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1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성규.허정애 옮김 / 범우사 / 1998년 4월
평점 :
품절


포드님, 우리들 열 둘을 하나로 만들어 주소서,
사회의 강 속에 있는 물방울처럼;
오, 우리들을 함께 달리게 해 주소서
그대의 빛나는 플리버처럼 빠르게

오시오, 위대한 그대여, 사회적 친구여,
열 둘을 없애 하나로 만들어 주소서!
우리들은 죽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들의 더 큰 인생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위대하신 그 분이 어떻게 오시는가를 느껴라!
기뻐하라, 그리고 기쁨 속에서 죽으라!
북의 음악 소리에 도취되어라!
나는 너고 너는 나이기 때문에.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신세계는 결코 멋진(혹은 희망적인) 세상이 아니다. 그 세계는 암울하고 아무런 변화의 가능성이 없는 세계이며, 헉슬리는 다소 시니컬하게 그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왜 이 세계를 '멋진' 신세계라고 했는가? 그것은 이 작품이 쓰여질 당시 사람들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이 - 즉 그들이 기대하는 멋진 세상이, 종국적으로는 헉슬리가 그려낸 암울한 세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작가의 위기의식 또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는 어떤 세상인가? 그 사회의 운영 원리는 무엇이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멋진 신세계의 운영 원리는 세계 국가의 모토에 잘 나타나 있다; 공동사회, 동일성, 안정. 동일성은 안정됨의 표현이며 전제이다. 그리고 안정은 가족 단위의 안정이 아니라 공동 사회의 안정에 다름 아니다. 안정을 위해서, 멋진 신세계에서는 철저한 인구 통제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인구 통제는 이 시대에 적용되는 단순한 수준의 정책적인 인구 조절책이 아니고, 아예 인간을 공산품처럼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사회 성원은 남녀의 자연스러운 결합으로 -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회의 필요에 의해서 공급된다. 그들에게 가족은 없다. 그리고 그곳은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끊임없는 행동조절과 최면교육을 받아 '사회 안정'을 해치지 않도록 심성이 조작된다.

이 멋진 신세계는 어떤 세상인가. 한마디로 말해 전체주의적 사회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해 보이지만, 그들은 실상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주입받는 것에 불과하다. 행복과 불행이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고 분별할 능력을 '과학적'으로 제거당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해 가는 것이 행복이라 한다면, 멋진 신세계에서 추구되어야 할 가치는 '공동 사회'가 정하는 것이다. 즉, 행복의 기준이 개인에 있지 않고 외부에서 주어진다. '안정'해야 하는 공동사회의 테두리도 항상 외부에서 - 통치자에 의해 정해진다.

이러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는가? 이 사회의 운영 원리에 회의해 보는 사람은 없는가? 있다. 헨리 포스터 혹은 레니나 크로운이 멋진 신세계의 전형적인 인물이라면, 버나드 막스와 헬름홀츠야말로 예외적인 개인이다. 그들이 특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독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막스는 자신이 속한 계급인 알파-플러스 급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육체적인 결함이 많았다. 그는 다른 알파로부터 조롱을 받는다. 이로 인해 그는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현재의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반면 헬름홀츠는 다른 알파-플러스보다 정신능력이 과다했지만, 이 때문에 막스처럼 자의식을 갖게 되고 고독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예외적일 뿐이다. 이들의 회의는 어떤 공동체의 행동을 유발하는,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출발하는 의식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그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대안도 없고, 계급적 기반도 없다. 막스의 경우 자신의 열등감이 해소되면 그 사회에 순조롭게 동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존은 어떠한가. 존으로 인해 그 세계의 모순됨이 극명하게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는 결국 죽음을 택한다. 야만인 보존 지역에서의 고독과 소외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던 존이었지만, 고독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사회인 그 멋진 신세계야말로 미치광이 사회였던 것이다. 늑대소녀가 발견된 것 마냥, 사람들은 그에게 모여들고, 그를 자신들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도구로 이용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깡디드 범우고전선 4
볼떼르 지음 / 범우사 / 199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에 도둑을 맞았다. 동아리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지갑을 벗어 놓은 바지에다 넣어 두었는데, 잠시 나간 사이에 도둑놈이 들어왔던 것이다. 지갑 속에 있던 현금 7만원이랑 동전, 그리고 버스 카드까지, 돈 될만한 것들은 싹 털려 버렸다. 지갑은 가져가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그저 허망하고 망연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그 도둑놈을 실컷 두들겨 패 주는 상상이나 할 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 '지갑을 털린 건 내가 그동안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일 지도 몰라.' 사실 나도 전적으로 착하게 살지만은 않았고, 그동안 이것저것 나쁜 짓도 많이 했으니 그 죄값을 하느라고 이렇게 지갑을 털린 게 아닌가?

