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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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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조리한 의식에 빠져 있을 때 순간적으로 뇌리의 깨임이 생기곤 한다. 찰라에 의식의 현기증이 일어나면서 저 깊은 의식의 심연속으로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그리고는 용틀임이 거세게 일어나 우리를 변화시킨다.

나는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면서 이러한 천지개벽하는 동양적 상상의 희열을 맛보았다.

어느날 자고 일어나보니 곤충이 되어버린 나! 의 극적인 변화. 비록 카프카의 변신이 끝내는 파멸이란 종지부로 막을 내리긴 했지만 그러한 극적인 변화의 시도는 숨막히는 테크노 공간의 호모사피엔스에겐 탈출욕구를 자극시킴으로써 희열을 느끼게 한다. 이탈과 일탈 그리고 탈출에의 욕구마저 소멸시켜버리는 테크노 공간의 중력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인간들 바로 그들은 변화를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미지근한 물 속을 헤엄치는 개구리는 점점 뜨거워지는 물의 상태를 의식하지 못하고 결국 파멸의 운명을 맞이한다. 미지근함으로 인한 의식의 마비로 인해서.

단조로운 삶의 공간 속의 인간 역시 단조로움으로 인해 의식이 마비되고 점점 퇴폐와 향락으로 뜨거워지는 그들의 존재공간은 결국 증발하고 만다. 당신들의 존재공간은 뜨거운가. 변화를 꿈꾸는 것, 그것은 우리의 의식을 깨우고 흥에 겨워 출렁거리는 삶의 공간 속으로 인도한다.

삶의 공간으로서의 환경과의 커뮤니케이션 부재와 단절은 정작 인간을 소외시킴으로써 공간 안의 또 다른 공간으로서의 블랙홀(Black Hole)로 함몰시킨다. 존재가 그곳에 놓여지는 순간 입구는 사라진다. 막힌 공간에서 출구를 찾으려는 인간의 허우적거림은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게 만든다. 죽음은 끝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라는 환상을 그들에게 부여한다. 그들은 화이트홀(White Hole)을 꿈꾼다. 출구부재의 존재공간으로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다. 하지만 그곳은 지치고 소외된 존재들의 도피처가 될 수 없다. 도피처로의 그들의 변신은 실패하고 만다. 도피수단으로서의 죽음은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공간은 유토피아의 에덴동산이 결코 아니다. 그곳은 파멸의 공간인 소돔과 고모라 성(城)이다.

우리가 선택하고 변화해야 하는 공간은 순수영역으로서의 존재공간으로 우리곁에서 늘 함께 존재하는 삶으로서의 공간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공간으로서의 환경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존재공간을 도피처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소외되지 않는다. 인간은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에너지이고 힘이다. 변화의 궁극적 지향점은 사랑으로 순수한 존재공간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삶을 위한 진정한 변화이다.

"시계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외부의 시계는 몰아치는데, 내부의 시계는 쉬엄쉬엄 보통의 속도를 유지한다.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를 찾아 변화해야만 한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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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의 경제학 - 간디가 생각한 경제
아지뜨 다스굽따 지음, 강종원 옮김 / 솔출판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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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지뜨 다스굽타가 <무소유의 경제학>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간디의 사상은 경영을 하고 있는 그리고 경영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응집력(Cohesive power)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어 보인다.

응집력은 이미 프란시스 후코야마가 트러스트(Trust)라는 저서를 통해서도 역설한바 있듯이, 기업 뿐 만아니라 경제적 성과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자본으로서 서로가 믿고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며, 또한 앞으로는 더욱 더 중요한 기업의 핵심 자본이 될 것이다.

