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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E. W.
김사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평점 :
김사과를 생각하면 나는 두 가지를 떠올린다.
첫 번째는 금정연의 서평집 <서서비행>에 실린, 김사과의 <테러의 시>에 대한 글. 그즈음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탐색한 여러 경로를 통해 만난 타인들에게서 익숙한 절망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이딴 걸 왜 읽냐, 이렇게 폭력적이고 염세적인 게 늬들이 말하는 예술이냐, 정신병자가 쓴 거냐, 살기도 팍팍해 죽겠는데 이딴 걸 책으로 내야 하냐…. 그때 금정연이 이렇게 비유한 것을 보았다. 매우 길긴 하지만 몹시 사랑하는 글이라서 어떻게라도 발췌해 싣고 싶다. 앞은 『문학동네 61호』에 실린 남궁선의 글을 금정연이 인용한 것이고, 뒤는 금정연이 덧붙인 것이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전쟁터에서 폭탄을 맞아 내장이 쏟아져 나온 시체가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데, 그 방의 방문자들이 다들 책꽂이에 꽂힌 책 이야기라든가 커튼의 색깔이랄지 구석에 서 있는 화병의 무늬랄지 날씨 얘기 따위만 끝없이 하고 있는 상황. 그런데 그 방에서 “그런데요, 여기 시체가 있는데요”라고 한 아이가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응, 그래. 우리도 알고 있단다”라고 한 다음에 다시 날씨 얘기를 한다. 아이의 눈에는 그게 아무래도 이상하다. “여기 시체가 있다니까요!”라고 한 번 더 외친다. 그러면 사람들이 조금 성가셔한다. “그래! 여기 시체가 있어! 우리도 다 안단다. 그걸 누가 모르니!” 아이는 화가 났다. “저는 이게 무서워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도 별로 좋지는 않단다.” 그리고 그들은 또 날씨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아이는 귀찮게 한다. “이거 전쟁 중이라서 있는 거죠?” 이제는 귀찮다. “그래! 전쟁 중이니까 시체가 있단다.” 아이는 눈물을 글썽인다. “사람들이 전쟁을 안 하면 방에 시체가 없어도 되잖아요.” 그런 아이가 귀여워서 사람들의 표정이 온화해진다. “어유, 그래, 착하고 훌륭한 아이로구나. 하지만 우리가 그런 큰 것에 대해 이야기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니. 우린 벌써 이 시체를 수백 년 동안 보아왔단다. 그냥 다른 얘기를 하자.” 그러고서 그들은 다시 화병의 무늬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화병을 집어던져 깨뜨린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남궁선)
「그래서 김사과는 화병을 집어던진다. 화병이 깨지는 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운다. 정적. 하지만 이내 대화가 이어진다. 다시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가, 아니, 오히려 조금 더 들뜬 얼굴을 한 채, 화병을 던지는 행위가 가져온 어떤 충격과 그것의 행위예술적 가능성과 깨진 화병의 조각이 만들어 낸 예상 밖의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유, 우리가 너를 잘못 생각했구나. 미안하다. 넌 정말 당돌하고 예술적인 아이야. 당장 우리와 계약하지 않을래? 그런데 화병을 던진 이유가 뭐라고? 잠깐만, 여기 화병 하나 더 갖다 줘!”
그들은 안다. 우리도 안다. 무엇이 김사과와 그녀의 인물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다. 방 안에 시체가 있고 세상은 전쟁 중이다. 세상은 전쟁 중이고 방 안에는 시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고도 처절하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금정연)
두 번째는 몇 년 전 시나리오작가 故 최고은(그 죽음이 아사였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죽기 전 ‘남는 밥과 김치’가 혹시 있는지 부탁하는 말을 옆집에 남겼다는 것이다)의 죽음에 부친 소설가 김영하의 SNS 글에 반기를 들고 나선 김사과의 모습. 원래는 평론가 ‘소조’와 김영하 사이의 논쟁이었는데, 김사과가 ‘소조’의 편을 들고 나선 것. 김사과는 한예종 출신이고 김영하의 제자였다. 이른바 ‘주례비평’이라는 조롱섞인 단어로 제일 잘 표현되는 문학계의 꼰대니즘 속에서 스승에게 대놓고 “아니, 그건 아니지 않냐”며 분노한 김사과의 모습은 다양한 반응을 낳았지만, 내겐 적어도 저 사람이 자기 소설의 파괴일변도적 서사들로 ‘어떤 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정말로 화가 났구나, 저 사람은 정말로 분노했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 몰리든 굴하지 않고 자신의 대학시절 스승, 자신의 첫 단행본에 추천사를 써 줬던 자, 한국문학계의 가장 큰 손 중 한 명인 김영하에게도 거침없이 분노를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김영하는 그 후 SNS 절필을 선언했는데, 아마 다른 사람과의 논쟁보다는 제자인 김사과의 공격에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반응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가장 큰 원인이 되었으리라 미루어 짐작한다.
그 ‘문제아’ 김사과의 신작 소설이 나왔다. 「N.E.W.」라는 제목을 달고. 어떤 인터뷰를 읽어보니 작가 자신은 “불륜 소설이죠”라고 초간단하게 대답했다 한다. 오손그룹이라는 재벌가의 사람들(정대철, 정지용, 은미라, 최영주)과 딱 우리 세대의 답없는 청춘들(유튜브 BJ인 이하나, 칼국수집 주인이자 도박중독자인 성공자, 심부름센터의 이우진)을 대치시키고, 이하나와 정지용이 얽혀 벌이는 ‘불륜’ 행각들이 이 소설이 가진 이른바 ‘줄거리’다. 여기까지만 보면 KBS1에서 아침드라마로 방영해도 무방할 스토리라 보여 겁이 나지만, 여기에 특유의 횡설수설하는 대사와 갈지자로 걷는 서사, 신랄하고 떠들썩한 조롱 그리고 ‘엽기적인’ 매듭짐이 얽혀 역시 KBS1은 기우였지… 싶게, 팬을 안심시킨다. 물론 초기작보다는 상당히 유한 편인데 그것이 그녀가 나이든 때문인지 아니면 한국에 살지 않기 때문인지는 당사자만 파악할 수 있는 사정일 것이다.
