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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 ㅣ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
배식한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하이퍼텍스트는 지금까지의 책에 대한 태도변화를 요구한다. 지금까지 책은 영구불변의 표상이었다. 책은 '시간을 초월하는'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역사를 초월하여 인류 모두에게 영원한 진리를 이야기 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책은 세계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며 책을 통한 글쓰기의 목적은 질서의 창조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비선형성을 특징으로 하는 하이퍼텍스트이 등장과 함께 선형적이고 순차적인 질서를 강요하는 고전적인 책은 이제 종말을 고할 시점에 이르렀다.
하이퍼텍스트는 새로운 책이다. 이것은 선형과 비선형을 하나로 통합하는 책이다. 불후의 업적으로서의 책이 아닌, 수정, 변화를 거듭하는 책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진리를 향한 의지'가 아니라 '자기극복의 의지'이다. 이제 하이퍼텍스트라는 '새로운 자루', 미래의 책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려면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웹에서 부딪히게 되는 수없는 링크들을 하나의 세계관(철학)과 연관하여 설명한 책이다. 두껍지 않은 작은 문고판이지만 현재의 기술에 대한 명쾌한 설명과 그 기술이 낳는 패러다임의 전환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아주 깔끔하다. 저자는 전반부에서 하이퍼텍스트의 기술적 구현원리를 설명하고 후반부에서는 사고를 담는 글쓰기에서의 하이퍼텍스트이 철학적 위상을 설명한다.
HT의 기술을 설명하는 전반부는 읽을 거리를 많이 제공하여 쉽게 설명한 다음에 드디어 후반부에서 바르트, 푸코, 데리다, 들뢰즈, 가타리가 등장하여 묵직한 철학이론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우연과 운명, 결정등의 몇가지 단어로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는 포스트모던의 주제를 다시한번 선포한 셈이다.
다시 말하면 저자와 독자가 직접 대화하면서 글쓰기를 완성해 나가고 그림에서 먼저 시도되었던 저자가 지닌 의미의 임의 해석과 그 결과로서의 저자 권위의 상실.. 다시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그렇게도 애타게 전도하고자 했던 해체의 철학을 다시 역설하는것이며, HT는 그 훌륭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고전적 책은 목차를 통해서 독자의 사고의 확장을 제한해버리고 창조적 두뇌활동욕구에 대한 금욕을 강권한다. 그러나 이 하이퍼텍스트 속에서의 항해 즉 독서는 '해석'이 이루어 지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이 해석의 과정은 끝이 열려있으며 언제나 불확정적이다. 이러한 사태를 '선(line)의 횡포로부터의 해방이다'라고 <책의 종말>이란 책(?)에서는 표현하고 있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가!
이 매력이란 바로 읽기의 과정안에 '해석학적 순환' 즉 새로운 정보가 이전의 익숙해진 정보를 변화시키고 이전 정보를 새롭게 만드는 순환이 내재되어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디지털마인드도 미숙하고 컴퓨터나 핸드폰.. 여러 전자도구들이 손에 채 익지도 않은 나지만, 요즘 PC에서 다운받은 책을 읽고 있고, 오가면서는 PDA를 이용해서 읽을거리를 섭취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책읽기의 형식자체가 변화한다는 사실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닌듯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굉장히 흥미롭다.
이미 종이책형식을 벗어난 많은 실험들이 행해지고 있고 여러가지 방법들이 현실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위의 글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종이책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지만 사실 종이책의 향수를 잊지못할 사람들에 의해 당분간 종이책 시장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10년전 윈도가 나와서 새로운 세상을 예견했어도 여전히 도스사용자들은 비웃으며 도스의 효용성을 주장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