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계획적인 사람이고, 거기에 따른 행동도 충실한 사람이다. 그는 그녀를 선택했고, 사랑하게 했고, 손에 넣었다.
그녀는 그를 만날때까지 주변에 친구가 없었다. 유일한 친구였던 반려 동물은 곁을 떠났고, 유일한 남자는 할아버지뿐. 그녀는 외딴 섬에 갇혀, 숨 막힐 듯한 집에 갇혀, 사랑을 주지 않는 할아버지에게 갇혀 18년을 자랐다. 그녀는 순진무구한 소녀지만 세상을 아주 모르는 쑥맥은 아니다. 남자와 여자를 알고, 예의를 알고,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어필할 줄도 안다. 그리고 사랑도 안다. 책 속에서 보는 로맨스에 백마탄 왕자를 꿈꾸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것이 사랑인줄 알며 자신도 사랑에 빠지길 기대한다. 고립된 그녀는 탈출을 꿈꾸고, 성자들 보다 많은 이야기거리를 가져오는 죄인들에게 더 흥미있어한다.
"아녜요, 절대로 죽고 싶진 않아요. 인생을 만끽할 때까지는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누구나 행복해 질 권리가 있고요. 저도 언젠간 행복을 <차지할>거에요. 젊음과 건강과 자유는 즐기도록 주어진 것이고 저도 너무 늙어 그것들을 만끽할 수 없게 되기전에, 온갖 즐거움을 맛보고싶어요"
"법과 관습 따위는 전 몰라요. 여론 같은 건 경멸해요. 수치심과 두려움은 사양하겠어요. 누구나 자기 식대로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책에서 보니까 죄인들이 성자들보다 언제나 더욱 흥미롭던데요. 그리고 현실에서도 착한 사람들이란 지긋지긋하게 재미없어요. 흉악해지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행복하고 싶어요. 저의 인생은 짧고 신나는 것이어야 해요. 즐거움에 대한 대가도 필요하다면 치러야지요"
<치명적 사랑. 1장>
그와 그녀.
로자몬드는 템페스트를 처음 만나는 순간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정말 그랬다. 템페스트는 로자몬드를 처음 본 순간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도 그녀를 사랑하기로 했다. 로자몬드는 순진하지만 자존심 강하고, 자유로운 그녀식으로 템페스트를 사랑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템페스트는 교활하고, 악랄한 그 다운 방식으로 로자몬드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결혼을 했으니 그들은 행복했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랬다. 심부름꾼 소년이며 말동무였던 리토가 템페스트의 아들이며, 그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고 아직 이혼 과정을 거치지 않은 유부남이었는데 그로 인해 자신과 결혼이 불가능했던 그가 거짓 목사를 세워 가짜 결혼을 한 것임을 그녀가 안 순간까지는. 게다가 그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남자를 일부러 병에 걸리게 만들어 죽게 한다.
템페스트의 모든 것을 알게 된 로자몬드는 엄청난 배신감에 몸을 떨며, 그가 모르게 집을, 그의 곁을 떠난다. 그녀는 홀로 도망쳐 허름한 집으로, 거기에서 다시 유명 배우였던 오노린에게로, 그리고 수녀원으로 도망을 친다. 그녀는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린다. 그가 자신을 찾아낼까봐. 그가 자신을 찾아서 데려갈까봐. 로자몬드는 도망친 수녀원에서 고해성사를 한다. 그를 아직도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네" 그녀는 대답을 한다.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템페스트의 자신에 찬 웃음소리가 울린다. 그녀는 절망한다. 그가 자신을 찾아냈음에 그리고 아직도 그를 사랑함에 절망한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것만 같다. 처음에는 말동무였던 순진한 리토가 죽은 줄 알았고, 자신을 도와주던 이그네이셔스 신부와는 그를 사랑함에도 그의 조건상 함께 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백작의 청혼을 수락하지만 그는 템페스트의 혀에 놀아나 미치광이었던 전처의 망령에 몸을 떨며 로자몬드를 떠났다.
