 때문이다.

 


문단으로 책을 읽는 방식은 쉽다,

 


속독학원에서 흔히 가르치는 것처럼 책의 좌측 첫머리에서 우측 끝을향해 시선을 대각선으로 훓으면서 글 전체를 하나의 장면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다음 그장면에서 인상적인 구절이나 느낌을 도로 끄집어내면서 되새김질 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속독 원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나는 책을 읽을 때 의외로 3,4 일을 끌면서 단어하나 음절 하나를 꼭꼭 씹어서 물이 되어 삼키는 경우도 있고, 마치 쌈밥을 먹듯이 한 시간에 책 한권을 그냥 한번에 삼켜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내가 많은 책을 읽은 척 하는 비밀이다.

 


물론 사람마다 책을 읽는 습관이나 방식은 다르다,

 


또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이 가장 익숙하고 좋은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요즘과 같은 정보의 시대에 그야말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책의 바다에서 그나마 뒤처지지 않는 방법은 이것 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청소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책은 무조건 많이, 빨리 읽는다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워 책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고 언어로 의사를 전달하며, 언어로 표현한다. 때문에 다른사람의 언어를 많이 익히고 표현법을 활용하면 궁극적으로는 내 사고의 지평이 넓어 질 수 있지만, 대신 나름대로 자기만의 독서법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독서의 힘이고 나를 좀 더 나은사람으로 단련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출처] 책읽기..|작성자 시골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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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방법을 굳이 나눈다면 크게 간독(看讀), 숙독(熟讀), 정독(正讀) 정도가 될 수 있다. 그중에서 먼저 간독은 문자 그대로 책을 일별하듯 두루 읽어 내려가는 것을 가리키고, 숙독에는 책을 읽으면서 그 안에 숨어 있는 지적 성과를 간파하는 노력이 개입된다.
 
불완전한 언어를 통해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간파하거나 최소한 염탐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숙고(熟考)가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숙독을 해도 글에서 저자의 생각을 완전히 읽어내기란 역부족이다. 책을 위한 책, 소위 해제본(解題本)이 등장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독서를 통한 공부의 불완전성도 바로 거기에 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책을 읽으면서 공부한 사람이라도 글이 담고 있는 원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독서는 결국 변방을 맴도는 데 그친다. 물론 저자뿐 아니라 독자의 언어능력도 중요한 요소다. 좋은 독서는 훌륭한 저자와 좋은 독자가 만나는 지적 교류이기 때문이다.
 
정독은 바로 이 과정에 개입한다. 즉, 정독은 저자의 뜻을 깊이 숙고하고 사색하며 저자가 던진 사유를 내 것으로 재해석하고 흡수하는 행위다. 저자의 뜻을 곡해하거나, 독자의 편견으로 저자의 사상을 제대로 관통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정독이 아니다. 정독이란 숙독과 달리 깊은 사색을 통해 저자가 전달하려는 본뜻을 바르게 수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정독은 길이고, 숙독은 걸음이며, 간독은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간독, 숙독, 정독의 3요소를 두루 필요로 하는 책이 최고의 양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3요소가 아우러지는 최고의 고전은 어떤 것일까. 최소한 영미문학에선 단연 한 사람을 꼽는다. 바로 제임스 조이스다. 그는 오늘의 영미문학을 있게 한 작가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다. 특히 그의 대표작 ‘율리시스’(김종건 옮김/ 생각의 나무 펴냄)는 하나의 문학작품이 시대를 넘어 얼마나 거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역력히 보여준다.
 
