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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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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야흐로, 퀴어 문학의 시대이다. 거대공룡 출판사인 문학동네에서 2018년 내내 김봉곤과 박상영을 엮어 쌍두마차로 밀어 주었다. 2018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은 <작정기>(김지연)의 주인공 역시 퀴어이다.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창비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매우 훌륭한 현상이라고 본다. 유행한다고 따라가냐? 그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사람이 만든 사회적 편견을 넘어 사랑하는 것, 그 자연스러움을 허용할 뿐 아니라 권장해주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모니카 트로이트 감독이 <젠더너츠>에서 말했듯 자연은 인간보다 창의적이다. 남의 알을 훔치는 게이 펭귄도 있고 암수 구별이 어려운 하이에나도, 자연엔 있다. 좋은 시대가, 느리고 돌을 맞고 있긴 해도, 점차 오고 있다. 희망을 본다.

 

2. 이 소설은 <위대한 개츠비>의 게이 판처럼 보인다. ‘저 부유한 상류층 속 한 마리 중산층인 나내가 관찰하는 그들의 흥망성쇠또르륵……뭐 이런 느낌. <위대한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여기는 독자로서 매우 즐겁게 읽었다. 앞부분보다 뒷부분의 호흡이 훨씬 빠르다. 혹 이 책을 읽다가 아이 지루해, 하고 집어던지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1부만 참고 보길 바란다. 2부와 3부는 정말 속도감 있다. 1부도 재미있게 읽었다.

 

3. 소설을 계속 쓰다보니 결국엔 글 쓰는 사람의 눈으로 책을 읽게 되는데, 이거 정말이지 내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윤리와 완전히 합일하는 멋진 소설이다. 내가 쓰는 단편을 읽는 독자들은 언제나 다양한 반응을 내놓지만(똑같은 소설에 대해 재미없다엉엉 울었다가 교차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놀랍고 즐겁다) 그 중 딱 하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장점은 생생하다. 생동감 있다라는 것이다. 당연하다. 아는 것에 대해 쓰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위키피디아나 찾아본 후 에둘러 대충 말하는 것은 정말 싫다. 그러다보니 매일 내 삶, 내 생활, 아는 사람, 우리 동네, 다녔던 여행지들 같은 것들을 돌이켜본 후 적절한 재료를 골라 썰고 다지고 섞고 양념해 볶는다. 그리고 그게 공감이란 것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들 사는 건 비슷하지 않나. 예전에 교사가 졸업생 주민번호까지 적힌 자료를 기자를 사칭한 남녀에게 미심쩍어하면서도 건네는 장면이 들어간 장편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소리내어 욕했다. 개인정보가 얼마나 중요한 시대인데. 작가가 게으르기 짝이 없다. 복싱 기술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쓴 소설도 읽은 적이 있다. 쌓아온 감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누가 내 글을 읽을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정말 잘 알아보고, 가장 좋은 길은 물론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일 테고, 어쨌든 그렇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래서 실제로 공장이나 축산농장 같은 곳에서 일한 후 책을 쓴 작가 한승태 씨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묘사는 정말 완벽하다. 아마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들을 모델로 썼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작가가 머릿속에서 그 저택을 지반부터 다져 기둥을 세우고 벽을 바른 후 가구를 들여놓아 완성시킨 후에야 썼을 것이다. 나는 그런 작가를 좋아한다. 그런 자세를 좋아한다. 그것이 소설가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멋진 소설이다.

 

특히 속지. 정말이지 아름답다. 육성으로 헉-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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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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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창작과 입시를 준비하면서 정말로 놀란 사실이 있다. 세상에 이렇게 죽고 싶어하는 작가 지망생이 이렇게나 많다니. 실기시험장에 가선 더 놀랐다. 다들 고운 피부에 유행하는 동글뱅이 안경을 쓰고 잘 다듬은 손톱을 한 채 기장이 잘 맞는 삼선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앉아 있었다. 저 사람들이, 다 그렇게 죽고 싶어하는, 밑바닥에서 어둠을 풀어헤친 채 엉금엉금 기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었다니. 내가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길거리에서 만나는 멋쟁이들이, 사실은 다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죽고 싶어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니.

