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냐? 여동생이 직장에 가져갔던 책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난 이불을 덮고 야근을 위한 억지 잠을 청하던 중이었다. 뭐? 정리를 좀 하자고 책을 꽂을 공간을 찾으며 말한다. 여동생이 가져 온 책은 추천을 해달라는 그녀의 말에 건네준 책들이었고, 페이퍼 잡지를 포함해서 모두 4권이었다. 여동생이 정리가 필요하다고 한 건 가지고 온 책을 말한 게 아니었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 들쑥 날쑥 꽂혀진 책을을 말하는 것이다.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하고 있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일년 전부터. 1년 전 광주엔 폭설이 내렸다. 이사 하기에 좋은 날이라며 날을 받아온 날이었고, 불 필요한 비용을 줄이자며 작은 집에서 트럭을 빌려와 손수 이삿짐을 날라야 했던 이삿날이었다. 불행이도 어머니와 여동생은 직장을 핑계로 나가버린 뒤라 인원이 다섯에서 셋으로 줄어버린 상황이다. 난 야근을 끝내고 물건을 담은 상자들과 먼지들 사이에서 쪽잠을 자는 중이었는데 당시 아직 집에서 놀고 있던 남동생과 오후근무였던 아버지는 낑낑대며 냉장고를 나르고 있었다. 계속 자. 좀 자고 일어나서 짐 옮겨라. 아버지 말씀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도저히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다섯 중 두명이 줄어 세명인데 거기에 나까지 잠을 핑계로 빠지면 이 집의 남자 둘은 등과 허리가 굽어 제대로 생활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난 아직 책들을 싸놓지도 않았다.

남동생이 말했다. 누나 책은 누나가 다 옮겨. 착한 녀석인데 일이 많으니 목소리가 갈라진다. 옮기지 않으면 날 영영 안 볼 수도 있다는 협박이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한달 전부터 마트와 가게를 돌며 모아 놓은 종이상자와 신문을 이용해 책 꾸러미를 만들었다. 상자에 담으면 부피도 크고, 무거워 옮기기도 힘들다. 한 손에 들기 쉽게 끈으로 묶어가며 쉴새 없이 책 꾸러미를 만들었다. 많지는 않지만 결코 적지 않은 갯수의 책들을 손수 트럭에 담고, 새집에 도착해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내 방까지 옮겼다. 남동생 도움이 약간은 필요했는데 자신의 예상보다 많은 책에 짜증이 제대로 났나보다. 말은 안하는데 코에서 뜨거운 김이 푹푹 쏟아져 나온다. 전 집의 부서질 것같은 책장을 버리고 새로운 책장을 구입했다. 아무 특징 없는 책장인데 오로지 튼튼할 것 같아 구입한 책장이었다.

꾸러미를 풀어 정리를 시작했다. 애초에 계획은 장르별로, 구입한 날짜 순서대로 꽂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꽂기 시작했다.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일본 소설부터 차례로 정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놈의 잠이 문제였다. 아니 애초에 이런 날 이사 날짜를 받아온 것이 문제였고, 이사 비용 아끼자고 극심한 체력 소모를 하게 만든 것도 문제였다. 짜장면 먹어라~ 아버지 말에 고개를 저었다.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며 책을 꽂는다. 책장에 책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남는 공간에 쌓인 책들을 쑤셔 넣다시피 한다. 이제 곧 시집도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책들을 다시 가져가서 정리를 해야하니까. 라고 생각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년 전 나는 일년 안에 결혼을 할 줄 알았다. 애인도 없었음에도! 정리 안 된 책장은 이사 온 이후로도 구입한 책들로 인해 더 엉망진창이 되었다. 공간이 보이면 무조껀 쑤셔넣고, 없으면 공간을 만들고, 포화 상태의 책장을 두고 이젠 바닥에 쌓기 시작했다. 정리가 필요해. 일년 전에 생각을 했고, 그 뒤로도 새 책이 올때마다 결심을 한다. 이번 쉬는 날 정리를 하자.

그리고 결국엔 직장에 다녀온 여동생이 결단을 내린다. 정리가 필요해. 그게 한달 전 일이었다. 야근 전 억지 잠을 청하고 있었으니 내가 일어나 정리를 하는 것은 기아 타이거즈 외야수 이용규 선수가 롯데 자이언츠 이대호 선수를 삼구 삼진 먹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놔 둬. 쉬는 날 내가 정리할게. 내가 정리해야 돼. 아냐. 동생이 말한다. 일단 넌 일하러 가. 어떻게 해볼게. 내 책도 있으니까. 응? 저기에 여동생 책도 있었던가? 일어나 샤워를 하고 왔더니 여동생은 이미 작업 시작이다. 가방에 늘 가지고 다니는 내 전용 약을 꺼냈다. 검고 달디 단 초코렛 약이다. 아무말 없이 초콜렛을 여동생 손에 쥐어주고 집을 나섰다.

