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동물원
진 필립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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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닮은 서평이 좋은 서평이다. 박진감 넘치는 책엔 박진감 넘치는 서평, 슬픈 책엔 슬픈 서평, 지루한 책엔 지루한 서평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분명 금정연의 책에서 읽은 건데 이것이 그의 말인지, 누군가의 인용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리고 서평이랍시고 시작해서 의식의 흐름대로 다른 얘길 신나게 떠드는 글도 좋아한다. <난폭한 독서>의 추천사를 쓴 영화감독 정성일이 이것은 서평집이 아니다!’고 단언했듯이.

이렇게 써 놓고 나는 난관에 봉착한다. 그렇다면 <밤의 동물원>의 서평인 이 글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나.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꿀꺽한 후 아무 것도 쓰지 않는, 태만하지만 보편적인 길을 걸을 수도 있다,만 난 꽤 오랫동안 백수일 예정이므로 책을 보내주는 출판사가 필요하다. 꿀꺽한다면 공짜 책은 여기서 끝일 것이다. 글을 써야 하는데, ‘2016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화제작이자 2017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최고의 범죄소설이라는 이 책을 닮아 서스펜스 넘치는 서평을 쓰기란 불가능하다. 애당초 스릴러나 공포엔 영 심약한 인간이란 말이다(내가 볼 수 있는 최대한의 스릴러 영화는 <테이큰>이다. ? 그게 스릴러인가요? 그렇다. 자기 딸 하나 살리겠다고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수십명을 박살내고 살해하는 아버지, 공포스럽지 아니한가.).

그래서 결국 나는 후자를 택한다.

 

폐장을 앞둔 저녁 시간의 동물원에 리볼버로 무장한 괴한 셋이 등장해 마구잡이로 총질을 한다. 사람 뿐 아니라 동물들에까지. 이제 간신히 말을 할 정도로 어린 아들 링컨을 데리고 늘 그렇듯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스팟만 골라 다니던 엄마 조앤의 동물원 탈출담이 주를 이루고, 인간사회를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도록 축소시킨 인물들이 곁가지를 친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신랄하고 강렬한 장면들이 많다. ‘괜찮아? 어디야? 경찰이 가고 있대. 오 여보 사랑해따위의 문자를 보내 핸드폰이 빛을 내며 울리게 만드는 주인공 남편의 무력함과 대책 없음은 실소를 자아내고(조앤은 이에 핸드폰을 저 멀리 던져버려 범인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으로 대응한다. 쓸데없는 남편 연락 따위 개나 주라지!), 아직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어린 아들 링컨이 배고프다고 떼를 쓰며 울먹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다. 이성적이고 강한 엄마 조앤도, 자신을 숨겨주는 10대 흑인 소녀에 대해서는 잘못된 선입견을 숨기지 못한다. 소리를 내면 발각되는 상황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갓난아기의 모습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인간성의 말로이다.

그 중에서도, 이 책에서 상황에 가장 큰 변화를 주는 관계이자 클리셰이기도 한 것은 괴한 중 한 명인 로비와, 은퇴한 초등학교 교사 파월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주치는 장면일 것이다. , 상상이 되지 않는가. 또래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아이는 커서 총으로 무장한 채 사람들을 쏘고, 그 아이를 기억하는 노교사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다정하게 말을 건네며 마음을 돌리려 애쓴다. 당연히도 로비는 주동인물이 아니고, 더욱 잔혹하지만 지배력 있는 주동인물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똘똘 뭉친 콤플렉스 덩어리이다. 파월은 그것을 꿰뚫어보고 위기를 모면한다.

1999년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의 두 범인 중 한 명인 딜런 클리볼드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가 내 아이가 왜 그런 일을, 나는 양육 과정에서 무슨 잘못을, 다른 부모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람들의 위험한 우울증을 덜어내 주기 위한 방법은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공부하고 사회활동을 지속하며 찾아 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짚어볼 지점이 많은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그러나 그 책에서조차, 수 클리볼드는 내 아이는 주동인물에게 잘못된 영향을 받은 보조역할이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독자인 나를 불편하게 했던 지점이었으며, 아이러니컬하게도 보편적인 스릴러에서 주인공 일행이 살아남는 길이기도 하다. 마음 약한 애정결핍 환자인 보조인물에게 간택되는 것! 이보다 큰 행운은 찾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숱한 스릴러를 통해 익히 알아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을 극한상황에 몰아넣은 후 희망을 주기 위한 장치로서 이 클리셰는 여기서도 짜잔-하고 등장한다(물론 전직 교사로서 파월 선생님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선생님에게 신의 은총이 있으라!). 층을 내며 겹겹이 쌓아올리던 서스펜스의 맥이 스륵 풀리는 아쉬운 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장점이 많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소리만 썼으니 이를 어쩌나. 모면하기 위해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앉은 자리에서 끊김 없이 다 읽었다는. 평소 난 플롯/내러티브 필요 없어, 말맛이 장땡이라는 입장을 유지하며 전위적인 작품들을 하늘높이 쳐주는 재수없는 독자로서 참 고개를 못 들 일이다. 스티븐 킹 선생이 익히 말했듯, ‘나도 시를 써서 강의실에 가져갔지만 기숙사의 내 방에는 더러운 비밀을 숨겨두고 있었다. 인종 폭동을 계획하는 십대 갱단에 대한 미완성 소설이었다. 내가 사춘기를 막 벗어난 시절의 고뇌와 성욕에 대하여 쓰던 시들보다 그 소설이 훨씬 더 낫고 또 어딘가 진실하다는 사실은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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