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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의 딜레마
니콜라스 세로타 지음, 하계훈 옮김 / 서울하우스(조형교육)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어릴때부터 그림그리는 것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때부터 여기저기 그림구경하러 다녔었다. 첫 대학 땐 화우회라는 미술 동아리에서 그림을 그렸었는데.. 동아리방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이젤과 물감과 기름으로 범벅이된 빠레트며.. 캔버스들에 푹 묻혀서 그림을 그리고 있노라면 세상이 어찌되든 좋았었다. 송진냄새 비슷한 테레빈유 냄새와 나무냄새. 잉크냄새.. 그 냄새들을 미술관에 가면 고스란히 되맡을 수 있었다.
미술관은 하얀 회벽으로 둘러쌓여 따뜻한 할로겐 조명을 받으며 여기있노라고 말하는 그림들과 함께 음향이 부드럽고 아늑한 둥지가 되어 난 마치 어린아이처럼 마구 신기해하면서, 그리고 통로를 지나 커다란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느끼는 체험들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참 부지런히도 돌아다녔었다. 그때 내가 작품들을 보는 방식은 '내 마음속의 원근법대로..'라는 한 건축가의 지침대로였고 지금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계속 순례 비슷하게 다니다가 보면서 큐레이터(학예사)들의 전시방식에 관심이 갔다. '경험인가 해석인가'라는 부제가 붙은 [큐레이터의 딜레마]라는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도 그러하다. 이 책은 작가와 작품과 미술관과 큐레이터의관계의 변화에 대한 내용이다.
상설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 시립 미술관이나 현대미술관등의 전시방식은 마치 박물관의 도자기를 시대별 유파별로 전시해놓듯이 역사주의나 유파주의를 택해서 관람객들로 하여금 관람하는 중에 특정유파나 시대가 가진 특성들을 학습할 수 있게 하는 전시방식은 일종의 교육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것은 큐레이터가 미술관의 관객들에게 대한 미술사 교육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중요시하기때문이다.
인사동 등의 군소화랑들은 작가별로 아니면 테마별로 전시를 하고있는데, 이러한 미술관의 학예사는 작가나 특정테마에 주목하고 집중시킴으로써 우리가 큐레이터의 역사해석에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작품을 읽도록 우리의 능력을 개발시켜주는데 의미를 둔다. 물론 이것은 학예사가 작품과 작가와 관객의 관계에 대해 심도있는 고민을 하는 경우에 한해서겠지만. 이렇게 한작가의 작품군을 계속해서 마주치게 되면 이야기의 연결은 그 의미가 줄어들고 개인의 경험이 가장 중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분석보다는 제시하기를 선호하고 미술관에서 작품을 선별하여 전시하는 식별력을 행사하는 사람으로서의 큐레이터에게 주어진 전통적인 우선권을 유보한 방식이다.
이렇게 전시의 현대적경향은 작품의 병치, 분석, 그리고 해석과 같은 전통적인 미술관의 원칙은 최소화되었고 경험이 중요하게 돠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과 그것이 전시되는 장소와의 관계, 외부세게와의 분리,정보의 전달, 학습, 참배, 미술관의 교육적 목적,유파별/동향별 전시, 관람객들의 동선을 유도하여 역사의 고리에 연결,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내게끔 하며, 건축가로서, 미술가로서, 극작가로서, 무대설치가로서, 새로운 형태의 디스플레이를 고안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오래걷지않아 이내 작가의 의중을 파악하도록 하는것... 이런 고민들을 통해서 큐레이터는 예술에 개입하게 되었고 관객역시 전시의 한 축으로 작품형성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칼 앙드레는 20세기 조각의 진화를 형태로서의 조각에서 구조로서의 조각.. 그리고 마침내는 장소로서의 조각으로의 관심의 변화라고 묘사하였다. 이렇게 장소의 개념이 중요해지고 작가가 관람객의 공간과 싸우며 침투해들어가고, 마찬가지로 관람객도 작가와 작품의 장소로 침투해 들어가서.. 나아가 형태와 비례가 작품이 놓이는 장소의 특성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 조각과 드로잉을 계속 발전시켜 나간다. 그리고 큐레이터는 이러한 변화의 방향을 심중에 두고 작가와 작품과 관객과 공간을 만들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