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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한 팀이 된 여자들, 피치에 서다
김혼비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어디선가 땡- 소리가 났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퇴근길을 터덜터덜 걷던 오후 8시 30분경이었다. 사위는 어둑해졌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음식 냄새를 한껏 묻힌 채 왁자지껄 거리를 돌아다니는 양복쟁이들로 역 주변은 붐볐다. 뭔가 기억하지 못할 일들이 한없이 겹쳐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주렸다. 수면부족으로 뒷머리가 당겼고 깜박깜박 졸음이 쏟아졌다.
그 때 땡- 소리가 났다. 지하철이 잠시 지상으로 오르는 철교가 땅을 뚫고 올라오는 부근을 걸을 무렵이었다.
아직도 모르겠다. 왜 그 때 이어폰을 끼고 있지 않았을까? 이어폰 없인 지척의 마트에도 가지 않는 내가 왜 그 땐 멍하니 거리의 소음을 받아들이며 걷고 있었을까?
지친 눈을 하고 땡- 소리의 정체를 찾아 고개를 들었을 때 그것이 그곳에 있었다.
권투 체육관이 그곳에 있었다. 2014년 4월 14일의 일이다. 그 길로 등록을 했고 즉시 집 근처 창고형 마트에서 저렴한 운동화를 구입해 첫날을 시작했다. 그리고 4년여가 지나 5년차가 된 지금은?
직장을 뛰쳐나왔어도 체육관은 절대 그만두지 못하는 그런 사람.
“예? 여자가 그런 운동을 해요?”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종목의 운동을 하는 여자들 사이에는 당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유대감이 있다. 더군다나 축구라니! ‘축구를 한다’는 말에는 쉽게 생각해내기 힘든 희생들이 자리한다. 흰 피부의 희생(축구만큼 땡볕 아래서 오래 지속해야 하는 스포츠가 또 있을까?), 매끈한 종아리의 희생(예전 남자친구에게 ‘파퀴아오 각선미’라는 말을 들은 사람으로서 복싱도 질 수 없지만), 머리스타일의 희생(조금만 단발이 되어도 지독하게 귀찮다고!), 화장의 희생(땀 한 바가지 흘릴 건데 화장이 다 뭔가)…. 그런데 대체 왜 이 여자들은 축구를 하고 있는 걸까? 싸우고 울고 다쳐가며? 심지어 이들은 전업 선수도 아니라 다들 자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고, 젊지도 않다. 30대 중반의 저자 김혼비가 가장 막내이며, 사오십대가 주요 연령층이라 한다. 맙소사, 이 언니들이 무슨 이유에서!
책을 읽다가 깔깔 웃고 또 갑자기 눈물 흘린 것이 참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나도 대회 나간다고 오 킬로 넘는 몸무게를 일주일만에 감량해야 했던 때가 종종 있었다. 물을 먹지 못해 허옇게 침이 들러붙은 입가를 훔치며 수업을 했고 일주일 내내 찐 감자만 먹었다. 대회가 아니더라도, 수면 시간을 줄이면서 하루 세시간 운동을 하니 네시간 반을 잘 수 있으면 성공이었다. 어디서든 휘청대고 눈만 감으면 수면 상태로 빠져들었다.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하는거야?”라는 물음에 멋있게 대답도 못하고, 그저 “하고 싶어서요, 그냥 재밌어서요…”하고 몽롱하게 대꾸하던 내 속마음을 저자인 김혼비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가 제대로 풀어내 주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상상도 못하고 살아오다가 그 현 실태를 눈앞에서 본 순간, ‘나도 하고 싶다.’를 넘어서 ‘내가 이걸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구나.’를 깨닫게 될 때 어떤 감정이 밀려드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렇다고 이들이 운동을 즐기고 좋아했던 사람들이냐, 그것도 전혀 아니다(그것은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삼 년 내내 체력장 점수가 최하위였다. 제자리멀리뛰기 할 때 ‘장난치지 말라’며 선생님께 혼난 적도 있다. 맹세코 최선을 다해 뛰었다.).
「운동에 대한 깊고 오랜 오해 하나가 풀렸을 뿐인데 그녀들에게 축구를 시작한 이후의 시간들은 전과 다른 시간이 되었다. …(중략)… 축구의 경험이 쌓이는 만큼 내 몸과 마음의 어떤 감각들이 깨어나는 걸 느끼면서, 축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을 느끼면서, 선수들과 이런 말을 주고받곤 했다. “왜 진작 축구를 하지 않았을까?” 사실 이 질문을 좀 더 엄밀하게 고치면 이렇다. “어렸을 때 우리는 왜 축구할 기회가 없었을까?” “우리는 정말 운동을 싫어했을까?”」
―“우리는 정말 운동을 싫어했을까?”
