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인간의 몫이 아닌 신의 몫이다. 하지만 ‘윤리’는 인간의 몫이다.

 

전자는 불변의 가치이지만 후자에게는 ‘당대성’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이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는 장면을 만난다. 예를들면 ‘친권’에 대한 논의가 그렇다. 한때 친권은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것이 ‘윤리’였고 그에 부가되는 책임과 의무 역시 마찬가지 였다. ‘호주제’ 논쟁이 증명하듯 그 가치기준이 바뀌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이 책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담담하다. 당대의 가치의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저 한 파렴치한 남자(어쩌면 그리 파렴치 하다고 볼 수도 없는 비겁한 남자)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한 평범한 여자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도 ‘그 여자’로 지칭된다. 남녀는 우연히 다시 만난다. 과거 첫사랑이었다는 이유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남자는 쉽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두 사람 다 사별과 이혼으로 각자 혼자였기 때문이다. 남자에게는 딸 아이가 하나 있지만 그것은 벽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진짜 벽은 ‘편견’이었다.

 

서른다섯에 아이가 딸린 남자의 어머니 눈에는 남자에게 아무런 결격 사유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가 보는 ‘여자’는 다르다. '이혼녀'라는 굴레가 덧 씌워진 것이다. 결국 남자는 여자와 헤어진다. 작가는 이 남자가 보편적 기준에서 볼 때 적당한 양심을 가진, 그래서 그리 나쁜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저 우리가 흔히 만나는 평범한 윤리의식을 가진 우리 주변의 남자다. 하지만 남자에게 ‘보편성’이란 모호한 것이다.

 

‘어머니의 요구’을 받드는 것도 윤리고, ‘그 여자’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도 윤리이기 때문이다. 두 여자 사이에서 결국 남자는 어머니 편을 택한다. 이왕이면 실리의 편에 선 것이다. 이점에서 남자에게 큰 갈등 구조는 없다. 그저 외면한 것에 불과하가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아이가 생기면서부터 남자는 비굴해진다. 남자는 여자에게 돈 봉투를 내민다. 이 역시 일종의 ‘보편적 관행’인 탓이다. 여자는 호소하지만 외면당한다.

 

그렇다고 절박하게 간청하거나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숱한 편견 속에 애써 아이를 키운다. 그러나 남자와 재혼한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자는 ‘그 여자’에게 친권을 주장한다. 물론 이 역시 노모의 간곡한 청이라는 적당한 명분이 있다. 남자의 새 여자 역시 남자의 편에 선다. 결국 두 여자가 ‘그 여자’에게 ‘여자’이기를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갈등구도 역시 명료하다.

 

이 책에는 배우 ‘심은하’가 서슬퍼런 표정으로 ‘부숴버리겠어’를 외치던 ‘청춘의 덫’이나, 탤런트 배종옥이 통렬한 어퍼컷을 날리는 ‘ 내남자의 여자’와 같은 의지나 자각, 결기도 없다. 물론 독자를 위로하는 극적인 복수도 피눈물을 흘리는 저주도 없다. 여자는 자신이 눈을 떠 간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아이를 보호하겠다는 본능에 충실 할 뿐이다. ‘권선징악’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소설의 결과는 누구나 예상 할 수 있고 마치 고희가 지난 할머니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듯 편안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이 책을 읽고 ‘분노’ 따위를 떠 올릴 이유가 없다.

 

만약 이 책에 분노한다면 당신은 지나치게 감정과잉이거나 포커스를 잘못 맞춘 탓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왜 ‘여자’가 남자와 ‘대대관계’에 있는지, ‘여자’라는 존재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천천히 다시 음미하게 한다. 아마 이 책이 이 시대에 출간된 책이라면 독자들은 피식 헛웃음을 웃거나 외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이 쓰여진 20년전의 상황을 떠올리면 문제는 달라진다. ‘동시대’ 여자와 달리 ‘당대’의 여인, 즉 저자가 주목한 ‘여자’는 구원의 대상이 되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다. ‘여자’는 스스로 맞서고 일어선다. 이 시점에서 소설이 다시 읽혀지는 이유다.

 

우리는 이 책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낄까?.

 

문학은 고고학이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다시 읽는 문학, 혹은 고전이란 ‘과거에는 이랬어. 예전에는 이랬군’이라는 회고가 아니라, 껍질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한계’를 깨는 힘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덧붙여 저자의 문체와 서술의 힘은 지극한 경지다. 극적인 상황이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저자는 독자들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상황 속으로 몰고간다. 여백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 여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공통감각’이라고 칭한 그 느낌. 즉 엄마의 냄새와 여자의 외침, ‘그 여자’가 살아가는 다면적인 모습들에 대한 인식을 통해 ‘동 시대의 윤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그 점에서 박완서의 글은 주장이라기 보다는 부드러운 설득에 가깝다. 박완서는 굳이 ‘진리’에 도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엄마의 권리’라는 천부인권조차 ‘진리’로 주장하지 않는것 처럼 보인다. 현 시점에서 ‘개 밥바라기 별’을 쓴 황석영과 달리 ‘박완서’에게 ‘문학’은 새로운 ‘당대’를 여는 필연이었던 듯하다.

 

이 책이 씌여지고 20년.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문학’과 ‘당대의 작가’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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