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성당 1
일데폰소 팔꼬네스 지음, 정창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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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명하거늘, 이 순간까지 소작농들이 지켜야 했던, 정당하고 적법한 것이 아닌 그 밖의 의무사항 역시 폐기한다. 아울러 내 영지의 주민들에게 천명하거늘, 누구나 자신의 빵을 구울 수 있는, 누구나 자신의 가축에 낙인을 찍을 수 있는, 누구나 자신의 연장을 준비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다. 모든 여자와 어머니들, 그대들에게 천명하거늘, 영주의 자식들에게 젖을 먹이는 행위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다."

 

베르나뜨 에스따뇰의 결혼식 날이다. 아름다운 아내를 얻은 그는 큰 잔치를 마련했다. 이웃과 친지의 축하 속에서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영주가 나타났고 그는 말했다.  "에스따뇰, 난 영주로서, 영주의 권리로 네놈의 아내와 초야를 치르기로 결정했느니라."
이 날부터 그의 삶은 그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당연하게도 아내와는 돌이킬 수 없는 어색하고 안타까운 사이가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그는 다시 희망을 가졌지만 영주는 그의 희망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아내는 창녀로서 세상을 떠돌게 되고 그는 자식을 안고 도망자가 된다. 자식에게만은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게 할 수 없었던 그는 도시로 가서 도시의 자유시민이 되기로 결심한다. 바르셀로나에서 살고 있는 여동생을 찾아 몸을 의탁한 베르나뜨는 아들 아르나우의 자유만을 바라며 아무런 욕심없이 살았지만 운명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억울한 오해와 비뚤어진 욕심, 귀족들의 잔혹함이 더해져 그는 사형당하고 아르나우는 복수의 칼을 간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는 베르나뜨의 아들 아르나우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흐름을 탄다. 아르나우는 아버지를 빼앗고 자존심을 짓밟고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은 귀족과 사제들에게 복수한다. 그리고 자유와 행복을 쟁취한다. 당연히 그 안에는 귀족과 종교인들의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욕망과 악의로 가득한 편견이 만들어내는 암흑이 그려진다. 14세기 스페인의 농노들은 살고 있는 땅의 영주에게 속한 노예로서 그 어떤 권리도 가질 수 없는 위태로운 존재였다. 영주들은 하인의 재산 일부분을 승계했고, 간통한 여자의 재산 일부분 혹은 전체를 차지했고, 자식 없이 죽은 소작농의 재산 일부를 위임받았으며, 마음대로 소작농을 학대하거나 그들의 물건을 차지할 수 있었다. 영주들의 땅에서 화재가 일어나면 소작농들이 배상해야 했고, 베르나뜨의 일에서 알 수 있듯 영주는 소작농의 아내를 함부로 차지할 수 있었던 초야의 권리 또한 지니고 있었다. 힘없고 가난한 민중들이 의지할 유일한 안식처인 종교도 그들을 외면했다. 사제들은 귀족들과 함께 특권을 지키고 더 큰 힘을 가지기 위해 무지한 사람들을 선동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공포정치에 한몫을 담당했다.

 

스페인에서 공전의 히트를 이루어낸 이 역사소설을 통해 학교에서 개략적으로 배우는 유럽 역사에서 알 수 없었던 민중들 삶의 비참함이나 따뜻함을 알 수 있었다. 소설이긴 하나 작가노트에서 알 수 있듯이 뻬드로 3세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당시의 관습법 등을 참고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라 작품 안에서 그려지는 민중들의 삶이 당시에 실재했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다의 성당』은 분량이 상당한 장편 역사소설이다. 이런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강력한 서사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그것을 지니고 있다. 번역문이라는 걸 감안해도 묘사는 한결같고 문장은 투박하다. 그렇지만 탄탄하고 감정을 모두 이입할 수 있는 서사가 그런 단점을 압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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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함께한 그해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박광자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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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타넨은 도시를 떠났다. 아내를 떠났다. 직장을 팽개쳤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토끼와 함께 핀란드의 아름다운 산천을 떠돈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평범한 도시인 바타넨은 아무렇지 않은 '듯' 살고 있었지만 정말 괜찮았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연한 기회에 일상을 벗어버리고 과감히 숲으로 걸어 들어갔으니까. 그가 일상을 벗어났다고 해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는 너무도 평범하다. 도시인이자 생활인인 누구나가 일탈을 꿈꾸지 않는가.