한데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가 제임스 조이스란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큼이나, 혹은 ‘율리시스’를 거론하는 것만큼이나 실제 이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 적다는 것. 이는 바로 작품의 가독성 때문이다. ‘율리시스’는 세 사람의 주인공에게 단 하루 동안 일어난 16개의 에피소드를 그린 소설로, 서사 자체가 흥미를 유발하는 작품은 아니다. 더구나 대부분의 독자는 그의 작품에서 그렇게 빼어나다는 언어유희를 느낄 수도 없는데, 이는 번역의 문제다. 조이스의 작품에서 어휘와 문장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독자는 혀가 마비된 미식가에 비견된다. 그 점에서 필자 역시 조이스의 작품은 거대한 벽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아쉬움을 일거에 만회할 수 있는 획기적인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김종건 교수가 20년간의 노력 끝에 ‘율리시스’를 재역한 것이다. 무려 3만개의 어휘에서 나온 2만5000여 개의 단어와 신조어, 다층적 의미를 가진 문장의 중의성을 살리면서 그에 가장 근접한 우리말 단어를 골라 병치하는 일은 실로 엄청난 노고가 필요함에도 이번에 그 일을 해낸 것이다.
 

 

이 책 ‘율리시스’의 완역본을 받아든 필자는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까지 친절한 각주와 해설이 달리고, 풍부한 사진자료까지 담긴 이 책의 첫 페이지는 찬사를 넘어 감격의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이 책은 독자들이 정독의 관점에서 최소 두어 달의 시간을 들여야만 할 기념비적 저작이지만,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간독을 통해 조이스를 일견하고, 두 번째는 숙독하면서 각주와 해제를 같이 읽은 다음, 마지막으로 정독을 통해 조이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의 독서를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을 세상에 나오게 한 출판사 생각의 나무와 역자 김종건 교수에게 박수를 보낸다.

[출처] 율리시즈...|작성자 시골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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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인간의 몫이 아닌 신의 몫이다. 하지만 ‘윤리’는 인간의 몫이다.

 

전자는 불변의 가치이지만 후자에게는 ‘당대성’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이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는 장면을 만난다. 예를들면 ‘친권’에 대한 논의가 그렇다. 한때 친권은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것이 ‘윤리’였고 그에 부가되는 책임과 의무 역시 마찬가지 였다. ‘호주제’ 논쟁이 증명하듯 그 가치기준이 바뀌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이 책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담담하다. 당대의 가치의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저 한 파렴치한 남자(어쩌면 그리 파렴치 하다고 볼 수도 없는 비겁한 남자)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한 평범한 여자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도 ‘그 여자’로 지칭된다. 남녀는 우연히 다시 만난다. 과거 첫사랑이었다는 이유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남자는 쉽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두 사람 다 사별과 이혼으로 각자 혼자였기 때문이다. 남자에게는 딸 아이가 하나 있지만 그것은 벽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진짜 벽은 ‘편견’이었다.

 

서른다섯에 아이가 딸린 남자의 어머니 눈에는 남자에게 아무런 결격 사유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가 보는 ‘여자’는 다르다. '이혼녀'라는 굴레가 덧 씌워진 것이다. 결국 남자는 여자와 헤어진다. 작가는 이 남자가 보편적 기준에서 볼 때 적당한 양심을 가진, 그래서 그리 나쁜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저 우리가 흔히 만나는 평범한 윤리의식을 가진 우리 주변의 남자다. 하지만 남자에게 ‘보편성’이란 모호한 것이다.

 

‘어머니의 요구’을 받드는 것도 윤리고, ‘그 여자’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도 윤리이기 때문이다. 두 여자 사이에서 결국 남자는 어머니 편을 택한다. 이왕이면 실리의 편에 선 것이다. 이점에서 남자에게 큰 갈등 구조는 없다. 그저 외면한 것에 불과하가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아이가 생기면서부터 남자는 비굴해진다. 남자는 여자에게 돈 봉투를 내민다. 이 역시 일종의 ‘보편적 관행’인 탓이다. 여자는 호소하지만 외면당한다.

 

그렇다고 절박하게 간청하거나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숱한 편견 속에 애써 아이를 키운다. 그러나 남자와 재혼한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자는 ‘그 여자’에게 친권을 주장한다. 물론 이 역시 노모의 간곡한 청이라는 적당한 명분이 있다. 남자의 새 여자 역시 남자의 편에 선다. 결국 두 여자가 ‘그 여자’에게 ‘여자’이기를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갈등구도 역시 명료하다.

