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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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정전>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아홉번째 파도>가 출간되었을 때 득달같이 달려들어 읽어치웠던 날도 기억한다. 나는 최은미의 소설이 주는 감각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얼마 전 <김승옥문학상수상작품집>에서 만났으면서도!) 무심하게 이 책을 집어들었고, 그야말로 완전히 덫에 걸려버렸다. 현대문학 핀시리즈 <어제는 봄>.



덫에 걸려버렸다는 것은 이 소설의 특정 장면이 나의 트리거를 눌렀다는 의미다. 순전히 개인적인 일이다. 너무 방심했다. 얇은 책이니 가볍게 읽어치울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등단 후 10년간 소설을 쓰고 있는 정수진. 그녀가 쓰고 있는 소설은 과거의 트라우마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소설을 10년째 붙잡고 있는 것이고 반드시 완성해야만 한다. 과거와 트라우마와 소설과 딸과 남편으로 굴러가는 정수진의 일상에 이선우 경사가 등장한다. 소설에 자문을 해주기 위해서다. 딱딱하게 경직된 정수진을 조금씩 달라지게 만든 존재가 이선우다.



정수진은 자기 자신을 증오한다. 더 정확히는 아버지를 빼닮은 자기 자신을.(맞다. 정수진의 트라우마는 그녀의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 어쩌면 정수진은 자기 자신을 향한 증오를 해갈하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계속 써야만 한다. 등단 이후 10년동안 아무런 작품도 발표하지 못했지만 정수진은 쓰는 존재, 작가다. 나는 작가도 무엇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안다. 덫에 걸려버린 첫번째 이유.



정수진과 이선우의 만남. 정수진과 이선우가 공유하는 것들. 그 둘은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서로를 알아봤다. 비슷한 경험, 다른 해석. 어쩌면 서로 닮은 사람. 나는 엉뚱하게도 어떤 이와 하루종일 자리를 옮겨가며 이야기를 나눴던 날을 생각했다. 그 사람과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두번째 덫에 걸렸음을 알았다.



그리고 내 하루는 망했다.



그럼에도 나는 <어제의 봄>이 마음에 든다.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정수진의 문장이, 그녀의 글쓰기가, 나아감이 마음에 든다. 트리거가 눌린 것은 나의 문제이니 내가 해결해야 할테고. 아, 또한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최은미의 소설을 읽을 것이다.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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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나오키 1 - 당한 만큼 갚아준다 한자와 나오키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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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터너가 필요해 급하게 빌려읽은 <한자와 나오키>. 화제가 되었던 동명의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다. 1권은 은행원 한자와 나오키가 억울한 누명을 통쾌하게 해결한다는 이야기다. 두 권을 빌렸으나 한 권만 읽고 그만 읽기로 했다. 빨리 읽히고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나에게는 한 권으로 충분하다.



은행 및 금융업에 관심이 있는 이들 혹은 직장 생활을 다룬 소설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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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
게일 허니먼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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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영화 <오! 루시>(2017)를 떠올리던 참이었는데. 오늘 막 읽은 소설이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