 

바타넨을 숨 막히게 하는 것은 그를 둘러싼 도시와 도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활 전반이었겠지만 당장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던 건 아내와 직장이었을까. 그는 아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흉한 옷을 사는 습관이 있었다. 흉측하고 쓸모없는 옷들을 사서 얼마 입지도 않고 금방 싫증을 냈다. …집 안은 여성지가 추천하는 온갖 무취미한 상품으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대형 포스터와 불편한 소파가 공간을 차지해서 움직이려면 곳곳에 부딪칠 정도였다. 다양한 물건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연초에 아내는 임신을 했지만 신속하게 유산해버렸다. 아이의 침대가 살림살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침대 때문에 유산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타넨에게는. 그는 기자라는 자신의 직업을 향해서도 한숨쉬고 있다.
[그의 직업은 그럴듯한 것이었다! 그가 만드는 잡지는 온갖 불공정한 일을 보도한다면서 막상 사회의 근원적인 병폐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침묵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시키는 일만 하면서 비판적인 지적은 포기했다. …경영자가 어떤 기사를 기대하는지를 별 볼일 없는 영업 담당자가 전해주는 상황이었고, 그에 맞추어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잡지는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아는 것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희석되고 더러워지고 경박한 오락거리로 변조되는 것이었다. 정말로 멋진 직업 아닌가!]

 

그래서 우연히 자신이 타고 가던 차로 달려와 부딪친 토끼와 함께 1년의 시간을 숲에서 숲으로, 호수에서 호수로 방랑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사건을 감당해야 했으며, 더불어 많은 부조리한 범죄-그에게는 22개의 범죄 목록이 달렸으니-를 뒤집어 썼다. 아내와 직업과 함께 한 도시에서의 생활에 그가 얼마나 진저리를 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위에 인용한 부분 외에는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가끔 작은 소도시에 나와서도 갑갑함을 느끼며 얼른 숲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와 토끼를 보면, 그가 이미 야생 토끼랑 같은 환경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바타넨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특별히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평범한 도시인이다. 도시인은 누구나 자연과 일탈을 꿈꾼다. 물론 도시의 삶을 외면하고 숲으로 걸어 들어갈 용기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바타넨이 숲으로 들어갈 만큼 남보다 더 절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좋은 기회, 토끼라는 황금의 인연을 만났고 그래서 모두가 꿈꾸는 자연의 삶을 맛볼 수 있었다.

 

『토끼와 함께한 그 해』는 절박하게 못 견디게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득 문득 뒤통수 어디쯤에 와서 '똑똑' 손기척을 주는, 그 달콤한 일탈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였다.

뒤집어 쓴 범죄 때문에 그는 수감되었고, 탈옥했고, 누구도 그의 행적을 모른다. 그는 자연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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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머니
이시다 이라 지음, 오유리 옮김 / 토파즈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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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시대고 돈의 시대다. 성실이니 노력이니 도덕이니 하는 옛 시대의 덕목들은 말 그대로 '낡아빠진 구호'가 되어 이제는 공허한 외침조차 만들어낼 수 없다. 매주 발표되는 로또 한 방에 인생역전을 노리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대박'이란 단어는 한국인의 기본 어휘로 오늘도 바쁘게 여기저기를 부유한다. 부자가 되는 것, 돈을 거머쥐는 것 말고는 꿈이 없는 사람들의 시대다. 아이들에게 꿈이나 소원을 물어보면 열에 여덟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답한다. 부자가 되어서 뭘 할 것인가를 물으면 그 대답이란 것이 아무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조악하기 그지없는데, 이는 한 밑천 만들기를 평생토록 소원하는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돈의 시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만드는 땀방울을 밀어내고 '하이 리스크에 하이 리턴'을 외치며 그저 부자 되기만을 노래한다. 그 돈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류에 영합-'쩐의 전쟁' 운운하는 띠지는 또 뭐람-한 듯한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빅 머니』라는 제목의 이 책 역시 돈의 시대에 부자가 되는 길, 그 짜릿하게 살 떨리는 쾌감을 보여줄 뿐, 그 이상은 없다.