이 질문이 함축하고 있는 억압과 세뇌의 역사가 얼마나 많을까. 유치원 시절의 소꿉놀이에서부터 촉발된 비정상적 여성상의 주입이 초등학교의 발야구-피구 테크를 타며 심화되는 과정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여자애들은 살이 타니까 바깥에 나가면 안 되었고, 종아리에 알이 배기니까 뛰면 안 되었다. 승부근성을 보이면 독하고 드센 년이라고 욕을 먹었다. 어지간히 밖에 나가 노니까 온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했는데, 엄마가 하던 말은 언제나 “스무살 되면 저거 다 빼야지”였다.
그럼 스무살 되어서 주근깨 다 빼면 그 다음부턴 밖에 나가지 말라는 건가?
그렇게 왜곡되어 주입된 여성상은 아직도 유효하다. 운동 하면서 여자들에게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그거다. “복싱 하면 근육 안 생겨요? 승모근 안 커져요? 다리에 알 안 생겨요? 근육 안 커졌으면 좋겠는데…” 근육이 발달하지 않는 운동을 바라는 말도 안 되는 마음은 구시대적 여성상의 주입에서 발현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피겨 같은 건요?’ 네이버에 ‘김연아 등근육’을 한 번 검색해 보시라.
‘근육이 발달하지 않는 운동’은 없다. 우리는 근육 없이 매끈한 팔다리를 가져야 했기 때문에 운동을 싫어하도록 교육받았다. ‘땀나지 않는 운동’도 없다(빙상에선 땀 대신 콧물을 흘린다). 우리는 냄새를 풍기거나 얼굴이 얼룩지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운동을 싫어하도록 교육받았다. ‘승부욕이 생기지 않는 운동’은 없다. 우리는 얌전하고 순종해야 했기 때문에 운동을 싫어하도록 교육받은 것이다.
20대 초중반까지 운동을 싫어했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굳이 여성이 아니더라도, 스포츠에 뒤늦은 재미를 붙인 사람이라면 너무나 공감할 거리들이 가득한 에세이다. 인바디에서 근육량이 많이 나오니 자신이 근육질이라고 착각하는 배불뚝이 남자들의 맨스플레인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자면 3박 4일은 걸릴 것 같으니 그만하자(UFC와 <더 파이팅>이 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아재여, 당신은 근육과 지방량이 모두 많고 그걸 우린 ‘비만’이라고 한다.). 멋진 인간 승리의 순간으로 에세이의 마지막을 장식할 순 없었지만 얻어걸린 어시스트 한 개로 ‘세상뿌듯함’을 느끼며 책을 마무리하는 저자의 마음을 뼛속깊이 이해한다. 나도 고작 생활체육대회 우승하고, 행복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으니까(그 전에 패한 횟수는 세지 않기로 한다. 흑… 재능의 한계는 냉혹하다.).
가끔 고향 집에 내려가면 엄마에게 몸이 그게 뭐냐고 항상 욕을 먹는다. 누구나 팔 굽히면 불거지는 이두(‘알통’)와 달리 멋지게 쭉 갈라지는 전완근과 단단한 삼두는 운동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훈장이다. 종아리부터 발목까지를 지탱하는 비복근과 넙치근은 얼마나 스텝을 열심히 뛰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언젠가 인스타에서 보고 멋져서 저장한 호주 선수 Louisa Hawton의 계체 사진을 보고 엄마가 “에그머니! 몸이 완전 너다 너!”라고 외쳤을 때 느끼던 행복감과 뿌듯함이란! 어찌 보면 그 몸은 내가 이제야 찾게 된 욕망과 자기주장의 발현이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그토록 피하던 종아리 근육을 얻게 된 때의 김혼비 언니도 그런 것 같다! 드디어 혼비에게도 종아리 알이 생겼다고 축구팀 언니들이 호들갑을 떨던 때에 대한 서술을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딱 내 맘이다.
「대체로 내 몸과 축구와의 맨투맨 관계는 제법 잘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사회 통념적 욕망, 오랫동안 습관처럼 취했던 방식이라 그게 누구의 것인지도 잘 모르게 되어 버린 욕망에 앞서서, 맨투맨 관계 안에서 내 것이라는 게 확실하고 뚜렷한 욕망을 새롭게 찾아가는 것. 이게 참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