 

이 책에는 배우 ‘심은하’가 서슬퍼런 표정으로 ‘부숴버리겠어’를 외치던 ‘청춘의 덫’이나, 탤런트 배종옥이 통렬한 어퍼컷을 날리는 ‘ 내남자의 여자’와 같은 의지나 자각, 결기도 없다. 물론 독자를 위로하는 극적인 복수도 피눈물을 흘리는 저주도 없다. 여자는 자신이 눈을 떠 간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아이를 보호하겠다는 본능에 충실 할 뿐이다. ‘권선징악’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소설의 결과는 누구나 예상 할 수 있고 마치 고희가 지난 할머니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듯 편안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이 책을 읽고 ‘분노’ 따위를 떠 올릴 이유가 없다.

 

만약 이 책에 분노한다면 당신은 지나치게 감정과잉이거나 포커스를 잘못 맞춘 탓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왜 ‘여자’가 남자와 ‘대대관계’에 있는지, ‘여자’라는 존재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천천히 다시 음미하게 한다. 아마 이 책이 이 시대에 출간된 책이라면 독자들은 피식 헛웃음을 웃거나 외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이 쓰여진 20년전의 상황을 떠올리면 문제는 달라진다. ‘동시대’ 여자와 달리 ‘당대’의 여인, 즉 저자가 주목한 ‘여자’는 구원의 대상이 되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다. ‘여자’는 스스로 맞서고 일어선다. 이 시점에서 소설이 다시 읽혀지는 이유다.

 

우리는 이 책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낄까?.

 

문학은 고고학이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다시 읽는 문학, 혹은 고전이란 ‘과거에는 이랬어. 예전에는 이랬군’이라는 회고가 아니라, 껍질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한계’를 깨는 힘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덧붙여 저자의 문체와 서술의 힘은 지극한 경지다. 극적인 상황이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저자는 독자들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상황 속으로 몰고간다. 여백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 여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공통감각’이라고 칭한 그 느낌. 즉 엄마의 냄새와 여자의 외침, ‘그 여자’가 살아가는 다면적인 모습들에 대한 인식을 통해 ‘동 시대의 윤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그 점에서 박완서의 글은 주장이라기 보다는 부드러운 설득에 가깝다. 박완서는 굳이 ‘진리’에 도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엄마의 권리’라는 천부인권조차 ‘진리’로 주장하지 않는것 처럼 보인다. 현 시점에서 ‘개 밥바라기 별’을 쓴 황석영과 달리 ‘박완서’에게 ‘문학’은 새로운 ‘당대’를 여는 필연이었던 듯하다.

 

이 책이 씌여지고 20년.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문학’과 ‘당대의 작가’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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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하던 ‘한국호’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잠재성장률이 하락하면서 고도성장의 막이 내렸고, 문화적 측면에서는 일부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한 ‘한류(韓流)’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과거 선진국이 앞서나간 분야를 특유의 근면성으로 돌파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우리 것, 우리 상표, 우리 문화를 입히는 ‘킬러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 문제를 푸는 것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모방은 기교로 해낼 수 있지만, 창의란 오랜 기간 축적된 지식과 문화가 숙성·발효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천 년에 걸쳐 고유의 문화를 쌓아온 지구상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한데 창발성 측면에서는 중국, 이탈리아, 프랑스, 심지어 고작 200년 역사의 미국마저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오랜 시간 축적한 성과들이 단절돼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중시해온 특별한 문화를 지녔지만 계승에는 실패한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은 ‘조선왕조실록’, 고려조의 팔만대장경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 문인, 은둔거사가 문집이라는 형태로 남긴 글 등 엄청난 문화유산을 후대에 물려줬다. 그 안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사유가 담겨 있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에서 퇴계와 고봉, 율곡의 논쟁과 대화, 실학파의 이용후생에 이르기까지 조상들의 사유는 탁상공론이 아닌, 이치와 존재를 탐구하는 철학과 문화의 보고였다.
 