다음날 아침 방에 들어서니 무언가 훤하다. 정신 없던 책장이 한결 시원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비록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크기 별로 정리 되었지만. 이것도 어디야. 어차피 난 결혼을 할 것이고, 이건 모두 가져가서 다시 정리를.... 또또 난 당최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문자를 보냈다. 고생했다. 그리고 잠들었는데 일어나니 문자가 서너개가 한꺼번에 와 있다.

나 좀 기분이 그렇다.
내 책은 다섯권밖에 없었어.
다 로맨스 소설이야. 
나 진짜 기분이 좀 그래.
나 책 좀 주면 안돼?
아 나도 지금부터 책 사서 모을거야.
너 정말 부럽다. 진짜 부럽다.

웃고 말았다. 난 책을 모은지가 10년이 넘어간다고, 내가 책 살땐 그런건 왜 사냐고 빌려읽으라고 네가 타박했다고, 한번 읽고 말걸 사면 아깝지 않냐는 네 말에 그래도 내 책이야라고 대답하니 무슨 책이 있는지나 아냐? 라고 네가 물었다고, 난 물론 완벽하게 알 수는 없지만 거의 모든 책을 알고 있다고 말했더니 네가 거짓말 마라고 했다고, 다 읽지도 않으면서. 네 말에 난 책 읽는 것도 좋지만 책 자체를 더 좋아해. 그리고 난 내게 있는 책은 꼭! 읽어. 시간이 걸릴 뿐이야라고 말 했었다고, 그렇게 말 해주고 싶었다.

오늘 아침 여동생은 출근을 하면서 나 책 사야 하는데 추천 좀 해줘. 라고 말했다. 추천이라니 추천이라면 내가 읽은 책들인데 읽은 책들은 모두 네 앞에 책장에 꽂혀져 있다. 여동생이 아~ 라고 말했다.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읽고 좋다고 했던 책들. 지금 한창 화제가 되고 있다는 책을 몇 권 불러주었다. 추천이 아니라 그런 평을 듣고 있다고 설명을 했다. 난 아직 읽지 않아 추천은 힘들다고. 동생은 알았다고 했다.

일어나서 책장을 봤는데 어이가 없다. 분명히 한달 전에 여동생이 정리를 했는데 지금 이 모양이다.

 

어지럽다. 뒤죽박죽. 꼭 내 마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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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1-04-08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꽂이가 부럽네요. 저도 내년에는 이사갈 것이라는 대책없는 기대감에 책꽂이가 부서져 나가도 그냥 방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버벌 2011-04-08 13:28   좋아요 0 | URL
처음 이사 결정되고 시장을 뒤졌어요. 싸고 튼튼한 것으로 사기 위해서요. 투박하니 제 스타일이에요. 그런데 뭐가 먼저일지 이사가 먼저일까요? 새로운 책꽂이가 먼저일까요? ㅎㅎ

다락방 2011-04-0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기별로 정리한다는 건 정말 새로운 정리방식 이네요. ㅎㅎ

제 남동생은 해가 바뀔때마다 제게 이렇게 말해요.

"이번 해에는 누나가 결혼할 것 같아. 그런 예감이 아주 강하게 들어."

저는 크게 웃으며 너 작년에도 그랬거든? 이라고 말하거든요. 그러면 이렇게 말해요.

"작년보다 더 강한 느낌이야."

그리고 결국 오늘날에 이르렀어요. 하하하하

버벌 2011-04-08 13:28   좋아요 0 | URL
어쩜 저희집과 같은 이야기를.. ㅎㅎ 조금 다르긴 하지만 제 여동생은 제가 선이나 소개팅을 나가면 늘 그렇게 말해요. 이번에는 웬지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 그리고 결국 오늘날에 이르렀어요. ㅋㅋㅋㅋ

pjy 2011-04-08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봄맞이로 정리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님의 책장과 비스므레합니다~ 그때의 깔끔함은 온데간데없이ㅋㅋ;

버벌 2011-04-08 13:2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깔끔함은 일주일도 못 가더라구요. 저리 쌓아두고 또 다시 포화 상태가 되면 아마 제 여동생이 다시 작업을 시작 할 겁니다. 그 전에 제가 시집을 가던지.... 하지만 후자는 거의 이루어질 가능성이... 갑자기 급 우울. ㅠㅠ

마노아 2011-04-08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키별로 꽂아 놓았을 때는 사진 안 찍었어요? 무척 예뻤을 것 같아요.
우리집 책 올려진 모양새랑 비슷해요. 그래도 전 가로로 꽂을 때는 제목은 보이게 올렸어요.
아직 그 정도 여유 공간은 있어요.^^;;;

버벌 2011-04-09 00:18   좋아요 0 | URL
크기별로 꽂아두었는데 이상하게 출판사 별로 꽂아둔 것처럼 보이던데요. 그럴수밖에 없지만요. 아쉽게도 그때의 사진은 찍어두지 않았는데 혹시나 여동생이 작업을 시작하면 이번에는 꼭 찍어 놓을게요. 그런데 제가 정리한 것보다 크기별로 정리한 여동생 스타일이 보기엔 더 좋은... 다만 책 찾기가 조금 힘들어서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