사실, 좋지 않은 상황에 처했을 때, 혹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한번쯤은 해 볼 것이다. 이런 생각은 악을 행하면 벌받게 마련이고 선을 행하면 상을 받게 마련이라는 믿음에 닿아 있다. 『깡디드』에 나오는 철학자 빵글로스의 생각이 이러하다. 빵글로스는 모든 사물은 결과를 위해서 존재하고, 모든 것은 보다 나은 결과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모든 사물은 현재 상태 그대로이며, 다르게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선(至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사상을 제자인 깡디드에게 가르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결국 지고의 선으로 귀결되는 것인가? 과연 그 도둑은 나를 징벌하기 '위하여' 도둑짓을 한 것일까? 내가 도둑을 맞아서 정죄가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도둑놈은 도둑질이라는 또 하나의 죄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이 도둑질은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

세상 모든 것이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 세상의 모든 것들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다시 말해, 세계가 이미 정해진 원리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버린 궁극적인 귀착점을 향해 나아간다는 생각은 형이상학적 독단물에 불과하다. '운명'이니 '인연'이니 하는 말들은 현재의 상황을 합리화하려 할 때 쓰여지거나, 그에 관계된 모든 일이 끝나고 그 일을 보기 좋게 설명하려 할 때 덧붙여질 뿐이다.

노학자 마르땡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심한 불안감 속에서가 아니면 권태로운 혼수 상태 속에서 살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난 것이오.' 한편 빵글로스는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세상엔 언제나 지독한 고통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일단 견뎌 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게 되네.' 하지만 이러한 대답은 깡디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세상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질문 또한 부질없다. 세상의 모든 고난을 겪은 깡디드에게 무엇무엇을 '위해서'라는 말은 모두 알 수 없는 것. 그는 이제 그의 뜰을 경작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일차적으로 사료를 통해서 아르티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나아가서 이 책은 표면적인 사건의 이면에 있는 의미와 상황, 행위의 동기와 민중들의 심성을 살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자는 바스크 지역의 상속 관습과 툴루즈 부근의 관습을 비교하고, 당시의 기본적인 인구구조와 아르티가의 지리적 조건, 생산활동, 남성과 여성의 관계, 가문의 결합으로서의 결혼 절차를 살핀다. 또한 당시의 사법관할구역이라든지, 재판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가치 등을 설명한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그 이면의 맥락에서 파악한다. 마르탱 게르를 가장한 아르노와 피에르 게르 사이의 갈등은, 단순히 아르노가 피에르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문의 재산을 상업적으로 이용해서 재산을 늘리는 데 거부감을 갖고 있는 ― 피에르가 자연스럽게 여기는 ― 바스크의 관습과, 상속지의 일부를 파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인 ― 아르노가 자연스럽게 여기는 ― 레즈 강 계곡의 관습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베르트랑드가 의도적으로 아르노를 자기 남편으로 끊임없이 재확인하려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하는, 이른바 '이중 게임'에서 드러나는 재빠른 현실감각은, 남성만이 사회의 공적 정체성과 결합되어 있는 세계에서, 남편의 선의에 종속되어 있는 여성들이 남편에게서 바라는 것을 얻어내고 이익을 계산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이것 또한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것이다.

장 드 코라스는 아르노를 사형에 처하면서도 재판이 진행될 때부터 그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고소했던 유사한 경험을 아르노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 둘 사이에는 공통적인 프로테스탄트적 배경이 있다는 것, 당시의 귀족계급을 지향하는 법관계층으로서 익히는 에티켓이라든지 출세를 앞당기고자 하는 처세의 방법들이 아르노가 행한 '자기 형성'과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 등에서 연유한다.

