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여름’이 들어가는데 여름이 가기 전에 읽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고서도 계속해서 읽기를 미뤄온 것은 왜일까. 아마도 저자의 전작(<폴링 인 폴>과 <참담한 빛>)이 나에게 먹먹함을, 빛이 바래다 못해 응고된 감정들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편 ‘시간의 궤적’을 각별하게 읽었던 기억과 이번 책을 먼저 만나본 이들의 호평에 기대어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백수린 소설가의 <여름의 빌라>.한 문장 안에 얽힌 표현들이 아름다워 한참을 머무르다보니 다 읽기까지 몇 주나 걸렸다. 어떤 작품을 읽다가는 오랫동안 숨을 고르기도 하고 또 어떤 작품을 읽다가는 ‘와 정말 좋다!’ 하는 탄성을 내뱉기도 했다. 따뜻한 햇볕이 스며드는 오후에 공기 중에 천천히 내려앉는 먼지들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은 소설집이었다. 아주 느린 곡조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발레리나를 오랫동안 바라본 것도 같다.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시간의 궤적’,’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흑설탕 캔디’다. 특히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삶이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거대한 체념’이라는 표현 앞에서 도저히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그 표현 덕분에 가끔 이 단편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허물어진 주택의 골조 사이사이를 거닐던 그녀의 모습을. www.instagram.com/vivian_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