어디에 이력서 넣기 심히 민망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주인공 청년은 20대의 가진 것 없는 백수가 지닐, 딱 그 만큼의 비뚤어짐으로 세상을 보며 하루하루를 빠찡코에서 보내는 중이다. 꿈도 희망도, 돈도 일도 없이 지방의 부모에게 1년의 보조를 부탁하며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세상을 위해선 어떠한 도움도 되고 싶지 않다. 무리에서 떨려난, 굶주린 늑대라도 된 양 배배 꼬인 자존심에 겨우 매달려 있을 뿐. 번듯한 일자리를 여봐란 듯 꿰찬 또래들로부터 뒤처져, 갈수록 힘들어지는 내리막을 두 발바닥에 올곧이 느끼면서도 나는 남다른 존재라 맘 한켠에서 믿고 있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현재 처지란 것이 늑대는커녕 살찐 오리도 못 된다는 것을. 이쯤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은 평범한 젊은이였다, 노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데 야거(yager)는 야거를 알아본다던가. 웬 노인이 그에게 다가와 아르바이트로 비서직을 제안했다. 노인은 지하 경제에서 돈 좀 굴린다는 할아버지로-어쩐지 '쩐의 전쟁'에서 신구 할아범과 주인공이 연상되는-청년에게서 뭔가를 감지한 모양이다. 청년은 이때부터 몇 달 간의 투자전쟁에 몸을 싣게 되고 이것은 그의 인생을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다. [그곳은 근면과 성실성 같은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덕목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하는 세계다. …일단 뼈까지 시장에 담그고 나면 이쪽 세상으로 되돌아오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마켓을 지배하는 황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노동의 대가가 아닌, 리스크를 감수한 대가로 벌어들이는 돈에 맛이 들기 때문이다.]


『빅 머니』는 청년이 노인을 만나 마쓰바 은행을 상대로 한 투자전쟁을 치르는 몇 달 간의 이야기다. 노인은 그 시간 동안 청년에게 마켓이라는, 돈이 돈을 부르고 돈이 사람을 먹어치우는 무서운 세계를 보여준다. 노인이 마쓰바 은행을 상대로 전투를 감행하게 된 데는 해묵은 은원도 있고, 변액 융자 보험 피해자들에 대한 나름의 정의감도 있었다. 근데 그 정의감이란 것에서 좀 피식하게 되었다. 그 피해 노인들의 이야기가 슬슬 몰아치는 부분에선 '어이, 제발 정의인양 잰 체하지만 말아줘.' 라는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변했어. 한 나라의 성쇠를 판가름하는 파도가 몇 차례 지나갔네. 이제부터는 청운의 로망도, 다같이 일하고 다같이 잘 살자는 공동성장도 기대할 수 없어." 이야기는 그저 너무도 변한 오늘의 시장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생산하고 판매하여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는 경제의 한 귀퉁이에도 다리를 걸칠 수 없는 미친 시대에 '나는 마켓과 상관없어, 난 돈놀이 몰라, 투자? 그게 뭔데?' 라고 아무리 아닌 척해봤자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시장의 우산에서,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모르는 우리는 어쩌나. 그저 당할밖에 도리가 없다, 보험 피해자인 그 불쌍한 노인들처럼. 이 책을 읽으면 당하지 않느냐? 물론 아니다. 돈도, 기술도, 두뇌도, 근성도, 하다못해 체력조차 없는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당하고 살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가 흔드는 마켓의 우산, 그 우산이 만드는 그늘 아래서 웃고 울 것이다. 그래도 알고 당하는 거랑 모르고 당하는 거랑은 다르지 않겠냐고? 다르긴 뭐가 달라, 마찬가지지. 눈물 콧물 뽑는 건 마찬가지지.


마쓰바 은행의 주가가 77엔에 이르고 노인이 매수 주문을 냈을 때야 증권거래법 위반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그렇다 치고 그 청년은 정말 그 때까지 거기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걸까? 그렇담 그는 마켓이라는 마약에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있었음이 분명하고, 그게 아니라면 작가가 그 뻔한 결말로 이끌기 위해 미리 안배한 것일 텐데…… 그 결말이 너무 뻔해서 이야기는 입체감이랄까 그런 것이 없더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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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개
양쯔쥔 지음, 이성희 옮김 / 황금여우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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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정스럽고 반듯하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을 보고 '인간적이다' 라는 표현을 쓴다. 이와는 달리 거칠고 제멋대로이며 도리를 모르는 사람을 욕할 때 '개 같다' 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다. 앞서 말한 '인간적이다' 에서 그 인간이란 우리가 그렇다는 것일까? 난 당연히 아니며, 우리의 이상이 녹아든 관용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욕을 할 때 개를 들먹이는 것 또한 우리의 오만한 천성이 깃든 표현일 뿐이지 실제로 개들의 습성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 난 것 중에 싸잡아 한 마디 말 안에 구겨 넣을 수 있는 것이 몇이나 될까. 사람과 개도 그리 단순하게 나눌 수는 없다. 특히나 요즘처럼 연일 경악할 만한 사건과 범죄가 일어나는 인간세상이나, 사람대신 그 눈이 되어 평생을 사는 개의 이야기를 접한다면 무엇이 인간적이고 무엇이 개 같은 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야야 할 것이다.