과학기술은 가설을 세우고 증명된 자료를 바탕으로 원리를 만든다. 하지만 과거 학자들은 단지 머릿속의 실험실을 운영했을 뿐, 자신의 생각과 사유를 증명할 수단이 없었다. 이 거대한 ‘머릿속 실험실’은 각기 당대를 뛰어넘는 사유를 통해 후학들에게 전해졌고, 그것은 고스란히 기록으로 우리에게 전승됐다. 안타까운 점은 이 문화와 철학의 보고가 우리말이 아닌 한자로 쓰였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것을 계승·발전하고 우리 문화를 농축하기 위해서는 선현들의 저작을 되도록 빨리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 하지만 이 작업을 소홀히 해왔다. 현대 과학기술문명의 습득에만 주력하느라 창발성의 바탕이 되는 사유의 거대한 숲을 방치한 것이다. 앞으로 우리만의 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선현들의 사상과 철학을 체화하는 것이 급선무다.
 
하지만 지금도 각 문중에는 선조들의 문집이 쌓여 있고 그중의 절반, 아니 10분의 일도 우리말로 전승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바칼로레아를 치르며 놀라운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은 그들의 문자로 된 선학들의 지식을 쉽게 체득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북한의 연구는 꽤 앞서나갔다. 물론 이념적 목적이 개입된 부분이 적지 않다 해도 과거 북쪽의 완역 ‘리조실록’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후 고전번역원이 설립되고 고전에 대한 번역작업을 해나가고 있지만, 지금 와서 선인들의 지혜를 그대로 습득하기란 여전히 지난한 여정이다. 이 책, 연암의 ‘열하일기’(리상호 옮김, 보리 펴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연암은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단순한 기행문이 아닌 역사, 철학, 사회, 과학, 기술, 예술, 농업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안목으로 당시 선진문화를 접한 소회를 피력하면서 이렇게 일갈했다
 
“중국을 구경하고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 장관, 무엇이 장관이라고 떠들지만 나로서는 똥거름 무더기가 장관이고, 깨진 기와 쪽과 버리는 조약돌을 이용하는 방법이 장관이더라.”
 
이 말은 26권의 ‘열하일기’ 가운데서 백미 중의 백미다. 사신을 따라 중국 황제의 고희 축하사절로 중국을 여행하면서 그는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을 부러워한 게 아니라 이용후생, 즉 민중이 잘 살고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실용성을 부러워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이 책은 연암의 역작이자 우리 문화의 최고봉이다. 이런 책을 북한 학자들이 오래전에 먼저 완역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읽거나 들은 ‘열하일기’는 발췌와 해석을 바탕으로 한 편린일 뿐, 이렇게 완전한 번역을 바탕으로 전작을 읽는 기쁨은 가히 흥분과 전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왕복 만리의 여행 체험을 바탕으로 묶은 ‘열하일기’는 당대 지식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파브르의 ‘곤충기’나 다윈의 ‘진화론’에 앞서 우리 학생들이 통독해야 할 피요 살이다. 그 점에서 비록 북한 학자들의 번역이지만 이 책 안에서 연암은 살아 있다.

 
이 책을 읽으면 독서 체험이 주는 자지러질 듯한 기쁨과 흥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 중의 책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donodo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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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는 하루키가 내놓은 또 하나의 논쟁적 작품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작품답게 배경은 작가가 설정한 가상의 시점이다. 출판 전부터 ‘역대 최고 선인세’라는 상업적 이슈로 화제가 되더니, 아니나 다를까 출간 이후 서점가를 강타하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필자와 같은 386 세대에게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로 각인된 이 작가는 이후의 작품으로는 그에 필적할 만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386 독자들은 하루키라는 이름에서 ‘상실의 시대’를 추억하며 지금껏 애증의 관계를 이어온 셈이다. 하지만 ‘1Q84’는 그동안 그에게 실망하고 그의 이름을 아련한 추억 속으로 밀어내려 했던 옛 독자들을 다시 작품 앞으로 끌어내고 있다.
 