인터넷 사용의 확산이 말해 주듯이, 정보 및 개인간의 의견교류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에 구애없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지식수준의 향상은 사회의 큰 흐름을 따르기 보다는 이를 거부하고 독특한 개성들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흐름을 만들고 있어, 최고경영자(CEO)나 중간관리자 몇몇만으로서 이러한 물결을 감지하고 이에 대한 예비와 예책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기에는 그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생산 및 판매의 일선에 있는 수 많은 구성원들의 자발성에 의한 응집력은 기업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 응집력의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다고 할 수있다. 즉, 단순히 생명체의 속성이 경쟁보다는 협동이기 때문이라는 맹목적인 근거는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버거워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다스굽따가 말해주고 있는 여러분야-교육, 보관인정신, 산업화, 불평등등등-에 대한 간디의 일관적인 논변의 핵심적 요인이라 할 수 있는 자존(Self-repect)은 인간이 생명체로서 협동을 본능적으로 행할 수 있는 즉, 응집력의 원천으로서 간주하기에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굽따의 이야기를 듣고있노라면 간디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간디는 자존(self-repect)이야 말로 인간이 지닌 내발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의 핵심으로 파악했던 것 같다. 이는 그가 왜 진리와 비폭력을 강조 했으며, 그리고 억압이나 강제보다는 자립과 자치를, 온정적 이타주의 보다는 결과적(타자적)이타주의를, 그리고 산업화에 반대했었는지를 명확히 이해하게 해준다. 간디는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다 신(神) 혹은 진리를 가지고 있어서 이를 발현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믿음하에, 이를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유일한 의무이자, 이의 유일한 방법을 바로 자존(Self-respect)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교육도, 경제도, 보관인 정신도 스스로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기 하기위한 계기가 되어야 된다고 역설했던 것이며, 그래서 경제의 단위를 정부, 기업, 가정이라 보지 않고 개개인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이 지점에서 그가 왜 윤리 및 종교가 경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노동은 왜 신성한 것이라고 주장했는지를 이해 할 수 있다. 생존수단에 대한 의존심 노골적으로 말하면, 타인이 가꾸어 놓은 작물을 아무런 노력없이 착취하고자 하는 성향(간디는 이를 기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은 자존에 반하는 것이므로, 자존을 위한 어떠한 윤리나 종교라 하더라도 이를 필수조건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참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도 교육의 큰 문제점을 바로 문과적 측면(주로 암기식 교육)에만 치중하여 오히려 노동이나 기술을 무가치하게 여기려는 점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스굽따가 간디의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는 기계화 및 산업화에 반대의 의견은 그렇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간디는 진정으로 인도에 스스로의 삶을 아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랬고 삶을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생활공간과 그들의 양식을 스스로가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노동의 기회를 앗아가는 그리고 자신의 참다운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는 기계사용이나 산업화를 반대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어도 우리에게 유익한 간디에 대한 해석방식일 것이다. 사실 소위 경제선진국에 대한 과거의 발자취를 보면 중화학공업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생활공간과 그들의 양식에 기인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경제선진국일수록 생활공간과 양식의 특징을 산업적으로 표현하려고 더욱더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간디가 주장하고 있는 자존과 이를 중심으로한 내생적 측면에서의  진리와 외생적 측면에서의 비폭력은 많은 이들에게 실현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비판받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간디의 사상을 전수받아 행동으로 옮긴 미국의 킹 목사가 미국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이미 이런 비판은 의미가 없어 보이며, 간디의 사상이 얼마나 현실적인 응집력의 근거를 말하고 있었나를 검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아담스미스의 시장질서를 형성케 한다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보다 구체적인 실체를 간디의 자존이라는 개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즉, 어떤한 제제나 규제 없이도 시장이 자연발생적인 질서를 형성케 하는 것은 예를 들어 수요-공급의 원칙과 같은 시장의 원리가 아니라, 바로 개개인이 행하는 자존에 대한 추구, 즉 자신의 삶다움을 추구하려는 그러한 성향이었던 것으로 이해 될 수 있어 보인다.(이는 아담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배경을 통해서도 알 수있다. 아담스미스는 매우 이상한점을 발견했다. 그를 고용하는 고용주로서의 그 당시 사회의 권력층들은 겉으로는 박애나 평등을 외치면서 그리고 돈에 대한 가치를 무시하면서 내면으로는 이를 갈취하는 것이였으며, 상인들은 겉으로는 박애나 평등 보다는 돈에 대한 가치를 주장하면서 실질적으로 그들의 행동이 박애나 평등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담스미스는 이를 놓고 고민하다가 바로 그 유명한 Invisible hand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래서, 거시적인 시장 뿐 아니라 미시적인 경영활동에 있어서도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세가 있다면, 즉 의존적이거나 수동적이지 않고 간디의 표현에 의하자면 자아실현을 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이는 바로 응집력으로 연결됨을 아지따 마스굽따가 <무소유의 경제학>에서 말하고 있는 간디의 사상을 통해서 우리는 엿볼 수 있는 것이다.

* 본 서평은 수안엄마로서 본인(서윤정)의 리뷰이며, 2000년 YES24 온라인서점에 올린 리뷰이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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