템페스트는 충실한 하인 뱁티스트를 통해 그녀를 차례로 찾아낸다. 그리고 여러차례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녀도 자신을 사랑함을 확인 한다. 이혼이 마무리가 되면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을 할 것이라며 그녀를 설득 한다. 그는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원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손에 넣었다. 늘 그랬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의 결합을 위해 방해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그녀의 곁에 머무는 남자들을 제거 한다. 거짓 소문을 내어 그녀를 미치광이로 만들고, 배를 침몰 시켜 죽이려고한다. 하지만 지금 이상한 상황이 전개 된다. 자신을 사랑하고, 마땅히 자신의 곁에 있어야 하거늘 로자몬드를 잡았음에도 그녀는 그를 보지 않는다. 그녀는 당연히 그를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확실한데 그래서 자신도 그녀를 사랑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녀는 끝없이 도망가고, 그는 끝없이 그녀를 쫓는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성자보다 죄인을 더 좋아하던 그녀가 착한 사람이 아닌 악인이었던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순진한 그녀가 아니라 그를 떠나고, 그를 외면하며 다른 남자와 함께 하길 원하는 그녀를 보며 그의 사랑은 더 확고해진다.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그와 함께하는 아니 함께 하려하는 신부가 탄 배를 들이 받아 침몰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찾아간 그녀의 집에서 그는 발견한다. 그녀의 싸늘한 주검을. 자신의 옆에 서서, 자신과 함께 행복해야할 그녀는 자신이 쫓을때보다 밝은 미소로 죽어있다. 그가 그녀를 죽였다. 그리고 그것은 드디어 그녀를 웃게 했다. 곁에는 사랑과 인내가 담긴 얼굴의 신부가 있다. 자신이 죽이려 했던 그 신부가. 끝이 아니다. 템페스트는 결심한다. 그녀는 나의 것이다. 단도를 꺼냈다. 그는 그녀를 쫓았다. 그게 어디든 상관 없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이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였고, 그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다른 이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그녀는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그는 치명적이었다. 그를 연적을 바라보며 단도를 가슴에 꽂는다.
"처음에 나의 것이었으니, 마지막에도 나의것. 무덤 속에서도 나의 것이야"
2.
<치명적사랑>은 자주 가는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됐다. 작은 아씨들이 나오기 전 출판사의 의뢰로 쓰여졌다는 <치명적사랑>은 당시에 발표 되기에는 너무 무리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퇴짜 당한다. 아니 써달라더니, 쓰고 나서 출판사를 위해 개작까지 했다는데 퇴짜? 하긴 이혼과 불륜과 재혼. 그리고 성직자와의 사랑인데. 지금도 충분히 자극적인 소재이니 그때는 오죽했을까. 올콧이 글 속에 그때의 환경을 현실적으로 말해주며, 살짝 비꼬는 부분을 보면.
"템페스트씨, 아저씬 세상을 많이 아시죠. 그리고 어쩌면 할아버지 때문에 저에게도 관심이 좀 있으시죠. 그래서 감히 여쭈는 것인데요, 이 지겨운 생활을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될 때, 제가 자유롭고 마음 편하게 밥 벌이를 하려면 무얼 하면 될까요?"
"돈 없는 여인들이 대개 그렇듯이 가정교사가 되어서 고된 일로 아까운 청춘을 보내는 것입니다" 간단한 대답이었다.
"저는 아는 것도 없고 또 너무 어린 것 같애요."
"배우가 되어보십시오. 꽤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겁니다"
"재주가 없어요, 재주가 있다해도 우선 돈이 없구요"
"바느질 하는 여인이 되어 건강과 활력을 다 바쳐 <띠와 섶과 솔기>를 박는 일은 어떻겠습니까?"
"싫어요. 전 바느질은 질색이고 잘할 줄도 몰라요"
"그럼 당신으로 하여금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게 내벼려 두다가, 당신이 그것에도 싫증이 날 때쯤 죽어버릴 돈 많은 노인과 결혼하는 게 좋겠습니다"
맙소사. 돈 많은 노인과 결혼이 최후의 선택이라니. 남일 같지가 않다. 당신들의 조상이 그랬고, 예전 우리의 조상이 그랬다.