자기 파멸의 상징인 다자이 오사무는 아마 죽고 싶던 작가중 가장 빠르게 성공을 거두고 또 가장 빨리 스스로를 죽여버린 인물일 것이다. 졸부 집안의 자식. 연인과 동반 자살 기도를 하였으나 혼자 살아남은 젊은이. 마약성 진통제에 중독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된 환자. ‘사양족이라는 신조어를 낳을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을 써낸 소설가. 서른아홉, 생애 다섯 번째 자살 기도에 성공한 사람. 이 모든 것이 다자이 오사무가 살았던 삶이다. 자신의 인생을 소설이나 영화로 여기고 그처럼 만들려는 사람은 살아오며 정말 많이 보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발을 쓱 빼고 모른 척 한 채 뒤돌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자이 오사무는 발을 빼지 않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글에선 진실됨이 묻어나온다. 자신을 그대로 투영시킨 인물이 짜잔 등장한다. 그 유명한 <인간 실격>에선 주인공 자체가, <사양>에선 주인공 가즈코의 남동생 나오지가 그러하다. 방탕하고 피폐한 삶을 즐기는 듯 살지만 그 행동들이 모두 너무나 괴로운 사람.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매일 질문하면서도, 왜 이렇게 살면 안 되는지에 대한 세상의 답이 너무나 천박해 견딜 수 없어 다시 술을 마시고 약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 그가 만들어낸, 그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들이 몇십년이 지난 지금 다른 국가의 젊은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 조용히 침묵하고 있을 악마를 끄집어낸 까닭일지도 모른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 여성혐오의 혐의를 쓸 수밖에 없게 된 <인간 실격><사양>은 조금 다르다(물론 혐의를 아주 벗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사양>의 뒤표지에 언급되는 페미니즘적 작품이라는 광고 문구에 대해선 반발한다. 비극을 여성의 목소리로 썼다고 페미니즘인가요? 제가 봤을 땐 이 작품에서도 역시 남성의 성적 판타지가 구구절절 드러나는 것 같은데요. 화자만 여성일 뿐.). 화자인 가즈코와 어머니 사이의 연대가, 절대 모자 관계에선 나올 수 없는 모녀 관계에서의 애틋함이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남동생인 나오지, 아마도 다자이 오사무가 자신을 투영했을 인물인 나오지는 이 관계에선 크나큰 걸림돌이자 돈 먹는 식충이일 뿐. 기울어진 가세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가즈코가 택하는 길은 역시나 뜨악한 방향이지만, 그 길에서도 역시 별 생각도 개념도 없는 남자들과 달리 가즈코는 인간이란 존재를 사랑하고(아기를 낳고 싶어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당신이 저를 잊는다 해도, 또한 당신이 술로 목숨을 잃는다 해도, 저는 제 혁명의 완성을 위해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낡은 도덕과 끝까지 싸워,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입니다.).