내가 방금 ‘유’하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말의 칠할 정도는 오손그룹 사람들에 대한 묘사에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기대하는 것처럼 안하무인도, 인간 말종도 아니다. 말 되는 소리들을 별로 하는 것 같진 않지만 어쨌거나 우아하고,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쓸 줄 알며, 차분하다. 오손그룹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놓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는 당황한다. 엥? 이게 뭐야? 뭐 이렇게 유약해? 오히려 속물같아 보이는 것은 성공자나 이우진 같이 이하나의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이다. 이거 뭘까?
그렇게 의아함에 휩싸여 소설을 계속 읽어나가던 중간 부분쯤, 아, 하는 대목이 나온다. 오손그룹 후계자이자 부인인 최영주를 두고 유튜브 BJ인 이하나를 쫓아다니는 정지용의 심중이다(정지용과 이하나가 만나는 초고층 아파트단지의 묘사에선 영화 「하이-라이즈」가 겹쳐졌다.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어 결말에선 어불성설이 된 느낌이 된 영화이긴 하지만, 강렬한 이미지와 빈부격차에 대해 촌스러울 만큼 앞뒤 안가린 돌직구만으로도 이 영화는 시간을 내어 볼 만 한다). 꽤나 인상깊은 단락이어서 오래 두고 다시 읽었다.
「물론 정지용은 둘 다 좋았다. 잘 못 자고, 잘 안 먹는 최영주는 어딘가 모르게 우아한 왕비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고, 반대로 잘 먹고 잘 자는 이하나는 성격 좋은 커다란 개 같은 느낌이라 좋았다. 정지용은 우아한 왕비 최영주와 함께 성격 좋은 개 이하나를 키우는 상상을 했다.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기사로, 뉴스로 그들을 접하면서 항상 분노했다. 고작 견과류 때문에 비행기를 돌린 자. 무슨 설치류의 환생이라도 되는가? 그 자의 가족들도 생난리를 피우더니 그 경쟁업체에선 으앗 나도 질세라 여자들에게 빨간 꽃을 들고 춤을 추게 만들었다. 더 이전으로 가보자면, ‘집에 돈많은 것도 내 능력’이라던 기마민족의 후예에게 어느 대학의 학생들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 뒤집어 까발린 나라의 작태들이 있었다(정지용. 이름도 비슷하지 않나? 뭔가 현대가와 삼성가의 결합 같은…). 그리고 그들이 최대한 얌전한 옷을 입고 고개를 숙인 채 걸을 때 흘끗흘끗 보이는 얼굴에서 사람들은 반성의 기미를 볼 수 없다고 외쳤다.
아니,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뭘 반성해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정지용의 이 말이 우리에겐 중요하게 다가온다(후반부에서 아버지인 정대철이 철가방 운운하며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직설적이라서, 정지용의 비유가 훨씬 더 ‘우아’하다고 나는 믿는다). 유튜브 BJ이자 자신의 불륜 상대인 이하나는 개다. 잘 먹고 잘 자는, 키우고 싶은 개. 개는 잘 돌봐주면 그만이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면 성대를 제거한다. 발정이 와서 힘들어하면 중성화수술을 시킨다. 나 인간이 사랑하는 개와 이 집에서 함께 사는 방법은 그것밖엔 없으니까. 개도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겠지(그리고 정지용은 이하나의 팔을 잘라 먹는다. 예? 예, 먹습니다.).
…애시당초 개는 인간인 내가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 것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비유에 대해 모욕감을 느끼고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치들이 우리를 ‘개’로 생각할 것이라는 나의 추측의 잘못됨을 따지고 들 수도 없을 것이다. 보고 들은 것이 한둘이어야지. 그렇다면 그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한 단어는 무엇인가? 인간? 절대 아니다. 동물? 그게 바로 개잖아. 생명체? 당신은 이렇게 피식자로서 살고 싶었는가?
그래서 김사과는 말한다. ‘우리 모두는 유령’이라고. 최신식 황무지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동거하는 ‘유령’이라고. 유령에겐 삶이 없으니. 무게도 의미도 없으니 말이다.
김사과의 책을 모두가 읽으라고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예쁜 글이 좋고 희망찬 내용에서 용기를 얻는 독자들이 서점에서 홀로그램이 씌워진 화려한 표지에 혹해 이 책을 집는다면 나는 주먹질을 해서라도 빼앗아 달아날 것이다. 그들이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들에게도, 김사과에게도 못할 짓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어딘가 균열이 있다는 느낌을 받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그 균열을 찾기조차 못할 거라는 절망감이 들고, 왜 사람들은 아무도 그 밑에 뭐가 있는지, 어디가 무너지고 있는지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가 의문이 든다면, 김사과의 글들을 초기작부터 차근차근 읽었으면 좋겠다. 정지용 왈, “아버지, 지금까지의 아버지 생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요,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새로운 세계에 걸맞은 환상이요.” 저런 환상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난 요새 ‘소확행’이라는 말이 소름돋고 듣기 싫어 죽겠다), 괴롭고 두렵고 가끔은 역겨워도 읽었으면 좋겠다.
어떤 아이가 ‘여기 시체가 있다’고 오래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누군가는 거기 귀를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