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묘사, 위트 있고 짧은 대사, 빠른 전개’—하드보일드 소설을 표방하는 소설이지만 살인 사건과 폭력, 음모를 파헤치는 탐정이 등장하는 소설들과 다르게 택배기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인 소설입니다. 정체불명의 주인공이 택배기사로 취직해 물류창고의 컨테이너 숙소와 배달지인 ‘행운동’을 오가며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그려내는 모습은 오히려 휴먼 드라마나 시트콤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직접 택배기사로 일하는 작가가 그려낸 택배업에 대한 디테일한 설정과 주인공의 태도—담백하지만 자신만의 기준과 윤리, 유머를 추구하는 모습이 어우러져 몰입감을 더하는데요 ‘부탁을 하면 부탁을 들어주고, 명령을 하면 반항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통쾌해 계속해서 읽게 됩니다. ‘한 장을 넘겼을 때 재미가 없다면 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한 장을 넘겼다면 분명 오늘이 가기 전에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될 거라고 자신한다’는 추천글이 과장이 아님을 한 번 더 인증합니다.
각각의 상황에 처한 여덟 명의 여자 주인공의 에피소드를 엮은 소설집입니다. 애인이 아닌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정아’, 고시 뒷바라지를 하던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정은’, 유부남을 만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영진’, 성추행 때문에 회사를 그만 둔 ‘지윤’, 바바리맨과 마주친 ‘화정’,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며 찌른 칼에 살해당한 ‘수연’… 친구들에게서 혹은 뉴스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 실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소설 속 이야기들은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을 떠올리게 합니다.하지만 에필로그까지 읽고 나면 이야기 너머의 작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천역덕스럽고 능수능란한 이야기꾼, ‘페더급의 속도감과 헤비급의 파괴력’을 갖춘 아웃파이터, 작가의 묘사와 입담이 이어지다 마지막 한방에서 넉다운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시대를 담은 좋은 소설이자 무엇보다 재미있는 소설, 김현진 작가의 소설을 추천합니다.
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되어서. 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네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지금은요?"나이라도 날로 먹고 싶은데 그마저도 꼭 비싼 비용을 치르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손에 쥔 건 어쩐지 싸구려 같고, 시간에 사기당한 기분이죠. 어떡하겠어요? 그게 멍청함의 대가인 것을, 하지만 누굴 탓할 일은 아니죠. 누구도 그리살라고 등을 떠민 건 아니니까."
여유를 만드는 일, 스스로의 마음에 틈을 내는 일이 점점 더 소중해지고 있다. 쉬는 것이 죄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여유를 능동적으로 찾는 일은 언뜻 뒷걸음질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유를 낼 때에야,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한발 물러섰을 때에야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는 일도,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도 가능해진다. 여유가 나면 사람들은 보통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는 등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 이는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유가 날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여유를 내면 그 자리에 의지와 절박함이 들어선다. 여유를 낸다는 것은 다른 것을 할 수도 있는 시간을 나로 향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