도덕! 대체 그 관념은 어디서 출발해 어느 길을 걸어 어디에 도달하려 하는 걸까? 시대마다, 장소마다 전혀 다른 색채를 띠고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는 그 도덕을 어디까지 믿고 살아야 하는 걸까? <사양>은 그런 질문을 툭 던진다. 가즈코는 살기 위해, 또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고도 살아낼 이유를 얻기 위해 그 당시 일본의 도덕을 부순다(이처럼 살기 위한 이유를 어떻게든 만들어내는 가즈코의 생명력은 작가 다자이 오사무나 그 자신을 투영한 나오지와는 전혀 상반되고, <사양>에서는 가즈코의 노력을 아름답게 비춘다). 어쩌면 그 잣대가 너무나도 다양하고 또 다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세상에서 가장 모호한 것이 그 도덕이란 것일지 모르고 따라서 가즈코의 선택을 그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친 거 아냐?’, ‘사람이 할 짓이야?’라는 비난을 듣는 사람들을 돌이켜봤을 때, 그들을 만약, 신분제가 성행하던 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부모를 버리던 고려 시대에, 또 사람을 파리처럼 죽이던 세계대전 때로 갖다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 또한 그렇게까지 불경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더 다양한 관점이 있으며 정말로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숨들이 있다. 소설의 큰 기능 중 하나,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 그 사람의 생각을 해 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경험을 글을 통해 하는 것, 을 나는 <사양>을 통해 다시 한 번 경험했다. 물리적으로 날 파멸시키긴 힘들지만 자기 파멸의 상징을 통해 경험하기! 그날 본 수많은 죽고 싶은 글쟁이들을 통해 나는 다자이 오사무가 영원히 읽히리라는 것을 알았다. 좋겠다, 죽고 없지만 좋겠다! 10여년만에 입시 결과라는 것을 다시 기다리는 나의 생각은 결국 돌고 돌아 이렇게 정리된다. 발표날짜가 정말로 오긴 올까. 목이 기린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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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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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에 비해 장편에서 훨씬 돌직구를 던지는 작가들이 있다. 지금 당장은 단편 <호수-다른 사람>에서 장편 <다른 사람>으로 펄쩍 뛰던 강화길 작가 정도가 떠오른다. 그것에 대해 문학비평적으로 아쉬움을 가지고 접근한 사람들도 물론 많았지만(이른바 평론계에선 강화길의 단편들을 훨씬 높이 친다 카더라), 나처럼,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자신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공부를 했으니 무엇이 잘 써 보이는지뻔히 알 텐데 그걸 다 버릴 만큼의 의지와 열망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독자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박민정 작가의 이번 장편 또한 그러해 보인다(첫 장편이다). 그간의 소설집 두 권이나, 가장 유명할 단편 <세실, 주희>(2018 젊은작가상 대상)의 지독하게 섬세했던 결을 과감히 버리고 대신 작가는 화염병을 들었다. 나약해진 우리 세대가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이전 세대가 주장하는 어그러짐과 부당함을 최대한 많이 넓게 토해내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칼을 갈았다(이는 마지막 장의 작가의 말을 통해 여실히 확인된 감상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누구나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무언가를 과감히 버리면서까지 돌진하는 그녀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비장하다. 그리고 그렇게 쓰는 그녀들이 이 땅에 점점 늘어난다는 사실이 방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인 서사는 기대보다 촘촘하다. 자살한 항공사 승무원 유나가 왜 죽었는지를 추적하는 아버지 정근(나는 모든 부녀 서사에 대해 극심한 알러지가 있는 사람이지만), 왜 이제 와서 아버지 노릇을 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 지숙, 표면적으로그리고 권력이 의도한대로유나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보여지는 유부남 부기장 영훈,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영훈의 부인 혜진, 뭔가를 알고 있는 두 친구 주한과 철용 등 열쇠를 가진 인물의 숫자는 꽤나 많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엄청나다. 인간의 계급을 가르고 생명을 위협하는 상명하복의 세계. 을 사이의 불신과 질시를 조장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갑의 방식. 사람 목숨을 파리의 그것과 비슷하게 취급하는 듯한 자본과 소득의 세계(이 대목에서 아서 밀러의 <모두가 나의 아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데,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서건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글로 쓰인다는 것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절망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가족을 인격체가 아니라 누군가의 소유물로 여기는 폭력적인 가부장적 가치관. 그 모든 것들을 한데 다 녹여 하나의 사건으로 다시 조형하기 위해 공을 기울였을 작가의 노력이 장을 넘길 때마다 드러난다. 그것은 누군가 섣불리 재단하고 단정지어선 안 되는 인간성의 그 무엇이다.

