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백수린 옮김 / 미디어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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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 소설을 읽을 때는 신중해야 한다. 마음 상태를 세밀히 살피고 뒤라스의 세계로 진입해도 괜찮은지 판단하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한다. 이는 지난여름 <파란 눈 검은 머리>를 집어 들었다가 마음 상태가 그야말로 삽시간에 풀려버린 실타래가 되어 수습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린 경험 이후 새기는 다짐이다. (한강 소설을 읽기 전에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진 않겠다고 스스로 각오를 다지는 것과 비슷하다.) 하여 도서관에서도 책장 앞에서도 뒤라스 소설 앞에 자주 망설였었다. 오늘은 감당 가능한가? 아니 넣어둬. 이런 루틴. 나는 매번 스스로의 마음 상태를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했다.



그러니 며칠 전 <여름비>를 읽기 시작한 건 나로서도 놀랄만한 일이었다. 스스로를 파악하는데 매일 낙제하는 내가 드디어 ‘뒤라스를 읽어도 되는 상태’라는 판단을 내리다니. 오진이 분명하다 싶었지만 실용서에 치여 메말라가는 나는 시급히 안락한 소설의 품으로 되돌아가야만 했기에 그냥 읽기로 했다. 길지 않은 분량이라 부담도 적었고, 마음이야 단단히 붙잡으면 되는거고.



뒤라스가 4개월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 집필했다는 <여름비>. 소설 속에는 파리의 소도시 비트리에서 살고있는 열두 살 에르네스토가 등장한다. 그는 읽는 법을 배운 적 없으나 읽는이고, 신의 존재를 탐구하고 성찰하는이며, 순수한 사랑에 경도된이다. <여름비>는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그리게하는 이야기이며, 삶과 죽음, 가난과 무지, 순수와 열정에 대한 이야기다. 에르네스토의 말은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앞뒤가 맞지 않는 설정들은 이 소설을 읽는데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문장을 읽으며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그대로 붙잡으면 된다. 그건 바로 아름다움과 쓸쓸함이다.



여름비. 푸르른 생명으로 가득 찬 한여름에 하늘에서 쏟아지는 거센 비를 떠올린다. 곧이어 쨍하게 타오르는 여름의 해를 그려봐도 좋으리라. 그러니까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사그라질 것들. 이 소설을 쓰기 전 뒤라스가 생과 사를 오갔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므로 모든 것을 안다. 모든 것을 알기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인생.



더없이 흡족한 선택이었다. 연이어 뒤라스의 소설을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이 소설을 여러번 읽어도 재차 만족스럽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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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 빅토리아 알렌의 생존과 가족, 특별한 믿음에 관한 기록
빅토리아 알렌 지음, 박지영 옮김 / 가나출판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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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이었던 소녀가 패럴림픽 수영 금메달을 따고, 미국 최고의 스포츠 채널에 입사하고, 끝내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두 다리로 걷기까지 했다. 살아있는 기적, 빅토리아 알렌의 자서전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꾸며낸 이야기도 이처럼 극적일 수는 없겠다. 이 세상에 기적이 어디 있느냐며 미심쩍은 마음을 품고 책을 읽기 시작한 나지만, 이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적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임을. 이 책은 기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빅토리아 알렌이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또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신하는 이 말이 명백한 진실임을 빅토리아 알렌의 삶이 증명한다. 진짜 위기는 자기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할 때 온다. 4년 만에 식물인간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빠르게 되찾으리라 다짐하며 스스로 ‘잃어버린 것들이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가 아니라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에 집중하며 당장의 할 일들을 해치웠다. 기적이라 불리우는 모든 성과들은 그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그는 그저 스스로를 믿고 해야할 일을 했다.



그러나 기적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의 삶이 장밋빛으로 물든 것은 아니다. 문제 상황은 끝이 없다. 그의 경우,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뒤에도 통증은 계속되었고, 금메달을 딴 뒤에는 장애 등급 부적격 판정으로 선수 생활을 그만둬야 했고, 걷기가 가능해진 뒤에는 오랫동안 ‘생존자의 죄책감‘에 시달렸다. 결국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고통과 절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뿐이다. 빅토리아 알렌은 언제나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저항하고, 정복하는‘ 것을 택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예상치 못하게 태도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었다. 삶을 대하는 태도,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 기적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빅토리아 알렌의 기적은 그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을 떠올린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키는 용기와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라는.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바꿀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키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특히 각자의 힘든 상황들 속에서 기적을 만들고 싶은 이들에게 이 이야기가 뜻깊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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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사이드 프로젝트 - 본업도 있고, 부캐도 있고 자기만의 방
최재원 지음, 김현주 그림 / 휴머니스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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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프로젝트. 다른 말로 하면 부캐 만들기. 본업은 그대로 두고 남는 시간에 좋아하는 일을 가볍게 시작하면 그것이 바로 사이드 프로젝트다. 유튜브, 공부, 바텐더, 바리스타 등 무엇이든! 경우에 따라 사이드 프로젝트로 수익 창출이 가능할 수 있고 그 수익이 본업을 압도하게 될 수도 있지만, 사이드 프로젝트의 가장 큰 묘미는 부캐를 통해 일상 속 즐거움과 자신감을 얻는데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재미없게 느껴질 때, 스스로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탐구하고 싶을 때 그냥 쓱 가볍게 시작해보는 것이다.



