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두껍고 위압적인 책으로 엮여 '법'이라 불리기 전부터 법은 존재하고 있었다. 진화를 거듭한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 쓰고, 부를 축적했다. 그들에겐 부를 지키기 위한 힘이 필요했고 자연스레 국가가 생겼다. 그리고 인간이 무리지어 살 때부터 보이지 않게 존재하던 그것은 드디어 '법'이라는 이름의 城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성 안으로 서둘러 걸어 들어갔다. 거기 들어가면 50kg도 안 되는 플라이급도 헤비급 앞에서 자기 빵을 뺏기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고, 믿었던 성도 생각만큼 믿음직스럽진 못했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전근대적인 피해자가 전혀 전근대적이지 않은 현대에도 양산되고 있으며 그들은 '법'이라는 성 안에서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방황하는 칼날』은 일본의 '소년법'이란 걸 들어 사회의 법과 정의란 것이 과연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주인공 나가미네는 딸을 잃었다. 딸을 납치하고 강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은 소년들이다. 아직 미성년인 이들이 범인으로 밝혀져 재판에 회부된다고 해도 그들이 받을 처벌은 너무나 미약하리란 것을 나가미네는 알고 있다. 소년법이 '처벌'보다는 미성년자들의 '갱생'을 우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잠시만 사회에서 격리될 것이다. 그러나 갱생이 목적인 소년법은, 소년들이 사회에 나가 제대로 살아가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는 그것은 결국 아무 일 없었던 듯 소년들을 다시 사회로 내보낼 것이다. 물론 소년들이 사형을 받는다고 해서 나가미네의 상처와 딸의 억울한 죽음이 보상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피해자의 가족들은 그런 처벌을 통해 그들이 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피붙이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이 멀쩡하게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 때 피해자의 가족들은 세상의 정의란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딸을 죽인 범인들이 소년법의 도움(?)으로 아무런 반성이나 속죄 없이 내일을 살아가게 되리란 것에 불안하던 나가미네는 직접 나서서 범인을 죽이는 것으로 딸의 억울한 죽음을 조금이니마 보상받으려 한다. 마침 그에겐 그 기회가 왔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무너지려는 결의를, 딸을 강간하던 녀석들이 찍어둔 동영상으로 채찍질하며 복수의 길에 섰다. 살인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맞는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는 없다. 개인의 복수를 허용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지금보다 더 많은 억울함이 세상을 뒤덮을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 있는 지금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 작품은 '소년법'을 얘기하는 듯하지만 결국 법과 법을 통해 구현해야 할 정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굳이 소년법이 아니더라도 세상엔 합법적인 도둑과 살인범들이 활개 치지 않는가. 부자들의 창녀라는 몇몇 수완 좋은 변호사들은 도둑을 경제에 이바지하는 애국자로, 살인범을 무고하고 선량한 시민으로 만든다. 그 그늘에서 억울한 피해자가 태어난다. 법이 아니라고 하니 그들은 그저 참고 있어야 하는가. 물론 어떤 경우에도 법은 지켜져야 한다. 힘들여 소크라테스 씨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다. 근데 이 법이란 것이 작품에 등장하는 형사 히사쓰카의 말처럼 완벽하지가 않다. 
"경찰이라는 건 무엇일까?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찰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경찰은 법이 상처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어. 그런데 그 법이란 게 절대적으로 옳을까? 절대적으로 옳다면 왜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을까? 법은 결코 완벽하지 않네. 그 완벽하지 않은 법을 지키기 위해 왜 경찰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걸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 (534쪽) 
법은 어떻게 만들어 놓아도 완벽할 수 없다. 악의를 지닌 미숙한 인간이 하려고만 들면 언제고 필요할 때 그 완벽함을 구멍 숭숭 뚫린 무력한 걸레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그럼 또 기워서 구멍을 막아야 한다. 그렇게 법을 지키며 기워가며 이어나가는 수밖에 다른 어떤 수가 있을까.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다. 정중앙에 점잖게 앉아 그저 질문을 던질 뿐이다. 이런 불완전하고 불평등한 법 앞에서 당신은 어쩔 거지? 라고 묻는다.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복수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용서로 얻는 것이 더 많을 거라는 거다. '용서'라니…… 알맹이 없는 선언적인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