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엣 - 파란색과 사랑에 빠진 이야기, 그 240편의 연작 에세이
매기 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사이행성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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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에 관한 240개의 짧은 글이 모인 연작 에세이 <블루엣>. 장르를 넘나드는 독특한 글쓰기 방식으로 쓰여져있다. 이 책 속에는 저자의 개인적인 기억에서부터,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철학자들, 괴테, 고흐, 뒤라스, 빌리 홀리데이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다양한 ‘블루‘들에 대해서는 물론 색채론과 우울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단 한가지로 규정하기 힘든 책.



무엇보다, 길게 쓰여지지 않았다. 각각 번호가 붙여진 글들 사이의 공백은 온전히 독자의 것이다. 240개의 단상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니 어느 순서로 읽어도 상관이 없다. 이 책이 철학서인지 에세이인지 시인지 규정하려 하지 말고 그냥 읽어내려가다보면, 그래서 저자의 ‘블루‘를 만나게 되면 문득 궁금해진다. 나의 색은 무엇일까. 나의 블루는 무엇일까. (답: 내가 정한(!) 나의 색은 검붉은색이다. 아주 오랫동안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나의 블루는, 글쎄, 알아가는 중.)



또한, 이 책의 형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작가로 비트겐슈타인이 언급되는데 그에 대해서도 더 알고싶어졌다. ‘독자의 발밑의 카펫을 잡아 빼는 비트겐슈타인식 글쓰기‘라는 평이 인상깊어서 더욱 궁금하다. 사실 <블루엣>은 이미 2009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우리나라에는 10년만에 번역 소개된 셈이다. 그간 예술 비평집 등 저자의 다른 작품들도 다수 출간되었는데 그 책들도 궁금하다. 원서를 찾아 읽고 싶지만 과연 찾아 읽는 귀찮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동안 비슷한 경우 도전했던 원서읽기는 거의 다 실패했다.)



이 책, 읽을 때는 ‘음 매력있네.‘하고 읽었는데 막상 리뷰를 적으니 한 번 더 읽고 싶어진다. 조금만 더 들춰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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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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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가 테러 조직 결성 혐의로 이종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힌 연인 사비에르에게 쓴 편지들과 그 편지들의 뒷면에 사비에르가 적은 메모들로 이루어진 소설 <A가 X에게>. 며칠동안 매일 조금씩 아껴 읽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부러운 사람은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



이들에게 사랑은 곧 저항이다. 가장 개인적인 일이 가장 정치적인 일이 된다.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는지조차 알 수 없기에. 아이다의 문장 속 사랑의 숨결은 종이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그녀의 편지에서 느껴지는 것은 사랑의 뜨거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영원함. 그녀는 사랑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이토록 우아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구체적인 역사를 가진 개인은 고유
하다. 고유하다. 고유하다.


편지를 쓰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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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발굴
웬디 C. 오티즈 지음, 조재경 옮김 / 카라칼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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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숨겨뒀던 이야기들을 전부 다 풀어놓는다면 지구는 터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야 한다고, 그녀들의 이야기가 쓰여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이 땅이 전부 불태워진다고 해도. 여성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하고 침묵한다. 필요 이상으로.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진짜 자기자신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 힘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계속해서 살았으면 좋겠다.



<기억의 발굴>은 웬디 C.오티즈가 자신이 겪었던 그루밍 성범죄에 대해 쓴 회고록이다. 열 세살 중학생이었던 웬디는 또래보다 성숙했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소녀였다. 영어 교사 제프 아이버스는 그녀에게 특별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웬디는 어딘가 잘못됐다는 희미한 경고등에도 그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간다. 사실 이 관계는 제프가 권력상의 위계를 이용하여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폭력을 벌인 명백한 범죄다. 그러나 취약한 상태에 놓인 웬디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Excavation. 성인이 된 웬디가 과거의 일기들을 바탕으로 기억을 캐내어 꾹꾹 눌러쓴 회고록. 놀랍도록 솔직하고 대담하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럽다. 쓰는 이도, 문장 속 웬디도, 읽는 이도 전부. 그러나 과거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제대로 알고자 했던 웬디는 꿋꿋하게 제프와의 기억들을 발굴해낸다. <기억의 발굴>은 그녀가 ‘어딘가 잘못됐다‘는 과거의 흐릿한 경고등을 다시 꺼내어 작동시켜보는 지난한 과정이다.



내가 웬디였다면, 알콜 중독자 엄마와 단 둘이 살면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자아를 가진 -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중학생 소녀였다면 과연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선생님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그 사람을?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정면으로 마주보게 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극악한 자기 혐오가 스며들지 않을 수가 없는 작업이다.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제대로 똑바로 서술하고자 하는 저자의 태도가 페이지마다 드러난다. 대단하다. 진실의 힘.



덧. 자연스럽게 린이한의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떠올랐다. 출판사 블로그에서 읽은, <팡쓰치>가 전지적 시점으로 쓰였기 때문에 더 분석적이고 노골적이며 직접적이라는 문장에 공감한다. 나 또한 책 출간 이후 목숨을 끊은 린이한과 아이를 낳고 삶을 계속하고 있는 웬디의 경우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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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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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의 여성이 있으면 열 가지의 페미니즘이, 백 명의 여성이 있으면 백 가지의 페미니즘이 있다는 말. 같은 여성이지만 다른 상황에 놓인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윤이형의 <붕대 감기>에는 나이도 직업도 사연도 성격도 전부 다른 여성들이 등장한다. 같은 학교를 나온 친구인 진경과 세연을 중심으로 해미, 은정, 지현, 경헤, 채이, 형은, 명옥, 효령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치 이어달리기처럼. 혹은 시뮬레이션처럼.



<붕대 감기>는 결국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하는 소설이다. 저자는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중점을 둔다. 결론을 내리는 것은 결국 독자의 몫이다. 나는 ‘가능하다‘고 말하겠다. 다만 나와 당신이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럼에도 서로를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혐오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 또한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만이 사랑에 성공할 수 있다. 자매애도 마찬가지다. 같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가진 수많은 다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그 다름이 부딪힐 수 있음을, 그래서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상처들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내민 손을 거둬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또 다시, 기꺼이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기를. 나도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덧붙여- 소설집 <작은 마음 동호회>에 이어 계속되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더 섬세해지고 깊어지는 윤이형의 세계가 나는 너무 소중하다. 나는 이 작가를 이렇게 잃을 수가 없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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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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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최진영 작가의 단행본을 모두 읽었다. 하나만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구의 증명>이다. (그 다음은 근소한 차이로<해가 지는 곳으로>) 이 소설, 사람이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그만 먹어버리겠다는데, 이토록 아름다워도 되는 걸까.



남자와 여자. 구와 담. 함께일 때 완전한 그들. 연인, 혹은 또 다른 나. 이 지리멸렬한 생을 함께할 단 한 명의 동반자. 두 사람.



그런데 구가 죽었다. <구의 증명>은 구를 꼭꼭 씹어먹으며 상실을 견디는 담의 이야기다. 구가 살아있었으며 구와 담이 사랑했다는 증명이다. 그리하여 종내는 구와 담이 진실로 하나가 된다.



둘이서만 완전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구와 담의 세계를 무너뜨린 것은 사회다. 돈이다. 빚이다. 가난이다. 구를 죽인 것은, 담을 홀로 남긴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다. 구와 담은 아주 아주 천천히 하나-사랑의 세계에서 둘-고독-상실의 세계를 지나 다시 하나-사랑의 세계로 돌아온다. 180여 쪽에 걸쳐서.



나는 너의 구, 나는 너의 담, 나는 너의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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