『사자개』는 인간이면 마땅히 이러저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개 이야기를 읽고 왜 인간성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 여기 등장하는 사자개들 한 마리 한 마리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티베트 초원을 지키고, 초원의 사람들을 수호하는 사자개는 우선 그 겉모습부터가 다른 개와는 다르다. 티베트 사람들이 사자개를 지칭하는 썬거라는 말이 사자를 뜻한다니, 게다가 칭기즈칸의 유럽 정벌에 한 역할을 담당했고 당시 유럽으로 건너간 이들에 의해 현재의 대형 견종 상당수가 탄생했다니, 이 녀석들이 그저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개들이 아님은 분명하다. 곰이나 늑대들도 두려워하는 야수보다 더한 야수가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그 육체의 강함을 그에 못지않은 정신의 강인함으로 더욱 공고히 하여 자연과 인간을 지킨다.


이야기는 작가의 아버지가 기자로서 티베트 초원에 파견되었을 때 겪은 경험을 기자가 들려주는 형식이다. 아버지가 발령받은 시제구 초원으로 가는 길에 샹야마 초원의 일곱 아이들과 깡르썬거라는 황금빛 갈기를 가진 사자개를 만났다. 그리고 이들의 길고 긴 모험담이 펼쳐진다. 깡르썬거와 일곱 아이들은 지난 사자개 전쟁 당시 원수지간이 된 시제구 초원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시제구 초원의 영지견들을 상대하게 된다.


이를 시작으로 독자는 앞으로 깡르썬거의 반려가 될 나르, 시제구 초원의 사자개 대왕과 나르의 언니 궈르, 대왕의 충신인 회색 사자개, 양치기 개지만 야심만만한 까바오썬거, 그리고 송귀인이 복수의 도구로 기른 음혈왕까지 수많은 사자개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아버지, 티베트 사람들, 초원에 와서 공산당의 정책에 따른 포섭 정책을 펼치는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작품 안에서 주요한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된다. 작품은 이들 각자의 개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있다. 많은 개가 마치 사람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이 이 책의 매력이다.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힘이다.


이야기는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그러나 글이 유려하다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번역은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지 못하고 교정을 본 건지 의심스럽게 만드는 오타들이 끊임없이 눈에 띄었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도 사자개들은 인간을 위해 그들을 지키고 그들의 원수를 꺾기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인간을 살리기 위해 몸의 피 한 방울까지 젖으로 만들어내는가 하면, 무리의 왕을 죽게 한 원수조차도 그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도울 수밖에 없다. 그들의 피가, 태고부터 기억된 영혼 속 인자가 그들을 그렇게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초원의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숭배된다. 초원의 사람들에게 사자개는 가뭇없이 사라지는 하찮은 생명이 아닌, 신의 현신과 같은 존재다.


깡르썬거가 온갖 고난을 이기고 초원의 사자개 왕이 되는 것, 아버지가 많은 어려움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사자개를 구하고 초원의 평화를 끌어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박진감도 넘치고 재미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진정한 인간성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고 있어 유익하기도 하다. 어찌 보면 단순한 주제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간성이란 것이 사라져 가는 현대에 개를 통해 인간을 말하는 역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힘이 있다.


이야기의 진행은 답답하고 때때로 부조리한 상황에 도달하기도 한다. 왜 저렇게 꼬여만 가는 걸까, 왜 저렇게 막무가내일까. 그러나 그것이 당시 중국의 모습이고 당시 티베트 초원의 모습일 것이다. 신과 함께하는 사람, 자신들만의 종교와 법률을 지키고 숭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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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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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흥미롭다. 정답이 없고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들이 더욱 거대해져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릴지, 신의 영역까지 도달한 인간의 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 유토피아가 펼쳐질지 알 수 없는 미래지만 그것이 창작물의 대상이 된다면 아무래도 디스토피아가 더 환영받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비극은 특유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데다 우리 마음 어디쯤에선 현실의 문제를 빚은 자신들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오늘의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세상이 지탱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일군의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기로 한 모양이다. 그들이 바꾼 세상에 조너스가 살고 있다. 환경문제, 노인문제, 빈부의 격차와 다양한 차별이 불러온 폭력과 전쟁 등 산재한 현실의 문제를 모두 제거하고 철저히 통제하여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 조너스가 사는 세상이다.
"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는 없나요? 왜 색깔들이 사라졌나요?"
"우리들이 그쪽을 선택했어, '늘 같음 상태'로 가는 길을 택했지. 내가 있기도 전에, 이 시대보다도 전에,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말이야. 우리가 햇볕을 포기하고 차이를 없앴을 때 색깔 역시 사라져 버렸지. 그럼으로써 우리는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있었지.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들은 포기해야 했단다."

