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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일러스트와 헤세의 그림이 수록된 호화양장
헤르만 헤세 지음, 한수운 옮김 / 아이템비즈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1학년 처음 데미안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제겐 그렇게까지 좋다,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싱클레어가 저와의 어딘가를 닮아서일 수도 혹은 그때 작은 에피소드가 뇌리에 박혀서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 구절, <알은 세계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태어내려는 자, 하나의 세계를 깨트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어쩌면 그렇게 잊혀지지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구절이라서가 아니라 아마도, 그때의 저는 아주 잠깐 데미안과 만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주 잠시요.
그리고, 다시 읽은 데미안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때는 제게 데미안의 존재가 컸다면 이번에도 다시 싱클레어가 됐습니다. 그때처럼 말입니다. 그때,
싱클레어였던 저는, 데미안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내면의 또 다른 자아를 만난 것이었는데 왜였을까 싶은 것은 그때, 작가 헤세의 글이 유난히도 "현학적"으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데미안을 읽지 않으셨다면, 스포입니다.

그곳에는 두 개의 세계가 뒤섞였다. 그 두 극단에서 낮과 밤이 찾아왔다. (본문 11p)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은 이 두 개의 세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본문 13p)
그래서, 나, 싱클레어는 계단 위의 층계참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위의 세계가 따뜻하고 양지의 세계, 내가 속했다고 생각한 "알"의 세계라면 그래서, 저 계단의 세계가 궁금했던 것이다. 낮의 세계가 아닌 바로 "밤의 세계"가 그리고 그곳의 프란츠 크레머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왜 밤으로 내려갔던가, 싶은 찰나 데미안을 만났다. 데미안. 고작 한살이 많을 뿐인데 아주 어른스럽고 그들과는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그를.
그가 해준 이야기, 카인의 표식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싱클레어가 아닌 나는, 그가 해준 이야기보다, 어째서 하나님은 카인을 살려주셨을까? 그리고 성경 어디에도 카인이 죽었단 소리가 없다. 아담이 이브가, 그리고 그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긴 생을 혹은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카인에 대한 생사의 여부는 더 이상 나와있지 않아, 데미안에게 묻고 싶다. 그의 답변이 궁금해졌다. 그는 과연 내게 어떤 대답을 할까?
두계의 세계,에서 시작해 어느새 그는 카인의 세계 아니, 데미안이 말한 카인의 표식이 무언가를 알 것 같은 그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카인의 세계,에 한 발짝 들어놓기 위해서라는 핑계인지도 모르지만 방황을 하기 시작해. 모범생에서의 경로를 이탈해, 다른 길을 가본 것이다.
그것이,
전적으로 데미안의 영향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나의 내면의 저쪽에 있는 어른이었고 혹은, 어른 내가 만나고 있는 알의 세계에서 태어나려 투쟁하고 있는 또 다른 나의 자아, 였기에. 그래서 내가 그린 그림은 나이면서 내가 아니고 데미안이면서 또 아니며 여자이면서 남자이고 또 남자이며 여자인 모든 것의 양면성을 가진 그것, 내 집의 문장(文裝)의 매_ 인 새가 되기 위한 날갯짓을 하려는 내 저 깊숙한 곳의 또 다른 세계, 깨어나야 할 세계의 지점에 서 있었다.

층계참에서, 어두운 곳이 두렵기만 했을까 싶으면 또 아니었다. 아마도, 의외로 따뜻한 곳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겨울의 지하는 햇볕은 들어오지 않으나 그 나름대로 온기가 기묘하게 맴돌고 있었으니까. 설령 그곳이 "금지된 세계" 일지라도. 그리고 만난 피스로티우스. 그 이름이 묘하게 파우스트를 연상케 했다. 그는, 어쩌면 데미안이 좀 더 나이를 먹으면 그리 되지 않았을까, 싶었던 모습도 투영돼 있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혹은 그다지 오래지 않은 시간 후, 다시 만난 데미안이었다. 바로, 그가 보내온 답장인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를 받은 뒤, 한동안 만나지도 편지를 하지도 않았던 그의 벗, 데미안을. 그들의 공통분모 혹은 그가 싱클레어를 또다른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인도할 때의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그들 사이의 금기가 돼 있었다. 바로 유일한 어둠이라 여겼던 프란츠 크레머에 대해서.
아프락사스.
신이면서 악이면, 명암을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의 이름, 그리하여 알이 깨어지고 난 후, 날아가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니, 아프락사스 후엔 또 무엇이 기다릴까? 알은 깨져야만 한다. 그것은 다른 세계 즉,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서다. 저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나와의 조우, 그것이 데미안이었고, 데미안은 나며, 내가 싫어하는 그 프란츠 크레머 역시 어둠의 세계의 나일 수밖에 없다. 아니, 내가 싫어하는 나의 비열한 모습이 그리 그려졌고 데미안은 내가 원하는 이상이자, 내 자아였다. 나는, 그렇다면 싱클레어인가 아니면 데미안인가?

그 피비린내 나는 유혈의 위업은 오로지 내면의, 산산이 파열된 영혼의 발산이었다. 새로 태어날 수 있기 위하여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고, 죽으려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한다. (본문 246p)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어두운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이젠 완전히 데미안과 같은, 내 친구이자 인도자인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본문 250p)
거울,
내가 나를 보면서도 내가 또 아닌 것. 내 오른손은 그의 왼손이라는 것.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분명 다르지만 나인 것을. 그래서, 데미안은 내 친구이자 나인 것이다. 나의 내면의 두려움이 불러온 내면이 있다면 그는 나를 인도해주기 위한 또 하나의 알이란 세계에서 깨어나 나온 세상에서 다시 또 다른 세상의 통로로 안전하게도 혹은 위험하게도 나를 불러내는 또 저 깊숙한 내면의 나, 그리고 어느새 그는 파티스로티우스의 말을 빌려 혹은, 에바의 말을 빌려 내게 말한다. 나의 또 다른 모습을 하고, 내가 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