며칠 전 연세가 꽤 많은 누군가와 막걸리를 마시다 그런 이야길 했다. 분명 열아홉 스무살 즈음의 모두는 참 비슷했는데, 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니 다시는 섞일 수 없게끔 달라져갔다고. 분명 그땐 모두들 왜 어른들이 이따위로 행동하는지, 세상이 좋은 쪽으로 달음질쳐 가야만 하는 방향을 부러 막고 방해하고 모르는 척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순응하고 받아들이고 그런 어른이 되어가는 서른 살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고. 그런데 그렇게 되어가는 것 자체가 더 이상 상처받으며 힘들어하고 싶어하지 않는 방어기제의 발동이 아닐까 싶어 밉지는 않고 그냥 슬프다고. 그 분 역시 그렇게 변해간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이를테면 삼십년 간 돌베개의 필자에서 조선일보의 독자로 변화했다고 비유할 수 있겠다) 해 주시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또 떠올렸다. 나는 얼마 전 어느 정치인의 사건으로 인해 엄마에게 큰 소리를 냈는데 그때 나는 당신들은 정말 모른다, 엄마아빤 그 세대가 보기엔 운동권이고 빨갱인진 모르겠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고 눈이 먼 기성세대일 뿐이다, 내가 어떤 걸 감내하고 당하지 않은 척하고 말 못하며 살아왔는진 전혀 알지 못한 채 어느 순교자를 향해 이상한 년이라고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못된 년이라고 함부로 말하고 있는 것 아니냐 내가 바로 그 년이고 그렇게 매장당할 수 있던 년이다, 라고 소리를 속으로만 질렀다.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어떤 옛날의 사실들은 순진하리만치 멍청했던 어른들에게 생채기를 낼 수 있겠단 생각이 말을 멈추게 했다.

결국에 귀를 쫑긋 세운 채 권력과 자본이 딛는 곳마다 몸을 뉘어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를 외칠만한 눈치를 가지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팽 당할 수 있는 것이다. 뼛속까지 군인이었던 정근의 딸 유나가 항공사의 갑질에 못 이겨 목숨을 끊은 것처럼 말이다. 어느 한쪽을 온전한 피해자로 두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갑과 을의 위치를 계속 전복시키며 소설을 직조한 박민정 작가가 자신이 쓰는 글에 난자당해 얼마나 큰 내상을 입었을지 나는 무리해서라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면서까지 쓰려 했단 것을 말이다.

박민정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내가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뒤집어 나는 그녀가 무언가 포기하면서까지 남겨둬 쓰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진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녀가 쓰는 단편들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그녀는 어떤 것을 비평가들이 환영하고 잘 썼다 해 주는지에 대해 능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들을 버리면서까지 대놓고 이야기하고 싶은 부조리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것을 내려놓아 버리는 사람의 이야기는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 모두는 내려놓지 않는 다수가 짐작할 수조차 없는 용기의 발현이다. 그러니 제발, 제발 들어야 한다. 누가 당신더러 내려놓으라고 했나. 듣기라도 해달란 말이다, 라고 읍소할 수밖에 없다. 그게 안 되면, 이제 짱돌을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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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E. W.
김사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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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를 생각하면 나는 두 가지를 떠올린다.

 