아울러 그를 처음 접한 20대들에게는 ‘상실의 시대’가 아닌 ‘1Q84’의 작가로 자리매김할 조짐이 보인다. 하루키는 많은 독자가 호감을 보이는 것과 달리 문단이나 비평가들로부터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런 현상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순수문학상인 군조신인상과 아쿠타가와상은 ‘대중소설가’라는 이유로 하루키를 밀어내고 말았다.
 
그의 작품이 갖는 대중성이 대중적 글쓰기의 영향인지, 아니면 대중에게 잘 수용된 것뿐인지에 대한 논의도 치열하다. ‘나쓰메 소세키 이후 가장 중요한 일본작가’라는 평에서부터 ‘헤밍웨이의 아류’ ‘버터 냄새나는 미국문학 계승자’라는 혹평까지 하루키는 존재 자체가 늘 폭발력을 지녔다.
 
필자 또한 하루키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다. ‘상실의 시대’ 이후 그가 몰입해온 세계관은 필자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태엽 감는 새’와 ‘해변의 카프카’에서 그랬다. 작가로서 성공에 이른 하루키는 어느새 신화나 공상의 세계를 헤매 다녔고, 필자는 그의 현란한 변신에 제대로 적응하기가 힘들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1Q84’는 이런 논란을 어느 정도 잠재울 것으로 보인다. 독자의 이해와 작가의 욕망 사이, 딱 중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 신화, 허구 등에 몰입하는 것은 여전하다.
 
그의 책이 짐짓 심각한 담론을 주제로 다루면서도 서사적이지 않고 얄팍하다는 평을 받는 이유다. 하지만 이 책은 그의 전작들과 달리 허구를 절묘하게 은유와 상징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잘 짜인 협주곡 같은 그의 글쓰기는 하루키가 이제 새로운 영역의 문을 열어젖히는 데 성공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책은 2개 주제를 각자의 선율로 절묘하게 연주한다. ‘두 개의 달’, 하나는 정상적인 달이지만 다른 하나는 이지러진 달이다.
 
아오마메와 덴고, 이 남녀 주인공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후카에리라는 인물의 두 가지 세계가 합주를 하고 때로는 변주를 한다. 마지막에는 이들이 하나가 되어 ‘투티’(tutti·총주)에 이른다. 이야기는 한 편집자가 소설가 지망생인 덴고에게 후카에리의 소설을 고쳐 쓸 것을 제안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덴고는 이 범죄적 행위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지만, 이유를 말할 수 없는 매력에 빠져 저자인 후카에리를 만난다. 최근 하루키의 소설이 보여주는 공통된 작법이 여기서도 하나의 약점으로 드러나는 셈.
 
다른 한편에서는 아오마메라는 살인청부업자가 등장한다. 살인청부업자라기보다는 이유 있는 살인을 하는 일종의 청소부 역할이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이 여인은 아내를 학대하는 남자의 목에 얼음송곳을 깊숙이 찔러 넣는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세계가 2부에서 하나로 만난다. ‘1Q84’에는 30년 전 일본을 뒤흔든 전공투, 옴 진리교와 같은 신흥종교, 여호와의 증인, 리틀피플이라는 결사체에 희생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펼쳐진다.
 

많은 작가가 사회문제를 다룰 때 직접적인 방식을 채택하는 것에 비해 하루키는 이렇게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한다. 이러한 공상적 허구가 거슬리는 부분이 간혹 눈에 띈다. 세계관이 지나치게 비틀리기도 하고, 문장에선 심지어 의미 없는 반복과 흐트러짐까지 엿보인다. 어쨌든 하루키는 이 작품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해변의 카프카’가 미국에서 열렬한 반응을 얻었지만 국내에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고 필자에게도 실망을 안겨줬다면, ‘1Q84’ 이후 하루키는 필자에게 또다시 강한 흡인력으로 새로운 기대를 안겨주는 작가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다시 부는 하루키 바람이 이유 없는 것은 아닌 셈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donodo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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