그런데 이렇게 수백년 전의 사회를 기술함에 있어 문화기술지적 형식을 감행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분명 데이비스는 사료의 벼랑에 서 있다. 그러니까, 현재 자신이 검토할 수 있는 자료는 남김없이 섭렵했고, 전통적인 역사학의 연구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마르탱 게르와 아르노 뒤 틸, 베르트랑드에 대한 이야기의 일정 부분은 정황적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그녀는 '대담하게 추측하건대 ~ 했을 것이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불사하면서, 사료의 공백을 이유로 이들을 둘러싼 문화적·사회적 맥락이 빈칸으로 남게 하지 않는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많은 것들이 구체적인 사료의 엄증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녀는 단정적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데이비스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책 전반에서 느껴지는 저자 자신의 '사실에 대한 의구심' 때문인 것 같다. 그녀는 사료의 공백을 메우는 이야기를 할 때, 페미니스트적 지향을 비춘다든지, 민중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려든다든지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면모를 다분히 드러내지만, 계속해서 제기하고 자문하는 것은 진실과 창안 사이의 모호함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16세기 사회에서 진정한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결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20세기를 살면서 역사가가 진실을 추구하는 것 또한 좀처럼 쉽지 않은 일'임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장 드 코라스의 『잊을 수 없는 판결』을 두고 이것의 사료적 객관성과 투명성을 의심하여, 여러 판본을 대조하여 거침없이 문헌비평을 가하고, 재판관의 내적 갈등을 읽어낸다. 그러나 마지막에도 텍스트에 대한 의혹을 떨치지 않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사건의 진위에도 짙은 의심을 품고 있다. 몽테뉴의 글을 자세하게 다루는 것은 그 때문이다. 몽테뉴는 진실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불확실한 도구인지를 말한다. 마르탱 게르 사건의 경우 판결을 보류했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리고 묻는다. '나무 의족을 하고 스페인에서 돌아온 그 사나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운 황제들 - 모택동과 등소평 시대의 중국
해리슨 E. 솔즈베리 지음, 박월라.박병덕 옮김 / 다섯수레 / 199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뉴욕 타임즈의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했던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E. Salisbury)는 20년간의 자료 수집과 연구를 통해 8부 50장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써냈다. 여기에는 자료 출처에 대한 세세한 주석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솔즈베리는 이 책에서 현대 중국 사회를 만들어 온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하나의 사건과 그 과정에 있어 그것을 경험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면서 그 사건을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며 반복 서술하고 있다. 사건에 대한 기술뿐만 아니라 마오쩌뚱, 덩샤오핑, 주언라이, 류사오치, 린뺘오 등 현대 중국을 이끌어 온 인물들에 대한 설명도 매우 풍부하게 나와 있다. 특히 그들의 유년기와 가족 관계 등에 대한 서술은 '역사'를 공부하는 데에 있어 더욱 현실감각을 갖게 해 준다.

