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식당 5
아베 야로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자, 오늘은 내가 얼마 전에 알게 된 식당을 하나 소개하도록 하겠어.

 

거긴 밤 12시부터 새벽 7시까진가 장사를 하는 밥집. 그래서 '심야식당'이라 불리지. 달랑 '밥집'이란 두 글자가 휘날리는 무뚝뚝한 노렌처럼 식당도 주인도 좀 그런 분위기다. 주인 눈에 그어진 상처도 그렇고 이런 가게를 연 것도 그렇고 나름 사연이 있을 거 같은데 그건 머지않아 알게 되지 않을까 기대 중. 일단 겉모습에서 풍기는 분위기로는 배철수! 살짝 배철수 아저씨 분위기가 난다. 후후후.

 

뭐 낮 12시부터 저녁 7시도 아니고 밤부터 새벽까지 여는 가게가 술집도 아니고 밥집이라니 뭔 장사가 될까 싶지만, 주인 말로는 이게 또 손님이 꽤 온다는 거다. 번화한 밤거리 한 귀퉁이에 있다는 이유도 이유지만, 뭣보다 메뉴의 특이점 때문이 아닐까? 여기 메뉴판은 수줍기 그지없으니, 밥집이란 존재이유가 무색하게도 메뉴에 올라있는 요리는 '돼지고기 된장국 정식'이 유일하며 그 외에 맥주 청주 소주 정도가 갖추어져 있다. 아, 술은 세 병 혹은 세 잔까지 만이라고. 근데 그 다음이 중요하다. 메뉴에 있는 건 달랑 하나지만 손님이 원하는 걸 주문하면 만들 수 있는 한 만들어준다는 게 뽀인뜨~! 되시겠다.

 

위치 덕분인지 영업시간 덕분인지 손님의 계층이 다양하다. 그래도 평범한 직장인보다는 야쿠자, 스트립 댄서, 성인비디오 배우, 게이, 트렌스젠더, 안 팔리는 엔카가수, 기자 등 뭔가 밤이나 새벽과 어울리는 사람들이 많다. 비엔나 소시지, 달콤한 계란말이, 양념장 끼얹은 두부, 돈가스에서부터 수박, 어육 소시지, 구운 김처럼 요리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 묵힌 카레처럼 긴 시간을 요하는 것이나 비프스트로가노프처럼 주인이 손님에게 설명을 듣고 만들어내야 하는 음식까지 손님의 면면만큼 주문도 다채롭다.


이런 걸 주문받아 내놓아야 하는 주인 아저씨는 참 바쁠 거 같지만, 웬걸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의 얘기에 귀 기울이고, 말없는 손님의 안색을 살피고, 그들의 사정과 형편을 기억하고 이해한다. 그냥 밥 혹은 안주 주문해서 먹고 마시는 걸로 끝나는 식당도 아니고, 요리 내놓고 돈 챙기는 걸로 할 일 다 하는 주인 아저씨도 아니다. 드라마 같은 데 나오는-내가 가 본 적이 없다-Bar의 베테랑 바텐더 같은 느낌을 주는 아저씨는 그래서 주인장이나 주인 아저씨보다 '마스터'라는 호칭-일본은 보통 식당 주인한테도 일상적으로 마스터라 호칭하는지 어쩐지 모르겠지만-이 참 잘 어울리는 거 같다.


근데 이 다양한 주문에서 혹시 공통점 발견하셨는가? 요리가 어째 좀 그렇지 않은가? 억수로 평범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꼭 저기 가서 주문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많다. 이 주인 아저씨의 요리가 굉장한가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단골이 새로운 손님을 데려오면 으레 하는 소리는 이렇다. "메뉴는 저렇지만 먹고 싶은 걸 주문하면 만들 수 있는 건 '대충' 만들어 주니까 뭐든 주문해." 간혹 "가게는 지저분하지만"이란 말이 붙기도 한다. 그렇게 '대충' 만든 요리는 "그저 그렇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도 흔히 있다. 그런데도 한 번 왔다간 사람은 꼭 다시 찾는 게 이 심야식당이란 말이다. 왜 그런 걸까? 왜 그런 거지?


심야식당의 손님 중에는 여름이라고 자기 냉장고에 수박을 넣어두고 먹는 사람이나, 동지나 설이라고 명절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들이 쓸쓸하고 지친, 고향을 등지거나 가족과 떨어진 팍팍한 도시생활자라는 얘기겠지. 가끔 그리워질 거다. 예전에 고향에서 먹던, 어릴 때 엄마가 해주시던, 첫사랑 그와 먹었던 그런 것들이. 그걸 심야식당에서 먹을 수 있다. 여름이 되면 가게에 '수박'이라 쓴 종이가 붙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은 주문한다. "수박!" "수박" "수박" 여름엔 역시 수박과 모기향이라는 소리가 들리면 주인은 하나 피울까요? 하며 모기향을 꺼내는 곳. 그러다 갑작스레 정전이라도 되면 아무도 화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무서운 이야기로 넘어가는 곳. 많이 만들어 남아버린 냉장고 속 카레를 맛볼 수 있는 곳.


심야식당은 가족 친구 고향 그리고 추억의 온기를 한끼 혹은 한잔에서 잠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온기는 비단 주인 아저씨만의 열연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닐 게다. 그리운 걸 그리워할 줄 아는 손님들이 함께 만든 온기일 게다. 지금은 야쿠자지만 첫사랑 그녀의 비엔나 소시지를 기억하고 있는 그라서, 사람들 앞에서 한 장도 남김없이 벗어야 하는 마릴린이지만 명란젓 입술남과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라서 이런 얘기가 가능한 거 아닐까 싶다. 여기 손님들은 새로운 손님이 와서 뭘 주문하고 먹으면 "나도"라는 소릴 잘한다. 남이 먹는 걸 보면 먹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기도 하겠지만 자기 추억을 아끼는 사람들이라 타인의 것에도 마음을 열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굴의 '프리트아 라 뷔르로와(근데 이건 뭐?)'가 어쩌고 캐비어가 어쩌고 하던 음식 평론가마저 버터밥 한 그릇과 유랑악사 고로씨의 한 곡에 두손을 번쩍 들어버리는 이곳은 심야식당. 음식 평론가를 데려온 단골이 마스터에게 말한다. "그 녀석에게 정말로 맛있는 게 뭔지 가르쳐주고 싶었어요." 추위를 많이 타는 호스테스 히토미씨도 말한다. "마스터의 요리는 특별히 맛있는 건 아닌데, 왠지 정겨운 맛이 나거든요."


'심야식당'을 만난 다음 날, 엄마가 만들어둔 들깨 시래깃국, 김장 때 넣어뒀던 김치 무, 역시나 엄마가 부쳐두신 애느타리 부침개로 차린 늦은 아침이 유난히 사랑스럽고 따시게 보이더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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