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
마음먹은 것을 행동에 옮기기 위해서는 항상 적절한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걸.
P17
첫번째 이유, 그녀의 삶은 이제 모든것이 너무 뻔했다.
젊음이 가고 나면 그 다음엔 내리막길이다.
어김없이 찾아와서는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노쇠와 질병들,
그리고 사라져가는 친구들.
이 이상 산다고 해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고통의 위험만 커질 뿐이었다.
두번째 이유는 보다 철학적인 것이었다.
신문과 텔레비젼을 통해 그녀는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그러한 상황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자신이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P18
스물네 살의 나이에,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경험해본 후에
- 그녀의 경험이 아주 하찮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길!
- 베로니카는 모든 것이 죽음과 함께 끝난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살을 선택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마침내, 자유. 영원히, 망각.
`솔직히 난 믿지 않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인간의 이해력에 한계가 있다는 걸 이해해야만 해.
불의, 탐욕, 비참함, 고독일뿐인 이러한 혼돈을 창조한 건 바로 신 자신이잖아.
신의 의도는 훌륭한 것이었겠지만 결과는 형편없어.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보다 일찍 이 세상을 떠나기를 갈망한 피조물들에게 관대함을 보여야 해.
아니, 오히려 우리가 이 땅을 거쳐가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할지도 몰라.'
P21
이 아름다운 오후, 류발랴나 광장 위로 볼리비아 악사들의 토속 음악이 흐르고,
한 청년이 그녀의 창 앞을 지나가는 사이,
죽음을 기다리는 그녀는 자신의 눈이 보고 있는 것,
자신의 귀가 듣고 있는 것에 행복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똑같은 광경을 삼사십 년이나 오십 년 동안 보고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더욱더 행복했다.
몇십 년을 두고 봐야 한다면,
이 아름다운 광경도 머잖아 독창성을 모조리 상실하고 모든 것이 반복되는,
전날이나 다음날이나 다를 게 없는 존재의 비극이 되어버릴 테니까.
P26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난 그래도 그 시기가 숙모에게는 일생 중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믿어요.
그때 숙모는 무언가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거든요.
숙모는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걸,
당신도 앞에 놓인 도전에 결렬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걸 느꼈던 거죠.
모두가 무슨 짓을 해서건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세상에서,
죽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각자가 자기 몫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며, 자기 삶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P40
어느 날 나는 산다는 게 그런 거라는, 삶은 아무것에도 이르지 못한다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거야.
그러고는 그 삶에 적응해가겠지.
P46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를 돕고 싶다는 듯 아주 근심스런 표정을짓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그들 자신은 그나마 행복하다고,
삶이 그래도 그들에게는 관대했다고 믿으며 즐거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