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빛
백수린 지음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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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여름’이 들어가는데 여름이 가기 전에 읽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고서도 계속해서 읽기를 미뤄온 것은 왜일까. 아마도 저자의 전작(<폴링 인 폴>과 <참담한 빛>)이 나에게 먹먹함을, 빛이 바래다 못해 응고된 감정들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편 ‘시간의 궤적’을 각별하게 읽었던 기억과 이번 책을 먼저 만나본 이들의 호평에 기대어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백수린 소설가의 <여름의 빌라>.

한 문장 안에 얽힌 표현들이 아름다워 한참을 머무르다보니 다 읽기까지 몇 주나 걸렸다. 어떤 작품을 읽다가는 오랫동안 숨을 고르기도 하고 또 어떤 작품을 읽다가는 ‘와 정말 좋다!’ 하는 탄성을 내뱉기도 했다. 따뜻한 햇볕이 스며드는 오후에 공기 중에 천천히 내려앉는 먼지들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은 소설집이었다. 아주 느린 곡조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발레리나를 오랫동안 바라본 것도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시간의 궤적’,’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흑설탕 캔디’다. 특히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삶이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거대한 체념’이라는 표현 앞에서 도저히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그 표현 덕분에 가끔 이 단편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허물어진 주택의 골조 사이사이를 거닐던 그녀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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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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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링킹>을 읽고 나서 그녀의 다른 책을 갈급하게 찾아봤던 날이 선연하다. 한 권의 책을 읽고나서 그 책이 너무나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나머지 저자의 이름을 기억하게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 드문 작가들 중 한 명이 바로 캐럴라인 냅. 그녀의 유고 산문집 <명랑한 은둔자>가 출간되었다. 명랑한 은둔자라니.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표현이 사실은 너무나 정확하게 본질을 꿰뚫는다는 것을 아는 나는 제목을 보자마자 한참동안 기분이 좋았다. 나 자신 또한 또 한 명의 명랑한 은둔자이기 때문이다.