이 책은 최근 약 100년 동안의 중국 역사를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이라는 두 지도자를 중심으로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서 솔즈베리가 행한 자료 수집 과정은 자못 놀랍다. 수많은 문헌 자료의 섭렵이나 수차례에 걸친 중국 현지 방문은 차치하고, 가장 놀라웠던 것은 개인적인 인터뷰 자료들이었다. 영욕의 현대 중국을 살아온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한 자료 하나하나는 굵직굵직한 문헌 자료들 못지 않게 귀중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혁명가들에 대해 아주 생생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이 책은 그들의 전기적 연구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듯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중국 현대사를 이해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만용일 것이다. 이 책은 현대 중국을 만들어 온 커다란 사건들을 자세하게 서술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을 뿐이며, 그러한 사건들을 맥락화하고 심도있게 분석하는 작업은 하지 않고 있다. 저자에게 이런 책임을 물을 이유는 없지만, 여하튼 『새로운 황제들』은 저널리즘적인 색채를 띤 저작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현대 중국에 대한 지식의 양을 폭증하게 하긴 하지만, 깊이있는 이해에 도달하게 도와주지는 못한다. 이 책만 보고 솔즈베리는 광범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에는 대가급이지만, 작품 전반을 보았을 때 너무 깊이있는 해석이 부족하고 '레퍼런스 위에서만 노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학자적인 기품이랄까 진지한 고민을 엿보기 힘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혁명
G. 르페브르 지음, 민석홍 옮김 / 을유문화사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원저의 제목인 Quatre-vingt-neuf를 직역하면 그냥 '89(년)'이다. 실제로 이 책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시기는 1788년에서 1789년까지이다. 즉, 앙시앵 레짐 말기의 사회전체적 위기, 정부에서 시도한 여러 개혁정책과 좌절, 삼부회의 소집 과정에서부터,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공포되고 일반 민중들이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며 루이 16세가 베르사이유에서 파리의 튈르리로 송환되는 그 시점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이 이 책에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일반인들에게 프랑스 혁명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쓰여졌지만 1789년 혁명 발발 이후의 사건 전개 과정을 서술하기보다는 1789년의 사건들로 귀착된 당대 프랑스의 여러 정치·경제적 조건들과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집단들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혁명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그 의구심이란 르페브르의 혁명 해석에 대한 것이 아니라 르페브르, 마띠에, 소불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혁명사 해석의 '정통'에 대항해 이들의 견해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비판한다 하는 '수정주의'적 견해에 대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은 영국 사학자 알프레드 코반이 1950년대에 '프랑스 혁명의 신화'라는 강연을 행하면서 대두되었고, 그 후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해석을 고수하는 진영과 논쟁을 거듭하였다

수정주의적 견해의 내용인 즉,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마르크스적 역사발전단계도식에 종속시켜 역사적 필연에 의한 부르주아 혁명이라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실제로 전통적 해석에 의해 '부르주아'라고 범주화되는 혁명 지도 세력들은 직종에 있어서나 이해관계에 있어서나 분열되어 있었고, 또한 혁명에 폭력을 제공한 농민과 민중들은 프랑스 혁명이 구현했다고 하는 이념과는 달리 반부르주아지적이고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갖고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혁명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대표하는 르페브르의 경우, 적어도 이 책에서만큼은 수정주의가 비판하는 그러한 도식적 해석을 프랑스 혁명에 가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수정주의가 제기하는 비판의 벼리가 이미 1939년에 나온 르페브르의 저작 속에 혁명의 요소로 충분히 다루어져 있거나 그 단초로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이 책에서 프랑스 혁명을 귀족혁명, 부르주아혁명, 민중혁명, 그리고 농민혁명의 순차적이며 중층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 혁명의 필연적 조건들을 고찰하면서도 사건과 사건 사이를 매개하는 수많은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상황들의 중요성을 아울러 강조한다. 또한 국민의회 안에서의 여러 신분의 착종, 성직자와 부르주아지의 협력관계, 민중들의 앙시앵 레짐 말기 이전으로의 회귀를 원하는 반동적·반자유주의적 성격 등을 충분히 서술하였다. 이렇게되면 수정주의는 그 비판의 지점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수정주의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통'적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혁명의 대가들의 해석에 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수정주의는 그저 사료에 충실할 뿐이었던 전통적 해석을 맥락없이 요약하여 비판하기 좋은 하나의 '신화'로 구성하고 그 신화를 신랄히 공격함으로써 성립하고 권위를 획득한 해석이 아닌지 나는 의심하는 것이다. 물론 수정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반(反)비판을 위해서는 퓌레(F. Furet)나 코반과 같은 수정주의자들의 저작과 두 해석 사이의 논쟁을 정리한 민석홍의 『프랑스혁명사론』과 같은 책들을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한편 『프랑스 혁명』이 다루는 사건은 1789년으로 종결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 책만 가지고서는 루이 16세의 처형과 외국과의 전쟁, 그리고 그에 따른 혁명의 급진화 과정을 살펴볼 수는 없다. 따라서 당통, 마라, 로베스삐에르와 같은 혁명기의 걸출하고 또 과격한 '영웅'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빠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안타깝게도 이 책에서 혁명 이야기의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상당부분 빠뜨려 놓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