첫 번째는 금정연의 서평집 <서서비행>에 실린, 김사과의 <테러의 시>에 대한 글. 그즈음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탐색한 여러 경로를 통해 만난 타인들에게서 익숙한 절망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이딴 걸 왜 읽냐, 이렇게 폭력적이고 염세적인 게 늬들이 말하는 예술이냐, 정신병자가 쓴 거냐, 살기도 팍팍해 죽겠는데 이딴 걸 책으로 내야 하냐. 그때 금정연이 이렇게 비유한 것을 보았다. 매우 길긴 하지만 몹시 사랑하는 글이라서 어떻게라도 발췌해 싣고 싶다. 앞은 문학동네 61에 실린 남궁선의 글을 금정연이 인용한 것이고, 뒤는 금정연이 덧붙인 것이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전쟁터에서 폭탄을 맞아 내장이 쏟아져 나온 시체가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데, 그 방의 방문자들이 다들 책꽂이에 꽂힌 책 이야기라든가 커튼의 색깔이랄지 구석에 서 있는 화병의 무늬랄지 날씨 얘기 따위만 끝없이 하고 있는 상황. 그런데 그 방에서 그런데요, 여기 시체가 있는데요라고 한 아이가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 그래. 우리도 알고 있단다라고 한 다음에 다시 날씨 얘기를 한다. 아이의 눈에는 그게 아무래도 이상하다. “여기 시체가 있다니까요!”라고 한 번 더 외친다. 그러면 사람들이 조금 성가셔한다. “그래! 여기 시체가 있어! 우리도 다 안단다. 그걸 누가 모르니!” 아이는 화가 났다. “저는 이게 무서워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도 별로 좋지는 않단다.” 그리고 그들은 또 날씨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아이는 귀찮게 한다. “이거 전쟁 중이라서 있는 거죠?” 이제는 귀찮다. “그래! 전쟁 중이니까 시체가 있단다.” 아이는 눈물을 글썽인다. “사람들이 전쟁을 안 하면 방에 시체가 없어도 되잖아요.” 그런 아이가 귀여워서 사람들의 표정이 온화해진다. “어유, 그래, 착하고 훌륭한 아이로구나. 하지만 우리가 그런 큰 것에 대해 이야기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니. 우린 벌써 이 시체를 수백 년 동안 보아왔단다. 그냥 다른 얘기를 하자.” 그러고서 그들은 다시 화병의 무늬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화병을 집어던져 깨뜨린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얼어붙는다.(남궁선)

그래서 김사과는 화병을 집어던진다. 화병이 깨지는 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운다. 정적. 하지만 이내 대화가 이어진다. 다시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가, 아니, 오히려 조금 더 들뜬 얼굴을 한 채, 화병을 던지는 행위가 가져온 어떤 충격과 그것의 행위예술적 가능성과 깨진 화병의 조각이 만들어 낸 예상 밖의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유, 우리가 너를 잘못 생각했구나. 미안하다. 넌 정말 당돌하고 예술적인 아이야. 당장 우리와 계약하지 않을래? 그런데 화병을 던진 이유가 뭐라고? 잠깐만, 여기 화병 하나 더 갖다 줘!”

그들은 안다. 우리도 안다. 무엇이 김사과와 그녀의 인물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다. 방 안에 시체가 있고 세상은 전쟁 중이다. 세상은 전쟁 중이고 방 안에는 시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고도 처절하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철저하게 외면당한다.(금정연)

 

두 번째는 몇 년 전 시나리오작가 최고은(그 죽음이 아사였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죽기 전 남는 밥과 김치가 혹시 있는지 부탁하는 말을 옆집에 남겼다는 것이다)의 죽음에 부친 소설가 김영하의 SNS 글에 반기를 들고 나선 김사과의 모습. 원래는 평론가 소조와 김영하 사이의 논쟁이었는데, 김사과가 소조의 편을 들고 나선 것. 김사과는 한예종 출신이고 김영하의 제자였다. 이른바 주례비평이라는 조롱섞인 단어로 제일 잘 표현되는 문학계의 꼰대니즘 속에서 스승에게 대놓고 아니, 그건 아니지 않냐며 분노한 김사과의 모습은 다양한 반응을 낳았지만, 내겐 적어도 저 사람이 자기 소설의 파괴일변도적 서사들로 어떤 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정말로 화가 났구나, 저 사람은 정말로 분노했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 몰리든 굴하지 않고 자신의 대학시절 스승, 자신의 첫 단행본에 추천사를 써 줬던 자, 한국문학계의 가장 큰 손 중 한 명인 김영하에게도 거침없이 분노를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김영하는 그 후 SNS 절필을 선언했는데, 아마 다른 사람과의 논쟁보다는 제자인 김사과의 공격에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반응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가장 큰 원인이 되었으리라 미루어 짐작한다.