혼자서 삶을 꾸려가는 서른살의 여성 엘리너. 그녀는 매일 같은 옷, 같은 루틴으로 일상을 꾸려가며 일주일에 한 번 엄마와 전화하는 것을 빼면 만나는 사람도 없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녀가 일반 사람들하고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계속 읽어보니 엘리너는 실제로는 깊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음에도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나야?)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술술 읽힌다. 전반부는 블랙코미디인가 싶을 정도로 웃으며 읽었다. 엘리너가 갑자기 락 뮤지션이 자신 일생의 사랑이라고 선언하며 기행을 펼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망의 중반부. 엘리너는 우연히 직장동료 레이몬드와 함께 이웃 노인을 돕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일상이 조금씩 달라진다.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과 선의를 알게 된 엘리너는 점차 스스로 세운 벽을 허물게된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반전. 엘리너의 과거.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엘리너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서서히 어루만지며 결말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단번에 해결!’이 아니라 조금씩, 서서히. 한 사람이 제대로 치유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문제를 인지하고 스스로의 편이 되는 것이 가장 먼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변의 사람들과 전문적인 도움 또한 필수적이다. 이 책이 그 사실을 간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불현듯 ‘우리는(아니, 나는.) 소외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스스로에게든, 타인에게든, 사회에게든. 소외가 아닌 연대가 필요하다. 나 자신부터 스스로에게 단단한 사람, 더 나아가 주저없이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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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짐승아시아하기 문지 에크리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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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마어마하다. 문지에크리 시리즈로 출간된 김혜순 시인의 아시아 여행기, <여자짐승아시아하기>. 김혜순 시인의 작품을 처음 읽는 나는 순식간에 압도당해버렸다. 40년간 시를 써온 시인. 올해 그리핀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관습적으로 해석돼온 한국 여성시의 풍경과 문법을 비틀고 타파한(<피어라 돼지> 출판사 소개)˝ 시인. 그녀가 아시아의 몇몇 나라를 여행하며 ‘여자/짐승/아시아-하기‘에 대해 썼다.



이 책을 여행기라고만 소개하기는 힘들 것 같다. 수록된 글들 속에는 정확한 지명이 언급되지 않으며 관광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도 없다. 다만 문장들이 마치 시 또는 산문, 아니, 시-산문처럼 시인의 사유를 따라 거침없이 흘러간다. 시인이 보고 경험하고 느낀 것들이 그녀 자신만이 가능한 방법으로 쓰여졌다.



‘여자하기‘,‘짐승하기‘,‘아시아하기‘. 나에게 주어진 정체성(과 그 개념들)에서 탈피하여 한 발자국 건너 바라보기. 쉽지 않았지만 문장을 더듬더듬 읽으며 시인의 사유를 따라가려 애썼다. ‘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아.‘ 이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기를 여러번. 책을 읽으며 쉽게 만날 수 없는 귀한 순간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표현하기는 어렵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하기‘,‘짐승하기‘,‘아시아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되어졌기에?



시인은 ‘여자짐승아시아는 가능성의 세계‘이며 ‘성별, 인종, 국가를 막론하고 여자짐승아시아 할 수 있다‘고 썼다. 여자의 몸으로, 짐승과의 외밀성을 공유하며, 아시아를 여행하는 시인. 그리고 그 이상. 어쩌면 당신도 <여자짐승아시아하기>를 읽는 동안은 여자짐승아시아하기를 할 수 있을지도. 눈의 여인과 검은 여신과 쥐와 붉음의 세계에서 당신이 아닌 그 무엇이 될 수 있을지도. 아니, 근미래에는 우리 모두가 인간짐승이 되어있을지도.



도대체 이 책이 어떻다는건지 모르겠다고? 나도 내가 뭐라고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일단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직접 여자짐승아시아하기에 도전해보시기를. 어떤 글은 직접 체험되어야만 하고, <여자짐승아시아하기>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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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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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의 단편이 한데 묶인 페미니즘 테마 소설집 <새벽의 방문자들>. <현남오빠에게>를 이은 두번째 기획 소설집으로 장류진, 하유지, 정지향, 박민정, 김현, 김현진 작가의 작품이 실려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섹스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도구로만 존재하고, 어느 집단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어린 소녀들은 ‘그루밍‘을 당하며, 노동 현장에서 여성은 평가절하당한다. 위의 것들 중 어느 것 하나 현실이 아닌 것이 없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여섯 편의 이야기 모두 마찬가지다.



어떤 이들에게는 ‘페미니즘 테마소설‘이라는 말이 불편하게 느껴지겠지만 굳이 눈에 힘을 주고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소설들이 정말 현실을 반영한 것 같은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독서가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첫번째로 실린 ‘새벽의 방문자들‘, 연대의 희망을 보여준 ‘룰루와 랄라‘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이 소설집의 독자는 여성분들이 대다수일 거라 생각하지만‘(김현진 작가노트 중에서)

‘응, 이거 네 얘기야.‘(장류진 작가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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