냅의 글은 솔직하다. 그의 글에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사람만의 솔직함이 있다. 도입부에서는 조금 느슨하게, 그냥 가볍게 공을 툭 던져보는 식이지만 이내 투명하고 정확하게 다음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이야기의 흐름에 정신없이 빠져들다보면 마치 냅이 옆집에 사는 가장 친한 친구처럼 느껴진다. 가끔은 허공에 대고 맞장구를 치고 싶어진다. ‘맞아. 나도 그래!‘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장 없이 담백하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의 글에는 자의식이 크게 느껴지지 않아 항상 놀랍다. 이렇게 다 써도 되는거냐고 그에게 묻는다면 냅은 명랑하게 어깨를 으쓱하고 다음 글을 써내려갈 것만 같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된 이 책에서 가장 열렬히 읽은 챕터는 맨 앞에 실린 ‘홀로‘다. 고독과 고립의 차이, 외로움과 수줍음, 자신의 일상을 홀로 온전히 꾸려나가는 기쁨에 대한 글들이 모여있다. 절대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으로서, 고독을 사랑하지만 고립되고 싶지는 않은 사람으로서, 마음과는 달리 항상 쭈뼛거리는 수줍은 사람으로서 정말 깊이 공감하며 읽었다. ‘지적이고 유려한‘ 캐럴라인 냅의 글을 나는 앞으로도 몇번이고 계속해서 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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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셜리 클럽 오늘의 젊은 작가 29
박서련 지음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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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는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가 아닐까.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말이다. 좋아하는 것이 같다던지. 하물며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호주 멜버른에는 셜리들이 모인 ‘더 셜리 클럽‘이 있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모인 셜리들은 서로 돕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노년의 호주 여성으로 구성된 이 모임에 임시-명예-회원이 새로 가입하게 되었으니,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설희다. (그녀의 영어식 이름이 셜리) 호주의 셜리들은 피부색과 나이가 다른 새로운 설희(셜리)를 기꺼이 자신들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한 장의 음반을 듣는 것 같은 구성이 인상적이다. 설희가 만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총천연색으로 표현되는 것도 재미있다. 호주라는 낯선 나라에 덩그러니 놓인 설희이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에 매일을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인다. 급기야는 보라색 목소리를 가진 S를 향한 사랑이 솟아나기까지한다. 달콤한 풍선껌같은 그런 사랑. 그래, 결국에는 사랑이다. 설희의 여정을 따라가노라면 연결이나 우정과 같은 단어들을 지나 결국 사랑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사랑을 믿고 싶어진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다면. 네임차트 사이트에 내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집계된 것만 해도 약 6000명. 과연 이름이 같은 6000명의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더 셜리 클럽‘을 만나고 나니 안될 것도 없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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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힘 (리커버 에디션) - 최상의 리듬을 찾는 내 안의 새로운 변화 그림의 힘 시리즈 1
김선현 지음 / 8.0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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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주일동안 이 책을 얼마나 자주 들춰봤는지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그림의 힘‘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너무 직관적어서 거부감이 들었다. 슬쩍 펼쳐본 페이지에서는 그림 하나 당 설명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다. 베스트셀러 리커버판이라는데 그냥 그저 그런 힐링 서적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처음 읽을 때 챕터 별 소제목을 무시하고 그림만 살펴본 것도 그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 나는 이 책을 시도때도없이 펼쳐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총 다섯 챕터(일, 관계, 돈, 시간관리, 나 자신)로 이루어진 이 책에는 퀄리티 좋은 도판이 가득 실려있다. 처음에는 종이에 인쇄된 그림이 얼마나 감동적일것인가 의심했지만 정말 감동적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며 그림만 감상했을 때도 좋았지만 옆에 실린 글을 읽었을 때는 감탄했다. 그저그런 위로의 말이 적혀있을거라는 나의 섣부른 판단과는 달리 한 문장 한 문장이 미술치료 전문가가 세심하게 고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화가와 그림의 역사에 대한 소개는 물론 그림의 느낌과 색채가 주는 효과 등이 풍부하다. 글의 분량이 짧은 것 또한 그림 감상을 돕기 위한 저자의 배려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는 것을 절절히 깨닫고 있다. 그러나 말이 쉽지 감정을 들여다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그림을 들여다보며 느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백마디 말보다 하나의 그림이 주는 위로가 큰 법이니까.





(* 출판사로부터 도서와 소정의 원고료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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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거짓된 삶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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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페란테가 돌아왔다. 신작 <어른들의 거짓된 삶>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나폴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시작이 남달리 강렬하다. 10대 소녀 조반니가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추함과 사악함의 대명사인 빅토리아 고모를 닮았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 것. 뒤이어 그녀가 어른들의 위선을 하나둘 깨달으며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 나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조반니의 변덕스러운 심경에 대한 묘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보통 폭풍과도 같은 사춘기를 지날 때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 갑작스럽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후회할 것이 분명한 행동을 섣불리 하게 되는지. 저자는 1인칭 시점을 빌어 조반니의 꼬이고 꼬인 감정들과 부모에 대한 이중적인 마음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때문에 모나고 울퉁불퉁한 조반니의 성장기를 애틋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어른들을 절대적으로 여겼던 어린 시절을 지나 그들의 이중성과 기만을 알게되고, 점차 그들과 비슷한 어른이 되어가는 여정이 조반니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의 거짓된 삶>은 앞선 페란테의 소설들과 비슷한 면이 없지 않지만 여전히 재미있다. 오히려 이 소설만의 매력적인 요소가 곳곳에 가득하다. 강렬한 매력으로 조반니를 압도하는 빅토리아 고모라는 캐릭터, 지식인 부모의 딸로 태어나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불안을 표현하는 조반니, 여러 사람을 넘나들며 때로는 사랑의 증표가 때로는 파국의 씨앗이 되는 팔찌까지. 더욱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조반니의 행동에 경탄과 안타까움과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들어, 어서 다음 편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엘레나 페란테가 영원히 소설을 썼으면 좋겠다.



+) 한겨레에 실린 페란테의 서면 인터뷰가 정말 좋으니 이 책을 다 읽고 인터뷰도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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