 

문제아김사과의 신작 소설이 나왔다. N.E.W.라는 제목을 달고. 어떤 인터뷰를 읽어보니 작가 자신은 불륜 소설이죠라고 초간단하게 대답했다 한다. 오손그룹이라는 재벌가의 사람들(정대철, 정지용, 은미라, 최영주)과 딱 우리 세대의 답없는 청춘들(유튜브 BJ인 이하나, 칼국수집 주인이자 도박중독자인 성공자, 심부름센터의 이우진)을 대치시키고, 이하나와 정지용이 얽혀 벌이는 불륜행각들이 이 소설이 가진 이른바 줄거리. 여기까지만 보면 KBS1에서 아침드라마로 방영해도 무방할 스토리라 보여 겁이 나지만, 여기에 특유의 횡설수설하는 대사와 갈지자로 걷는 서사, 신랄하고 떠들썩한 조롱 그리고 엽기적인매듭짐이 얽혀 역시 KBS1은 기우였지싶게, 팬을 안심시킨다. 물론 초기작보다는 상당히 유한 편인데 그것이 그녀가 나이든 때문인지 아니면 한국에 살지 않기 때문인지는 당사자만 파악할 수 있는 사정일 것이다.

내가 방금 하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말의 칠할 정도는 오손그룹 사람들에 대한 묘사에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기대하는 것처럼 안하무인도, 인간 말종도 아니다. 말 되는 소리들을 별로 하는 것 같진 않지만 어쨌거나 우아하고,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쓸 줄 알며, 차분하다. 오손그룹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놓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는 당황한다. ? 이게 뭐야? 뭐 이렇게 유약해? 오히려 속물같아 보이는 것은 성공자나 이우진 같이 이하나의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이다. 이거 뭘까?

그렇게 의아함에 휩싸여 소설을 계속 읽어나가던 중간 부분쯤, , 하는 대목이 나온다. 오손그룹 후계자이자 부인인 최영주를 두고 유튜브 BJ인 이하나를 쫓아다니는 정지용의 심중이다(정지용과 이하나가 만나는 초고층 아파트단지의 묘사에선 영화 하이-라이즈가 겹쳐졌다.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어 결말에선 어불성설이 된 느낌이 된 영화이긴 하지만, 강렬한 이미지와 빈부격차에 대해 촌스러울 만큼 앞뒤 안가린 돌직구만으로도 이 영화는 시간을 내어 볼 만 한다). 꽤나 인상깊은 단락이어서 오래 두고 다시 읽었다.

물론 정지용은 둘 다 좋았다. 잘 못 자고, 잘 안 먹는 최영주는 어딘가 모르게 우아한 왕비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고, 반대로 잘 먹고 잘 자는 이하나는 성격 좋은 커다란 개 같은 느낌이라 좋았다. 정지용은 우아한 왕비 최영주와 함께 성격 좋은 개 이하나를 키우는 상상을 했다.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기사로, 뉴스로 그들을 접하면서 항상 분노했다. 고작 견과류 때문에 비행기를 돌린 자. 무슨 설치류의 환생이라도 되는가? 그 자의 가족들도 생난리를 피우더니 그 경쟁업체에선 으앗 나도 질세라 여자들에게 빨간 꽃을 들고 춤을 추게 만들었다. 더 이전으로 가보자면, ‘집에 돈많은 것도 내 능력이라던 기마민족의 후예에게 어느 대학의 학생들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 뒤집어 까발린 나라의 작태들이 있었다(정지용. 이름도 비슷하지 않나? 뭔가 현대가와 삼성가의 결합 같은). 그리고 그들이 최대한 얌전한 옷을 입고 고개를 숙인 채 걸을 때 흘끗흘끗 보이는 얼굴에서 사람들은 반성의 기미를 볼 수 없다고 외쳤다.

아니,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뭘 반성해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정지용의 이 말이 우리에겐 중요하게 다가온다(후반부에서 아버지인 정대철이 철가방 운운하며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직설적이라서, 정지용의 비유가 훨씬 더 우아하다고 나는 믿는다). 유튜브 BJ이자 자신의 불륜 상대인 이하나는 개다. 잘 먹고 잘 자는, 키우고 싶은 개. 개는 잘 돌봐주면 그만이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면 성대를 제거한다. 발정이 와서 힘들어하면 중성화수술을 시킨다. 나 인간이 사랑하는 개와 이 집에서 함께 사는 방법은 그것밖엔 없으니까. 개도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겠지(그리고 정지용은 이하나의 팔을 잘라 먹는다. ? , 먹습니다.).