연재물로 쓰여진거라 24장으로 나뉘어져있는데 한장마다 글이 길지 않고, 문체도 단순해서 읽기 쉽지만, 그래서 의외로 빨리 읽히지만 크나큰 재미를 얻기는 힘들다. 내 기준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품이라는. <작은 아씨들>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던 내게 이 책은 꽤나 큰 선물이었다. 고전은 고전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읽는내내 난 극악의 찌질이 템페스트와 막장 막장 하면서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드라마의 남주가 겹쳐졌다. 그는 돈이 많고, 여자를 끄는 매력이 있으며, 성격은 최악인데 거기에 잔인하다. 그는 사랑하면서 집착하고, 집착하기때문에 사랑한다. 거짓투성이인 그의 삶에 단하나 정직한 게 있다면 그녀에 대한 마음일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든지 집착이든지. 그는 그것때문에 그녀를 찾는데 인생을 소비한다. 홀린 것처럼 그녀를 찾았고, 그녀를 설득했다. 그리고 결국엔 그녀를 따라 죽음을 맞는다. 그는 그럴 운명이었다.
로자몬드는 운명에 순응하지 않았다. 뛰쳐나갔고, 용감히 싸웠다. 그녀를 자극하는 그의 새치혀에 농락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템페스트를 사랑했었고, 사랑했다. 그를 사랑해서 바라던 행복을 <차지해>버렸지만. 그것 때문에 힘들었다. 그녀의 인생은 처음 1장에서 말한 것 처럼 되었다. 그녀는 인생은 짧았고, 불안과 절망에 빠지긴 했어도 한때는 신났었다. 그리고 그 즐거움에 대한 대가를 치뤘다. 죽음으로. 그녀는 죽음으로 편해지는가 싶었지만 그는 그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망치는 내내 궁금했다. 그가 그녀를 찾고 있는 건지. 이상한 일이다. 그녀는 그를 피해다니지만 그가 자신을 찾는지 궁금하다니? 궁금하면서 불안했고, 불안한 와중에 또 다른 사랑에도 눈을 돌린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에게 잡힌다. 피하지만 피해지지 않는. 혹시나 그녀도 그걸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내치면서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그에게 웬지모를 승리감을 맛보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를 사랑했으니까. 그녀의 첫 사랑이었으니까. 거짓이긴해도 한때는 그녀의 남편이었으니까. 그의 사랑에, 그가 자신을 찾아냄에 정말적이었다고 해도 한편으로는 뿌듯했을것이다. 봐라. 이 남자가 나를 이렇게 사랑한다. 그녀는 죽음에도 자신을 따라오는 그에게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 남자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걸 내가 아니까.
3.
어떤 사랑.
내가 아는 사랑은 죽음까지는 갈 수 없다. 내가 아는 사랑도 분명히 집착이지만 그걸로 그가 괴롭지는 않다. 왜? 그에게 나는 같이 있어도 아웃 오브 안중이니까. 그가 보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니까. 그는 부담스러우면서 나를 만나고, 난 그걸 알면서 늘 부담스럽게 만든다. 그도 나도 결코 편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랑하니까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게 되면 집착을 하게 되고, 집착을 하게 되면 미움이 생긴다. 내가 아는 사랑은 그렇다.
비가 온다. 오늘은 비가 와서 다행이다.
4.
나는 가수다를 보는데 박정현이 가왕 조용필의 노래를 부른다. 그녀의 특유의 새소리로 우아하게 예쁘게 부른다.
그녀는 노래하면서 작곡한 사람의 마음이 되어 본다고 한다.
발음 문제로 가사 전달력에 지적을 자주 받았던 박정현인데. 이때는 정말 가사가 귀에 쏙쏙 박혔다.
"잘했어. 정현아" 하며 조용필에게 칭찬을 받고 싶다고 하던데. 말해 주고 싶었다.
가왕 조용필이 얼마나 이 노래를 담담하게 부르는지. 그럼에도 묻어나오는 분위기가 얼마나 감동을 주는지.
그리고 너의 목소리와 호소력에 엄청난 칭찬을 하실거라고. 가왕이라면 그럴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