귀여운 일러스트로 무장한 <나의 첫 사이드 프로젝트>는 성공적인 사이드 프로젝트의 여정을 마치 게임 스테이지처럼 구성한 에세이다. 쉽고 재미있게 쓰여져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나의 부캐는 무엇일까‘, ‘나의 부캐를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지침서인 셈이다. 책 속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저자 본인의 사이드 프로젝트 경험담과 후반부에 실린 보너스 인터뷰들이다. 실제 사례들을 접하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감이 생겼다. 게다가 이 책 자체가 저자의 또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라고.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미 내 안의 부캐가 백서른명쯤 완성된 듯 뿌듯함이 몰려왔다. 그러나 동시에 본캐를 제대로 챙기기도 힘든데 부캐까지 키워야하나 싶어 부담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물론 이 책의 요지는 ‘부담가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 일을 사부작사부작하며 스스로의 가능성을 키워보자!‘지만, 각자의 성향에 따라 정말로 몸과 마음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균형을 잘 잡아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포인트들을 꼭 기억하자. 규모를 줄여 아주 작게 시작할 것, 바로 실천 가능한 수준의 계획을 세우고 당장 행할 것, 짧고 성실하게 도전해볼 것. 무엇보다 내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선에서 가볍게 시작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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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핍 윌리엄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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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권위를 풍기는 사전들 옆에 자리한 에즈미의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을 생각해본다. 여성들의 언어를 받아적은 단어 쪽지들이 잔뜩 쌓여있는 그녀의 트렁크를, 불길에 타들어가는 단어 쪽지 ‘릴리Lily‘ 를 붙잡으려는 어린 에즈미의 손길을 떠올려본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은 사전편집실에서 단어들과 함께 자라나는 에즈미의 성장소설이자, 실제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찬기를 따라가는 역사소설이다. 또한 정식 사전에서 누락된 여성들의 언어를 다시 조명하는 작품이다.



책과 종이와 펜으로 가득찬 사전 편집실 ‘스크립토리엄‘은 내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공간에 가까울 것 같다. 그 작은 공간에서 팔랑거리는 단어 쪽지를 향해 손을 뻗는 에즈미를 상상하면 괜히 흐뭇해진다. 사전을 만들기 위해 단어를 수집하고, 편집하고, 묶어내는 수고로움을 행하는 사전 편집자들은 분명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이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스크립토리엄‘의 풍경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사전 편집실이라는 작고 폐쇄적인 공간에서도 기꺼이 소외된 단어들을 길어내는 에즈미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기특하고 놀랍다. 에즈미는 권위를 앞세우는 사전 편집자들과도 다르고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시위에 참여하는 서프러제트들과도 다르다. 그는 기꺼이 세상으로 나가 잃어버린 단어들을 찾아낸다. 형체없이 사라져가는 여성의 단어를 붙잡아 종이 위에 새겨둔다. 에즈미의 여정과 중첩되는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애틋했던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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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 - 트레이더 김동조의 마켓 일기
김동조 지음 / 아웃사이트(OUTSIGHT)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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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신뢰할만한 안목을 지닌 분들이 이 책을 올해의 책이라 말씀하시곤 했다.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 부제는 ‘트레이더 김동조의 마켓일기’.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저자가 블로그에 기록한 일기가 모여있어, 단상집이라고 봐도 좋겠다.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에 대한 저자의 견해와 그 자신의 삶의 원칙이 빼곡히 담겨있다.



저자의 문장은 서늘하고 건조하지만 자기만의 원칙을 찾은 이만의 뚜렷함이 서려있다. 산전수전을 겪고 비로소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이의 냉정한 결단이 느껴진다. 분명한 삶의 원칙을 가진 이의 일기를 읽어내려가는 일이 이토록 동기부여가 될 줄은 몰랐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있을지라도 삶의 원칙을 세워야한다는 데는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뽑아낸 키워드는 ‘의사결정력’이다. 트레이딩이든 어떤 분야든 삶의 핵심 역량은 의사결정력이고, 이건 스스로 세운 원칙들에서 나온다. 흐물흐물한 일상을 살고 있는 나에게는 최근 읽은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울림이 큰 책이었다. ‘최고의 삶이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삶의 정수만을 모아 담대하게 실행해 인생이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삶을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값진 책이다. 아, 삶과 목표, 원칙, 선택에 대한 내용이 많지만 책과 영화 이야기도 제법 나온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다독가인 그가 어떤 책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어 틈틈이 즐거웠다. (최근에 스토리에 올렸던 서평 관련한 구절도 이 책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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