 

   조너스가 사는 마을의 주민들은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가면 된다. 매해 기념식을 통해 마을에서 정해준 길을 묵묵히 걸으면 된다. 무례함을 금지하는 규칙 덕분에 타인과 반목할 일도 없다. 성욕을 비롯한 일체의 감정을 제어받기 때문에 감정적 혼란이 생길 리도 없다. 장래에 대해, 부에 대해, 행복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고민이란 것이 애초에 선택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들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날 때부터 박탈되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다. 늘 같은 상태에서 늘 평화롭게 살면 된다.

 

   조너스도 평화롭게 잘 살았다. 그런데 조너스는 사물 너머를 보는 능력을 지닌 선택받은 아이였고 12살 기념식에서 기억 보유자로 선출되었다. 前代의 기억 보유자는 조너스가 선택된 시점에서 기억 전달자가 되어 자신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기억을 조너스에게 전한다. 이들이 나누는 기억이란 '늘 같음 상태'가 되기 전, 아주 오래 전 세상에 대한 기록이다. 햇볕과 눈, 뱃놀이와 크리스마스 파티, 그리고 전쟁과 살육 같은 것들 말이다. 오직 한 사람의 기억 보유자만이 그 모든 행복하고 아름답고 무섭고 고통스러운 짐을 져야 한다. 왜? 모두가 평화롭게 고통 없이 살도록 하기 위해 아주 오래 전의 사람들이 그렇게 정했다. 조너스는 기억을 전해 받으며 오래 전의 세상을 알게 되었다. 위험하고 혼란스럽지만 아름답고 달콤하기도 하다. 감정을 깨닫고, 색깔을 보게 된 조너스는 더 이상 마을의 주민으로 평화롭게 살 수가 없었다.
"저는 사랑이라는 느낌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우리에게 아직 사랑이 있었으면 해요." 그러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그 방식으로는 마을이 잘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건 이해해요. 그리고 지금 우리 마을이 더 잘 조직되어 있다는 것도요. 어쩌면 사랑이란 살아가는 데 위험한 방식일지도 몰라요."  

 

   조너스와 그가 사는 마을을 눈으로 쫓다 보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를 에워싸고 점점 목을 조여 오는 많은 문제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범죄자에게 칩을 넣어 언제나 감시하거나 더 나아가 그의 폭력성을 제거하는 뇌수술을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빈부, 인종, 종교 등의 차이가 불러오는 많은 분쟁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일률적으로 통합해야 할까? 노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관리하고 어느 시점이 되면 그들을 임무해제 시켜야 하는 걸까?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구를 강제적으로 조절해야 하는 걸까?

 

   책은 과거의 기억을 얻은 조너스의 입을 통해 계획된 통제가 문제를 없앨 수는 있지만, 선택의 자유와 감정을 빼앗긴 인간이 얼마나 차갑고 무서운지를 보여주면서 그것이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님을 말한다. 실제로 조너스의 아버지가 쌍둥이의 임무해제식을 하는 장면은 작품에서 가장 차갑고 무도한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왜 그 상황을 이해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아마 지쳤기 때문일 테지. 생각하지 않고 바동거리지 않아도 누군가 알아서 길을 잡아주고, 서로 거리를 두며 맘 상할 일을 안 만들고, 그저 평화롭게 그저 지금에 충실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지친 사람들이 늘어가고, 세상이 계속 예측할 수 없는, 혹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언젠가는 조너스의 마을 같은 세상을 대안으로 떠올리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

 

   어떤 것이 옳은 것일까? 폭탄을 안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일까, 안전하게 통제받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일까. 아무것도 모른다면 후자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이미 혼란과 부조리와 무질서와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조너스는 나의 현실로 들어오고 싶어한다. 색깔이 없고, 눈도 비도 없는, 선택할 수 없는 자기 마을을 부정한다. 나는 그런 조너스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인간은 자기 손으로 선택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조너스를 말릴 수 없다. 그의 마지막 선택을 나무랄 수 없다.

 

   『1984』와 『시녀 이야기』를 거명한 뒷 표지의 광고 문구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까. 이야기는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고 너무 순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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