애시당초 개는 인간인 내가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 것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비유에 대해 모욕감을 느끼고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치들이 우리를 로 생각할 것이라는 나의 추측의 잘못됨을 따지고 들 수도 없을 것이다. 보고 들은 것이 한둘이어야지. 그렇다면 그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한 단어는 무엇인가? 인간? 절대 아니다. 동물? 그게 바로 개잖아. 생명체? 당신은 이렇게 피식자로서 살고 싶었는가?

그래서 김사과는 말한다. ‘우리 모두는 유령이라고. 최신식 황무지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동거하는 유령이라고. 유령에겐 삶이 없으니. 무게도 의미도 없으니 말이다.

 

김사과의 책을 모두가 읽으라고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예쁜 글이 좋고 희망찬 내용에서 용기를 얻는 독자들이 서점에서 홀로그램이 씌워진 화려한 표지에 혹해 이 책을 집는다면 나는 주먹질을 해서라도 빼앗아 달아날 것이다. 그들이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들에게도, 김사과에게도 못할 짓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어딘가 균열이 있다는 느낌을 받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그 균열을 찾기조차 못할 거라는 절망감이 들고, 왜 사람들은 아무도 그 밑에 뭐가 있는지, 어디가 무너지고 있는지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가 의문이 든다면, 김사과의 글들을 초기작부터 차근차근 읽었으면 좋겠다. 정지용 왈, “아버지, 지금까지의 아버지 생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요,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새로운 세계에 걸맞은 환상이요.” 저런 환상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난 요새 소확행이라는 말이 소름돋고 듣기 싫어 죽겠다), 괴롭고 두렵고 가끔은 역겨워도 읽었으면 좋겠다.

어떤 아이가 여기 시체가 있다고 오래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누군가는 거기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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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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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한창 오르한 파묵의 <내 마음의 낯섦>에 빠져 있었다. 이스탄불을 누비는 마지막 보자 장수의 삶을 담은, 650쪽에 육박하는 두툼한 소설이었다. 동시대에 아직 살아있는 거장이(어린 시절, 소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본가의 책장에도 <내 이름은 빨강>은 꽂혀 있었다) 계속해서 신작을, 매우 활발히 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또 무지하게 재미가 있었다. 거듭 읽으며 감탄하고, 또 한 번도 가지 못해본 이스탄불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은 스카이스캐너에서 이스탄불 가는 비행기표도 자주 검색해보고 그랬는데, 그때마다 인간아 너는 곧 사표를 내고 내년에 백수가 될 것이니 돈을 아껴라며 스스로를 야단쳤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이번 여름엔 이스탄불에서 보자를 마시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의 신작이 또 나왔다. 또다시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한다. 자주 이야기해왔던 터키의 급격한 변화, 그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세대간의 갈등은 여전히 화두로 남겨둔 채, 좀더 마술적인 요소를 추가했다. 신화와의 접목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부친 살해), 조금 생소한 페르시아의 뤼스템과 쉬흐랍 이야기(아들 살해)를 엮어, 마치 거울에 비춘 듯한 두 신화가 서로의 힘을 겨루며 엎치락뒤치락 하는 모양새를 터키의 세대갈등에 그대로 투영시켰다.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이다.

가정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 없이 자란 는 학비를 벌기 위해 우물 파는 장인 우스타의 조수로 들어간다. 일하는 동안 는 우스타를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존경과 증오를 동시에 가지게 되는데(존경과 증오-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든 자식들이 부모에게 갖는 양면적인 감정일 것이다), 뜻밖의 사고로 인해 우스타를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고 도망치게 된다(오이디푸스의 부친 살해).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이다.

