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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궁의 묘성 - 전4권 세트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능수 능란한 이야기꾼이 엄연한 역사의 한 가닥을 뽑아 자신이 가진 비장의 銀絲와 함께 빛나는 천을 짜냈다고 하면 이 소설에 대한 설명이 되려나. 작가는 작품 안에서 중국에 대한 경애를 감추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중국의, 그것도 마지막 왕조가 무너져 가는 넘쳐나는 드라마 속으로 뛰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늘의 기운을 읽는 무녀이면서도 누구보다 인간의 힘을 믿고 있던 백태태의 예언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똥을 주워 매일을 연명하는 이춘운. 가난과 절망이 그의 수호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만드는 이 소년에게 백태태는 부와 권위의 별, 세상을 다스리는 별 묘성이 너의 수호성이며 머지않아 中華의 재물을 모두 차지할 것이라는 예언을 준다. 대지주의 서자로 태어나 누구의 기대도 받지 못한 채 허허실실 자신을 가장하고 살아야했던 양문수도 하늘의 해와 달을 움직이는 진사가 되어 황제를 보필하는 재상이 되리라는 예언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다. 이 허구의 주인공들과 서태후, 이홍장, 영록, 강유위, 담사동 등 청조 말기에 실재했던 인물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아귀를 딱딱 맞추며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곁다리인지 알 수 없는,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물론이고 중요한 고비에는 언제나 백태태의 황금열쇠 같은 예언이 등장한다. 그러나 [창궁의 묘성]은 거대한 운명 안에서 장기의 말처럼 어쩔 줄 모르는 나약한 인간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운명을 개척하는 강인한 인간의 이야기다. 춘아의 삶은 운명의 하수인인 무녀의 예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눈이 오면 얼어 죽고, 홍수가 나면 떠내려가고, 가뭄이 들면 목말라 죽는, 어쩔 수 없다며 눈물 흘리는 벌레일 뿐인 자신의 삶을 운명에 맡기지 않았다. ‘희망’이라는 낯선 단어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운명에 묻혀버리기 전에 스스로 운명을 걷어차고 창궁의 묘성을 찾아 떠난다.
또 다른 주인공 양문수도 지난하나 긍지 높은 황제의 신하로서 살아가리라는 운명을 거슬러 쉬운 길이 아닌 어려운 길에 들어서서 앞으로 올 세상에서 해야 할, 자신의 의지로 만든 숙명을 기다리게 된다.
작가는 서태후를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애신각라(愛新覺羅)의 어리석은 남자들 탓에 스러지는 중국을 떠받치고, 결국 제 손으로 그 왕조를 무너뜨려야 할 모진 운명의 희생자로 그리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알 뿐이지, 그 역사적 사실을 만들어낸 動因까지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때문에 역사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이런 소설에서야 말해 무엇할까마는 좀 뜬금없이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기 그려진 서태후가 진실에 더 가깝다 하더라도.
섬나라 사람이라 그런지 어쩐지 작가가 유난히 대륙의 거대함에 경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과거시험의 과정을 세세히 말하던 부분에서는 나 역시 그 거대함에 숨 막힐 정도였다. 어쨌든 이렇게 중국에 대해서 애정과 선망을 감추지 않지만 자국에 대해서도 고운 시선을 잊지 않았다. 이토히로부미는 잠시 등장하지만 매우 중요한 인물로서 변볍파와 광서제가 우러러 마지않는 개혁의 화신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다지 과장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는 왠지…….
신의 규칙에는 끝이 있지만 인간의 재주에는 끝이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창궁의 묘성,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나도 천장에 있는 그림이 설마 사람이 그린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지요. 그건 신들이 만들어낸 하늘보다 더 푸르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푸른 창궁이었으니까 말이우."
"그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운 창궁 한가운데에 반짝이는 별 하나가 있었지."
"그건 묘성이었지요. 그런 묘성을 왜 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그렸을꼬?"
"화가는 단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신이 만들지 않은 것을 어전 한가운데에 그렸을 뿐일 거야. ‘蒼穹의 昴星’,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인간의 재주에는 끝이 없구려."
"그래. 신의 규칙에는 끝이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