그리고 1부에서, ‘와 독자는 빨강머리 여인과 마주하게 된다. 거의 삼 세대를 아우르며 터키의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 있던 빨강머리 여인은 에게 어머니와 동일시되는 대상인데, ‘1부에서 사실상의 오이디푸스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와 빨강머리 여인 사이의 관계 역시 이를 반영하게 되며, 거기서 파생된 결과가정확히 말하면 하필 또 아들이 생겨서2, 3부를 걸쳐 새로운 신화를 다시 만들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동양과 서양에서 이토록 닮은, 또 상반된 신화가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 본성의 공통점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일 수 있다. 그러니 그 동서양의 신화를 모두 담은 소설이 동서양의 중간지대인 터키에서 터키인 작가에 의해 쓰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운명일 수밖에 없겠단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는, 서양의 오이디푸스는 부친을 살해하고, 동양의 뤼스템은 아들을 살해한다는 면에서 동서양의 정서 차이를 엿볼 수 있다는 느낌도 가지게 되는데, 그렇다면 부친을 살해한 가 훗날 터키의 민족주의를 거스르고 유럽적인 개인’, 혹은 유럽 스타일의 사업가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 다음에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서양 신화와 동양 신화의 전면충돌인데, 여기서 쓰기엔 너무 큰 스포일러가 될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버지의 권위만큼이나 우리 보편적 생에 걸쳐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몇 개나 있을까(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내 개인적으로는, 자라며 배운 모든 권위를 스스로 깨는 노력만이(깨고 나갈 것인지, 아니면 수긍하고 다시 덮을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성장과 자아확립의 발판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되게 장황하게 썼는데, 그냥 쉽게 말하면 살아온 내내 아빠 말 드럽게 안 들었다는 소리가 되겠다. 소설의 말미에는 이런 단락이 나온다.

 

당신과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하나요, 사랑하는 아버지?” 그는 조롱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내가 순종적인 아들이면 유럽적인 개인이 될 수 없지요. 유럽적인 개인이면 이번에는 순종적인 아들이 될 수 없고요. 날 좀 도와주시지요.”(p.323)

 

이 요구에 대해 부친은 나의 아들이라면 성숙한 개인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했을 거야라고 씨알도 안 먹힐 대답을 한다. 이는 뤼스템과 쉬흐랍 신화에서 아버지인 뤼스템의 비겁성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쉬흐랍이 먼저 뤼스템을 쓰러뜨리지만, 노장인 뤼스템은 상대를 두 번 쓰러뜨린 후 목을 베는 것이 미덕이며 예의라고 쉬흐랍을 꼬드긴다. 그러면서 본인이 쉬흐랍을 쓰러뜨린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숨통을 끊는다). 결국 오르한 파묵은 어느 정도는 그가 오이디푸스 형이든, 쉬흐랍 형이든 아들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1부에서 아들이었던, 그리고 2부에서 아버지가 된 에 대한 작가의 태도 변화가 두드러진다는 인상도 강하다), 다만 이전 세대에 대한 추억이 담긴 연민어린 시선을 항상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굳이 신화 이야기를 더 이어가지 않더라도, 역동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이스탄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말해 뭣해할 정도로 당연한 마스코트라서, 이 책 역시 또한번 내게 스카이스캐너를 검색하게 만들었다(인간아너는 백수생활을 오래 할 몸이니 자제해라). 다만 이번엔 알콜이 소량 함유된 발효유인 보자가 아니라 도수 45도인 증류주 라크를 마시고 싶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심지어 숙취가 엄청나다고 한다. 자고로 숙취가 엄청난 술이란 죽기 전에 꼭 마셔봐야 하는 것이다.

 

) ‘사실 네 아버지도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단다라는 마지막 문장엔 엄청난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

 

덧덧) 읽다가 현웃터진 부분이 하나 있어서 함께 올린다. 세상 사람들 다 똑같나보다. 나도 연애라는 것에 이런 환상을 가졌었다. 서른 들어서 완전 접었다.

때때로 우리가 함께 책을 읽은 후 입맞춤을 하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젊은 시절 어떤 이상을 위해 함께 흥분하며 책을 읽었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아버지에 의하면 가장 커다란 행복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다른 누군가의 행복에 대해 언급할 때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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