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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싱 - 인간과 바다 그리고 물고기
브라이언 M. 페이건 지음, 정미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6월
평점 :
이 책을 다 읽었을 때는 월요일 새벽 세 시였고 지금은 네 시 이십분이다. 책을 다 읽자마자 노릇한 삼치구이를 곁들여 소주 한 병을 못 견디게 마시고 싶어졌고 삼십 분간 근처의 24시간 생선구이집 따위를 검색했으며(있을 리가 없잖아! 동태탕도 아니고!!) 삼십 분간은 이불에 누워 잠을 자려 안간힘을 썼다. 안간힘을 쓰며 생각했다. 왜 난 지금 생선구이를 먹으면 안 되는가. 대회나간다고 감량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내일 아침 출근해야 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1분 거리의 gs25에선 가끔 간편 삼치구이를 팔고, 냉동실에는 훈제연어가 있다(훈제연어 구이도 조금 짜지만 먹을 만 하다). 결국 수면에 실패한 채 네 시에 일어나 gs25에 갔고, 삼치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돌아와 훈제연어를 구웠다. 새벽 네 시 이십분, 구운 훈제연어에 소주를 마시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나는 인문서를 읽고 안주를 생각하는 나를 후려갈기고 싶다. 일단 훈제연어를 다 먹고 갈겨보겠다.
어린 시절 할머니댁이 충남 태안에 있었다. 읍내도 아니고,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다니는 깡촌이었다. 할머니댁에서 나와 왼쪽으로 오 분 걸어가면 고운 모래의 백사장이 나왔고, 오른쪽으로 삼 분 걸어가면 돌과 바위가 가득한 바닷가가 나왔다. 차례상 위에 육고기라곤 말라비틀어진 산적밖에 없었지만 생선은 넘쳐났다. 꼬리와 머리가 구분가지 않는 못생긴 아이들, 손으로 죽죽 찢어 먹으면 고릿한 손 냄새가 이틀은 가는 아이들. 내 세대는 듣도 보도 못했을 생선과 조리법들을 어려서부터 당연한 듯 보고 자랐다(이 동네 사람들은 생선 머리, 뼈, 꼬리를 발효시킨 후 하얗게 고아 먹는다. 어촌 버전 곰탕인 셈인데, 도시 아파트에서 끓이면 냄새 때문에 항의가 들어온다). 생일이 되면 할머니가 직접 딴 자연산 미역으로 미역국을 끓여 먹었는데, 마트에서 파는 미역과는 ‘종’ 자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반투명한 빛깔에 혀에 얹으면 그대로 녹으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씹지 않아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 ‘바다의 풀’이라기 보단 차라리 아주 부드러운 멍게 같은 식감의 자연산 미역을 먹었다. 그땐 그게 그렇게 귀한 것인지도 몰랐지만. 이제 다시는 먹을 수 없지만.
지금 내 나이대의 친구들 중에서 해산물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걸 생각하면 어촌에 익숙한 나는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뭐래도 육고기보단 생선이지.
생선이 가지는 매력 중의 하나는, 저자인 브라이언 페이건이 이야기했듯 그것이 ‘인간의 기회주의적 속성에 기댄’ 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양식되는 종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현대사회에서도 생선은 ‘포획되는’ 대상이다. 우리가 소나 돼지를 사냥해서 먹어야 한다고 상상했을 때 오는 막연함과 절박함이, 기원전에서부터 생선을 대상으로는 당연시되어왔던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 지금까지도 ‘물고기’라는 식량을 더욱 흥미롭게(혹은 입맛을 들이기 함들게) 만드는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그 속성 때문에, 기회를 잡아 포획해야만 누릴 수 있는 속성 때문에 다른 식재료와는 조금 차별화된 방식으로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 발전해온 방향을 논할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네안데르탈인, 국사책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조개무지, 발트해와 도나우강, 이집트, 지중해, 크메르족,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전세계를 아우르며 어획이라는 키워드로 인류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은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사흘만에 모두 읽을 정도. 번역 또한 난해하지 않고 매끄럽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인문서의 미덕이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아마 세계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에게는 매우 즐거운 독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까도 이야기했듯, 사람의 의도대로 성장하고 얻게 되는 식재료와, 생선처럼 ‘운이 좋아야’ 얻을 수 있는 식재료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의 삶과 인류의 발전은 전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종족별로, 연대별로 다른 생선 포획 방법에 대한 상세한 안내도 매우 흥미롭고, 가끔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안타까운 것은 이 매력적인 인문서의 후반부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한 바다의 위기로 결말지어진다는 것이다. 브라이언 페이건은 ‘어장량을 회복하려면 전세계가 아직까지 유례없는 높은 수준의 정치적 의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일갈하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쩌면 한두세대 이후 우리의 자손들은 해산물의 기름지면서도 상쾌한 바다 맛을 모르게 될 수도 있다. 절망적이다.
딱딱하지 않은 인문서, 흡인력 있는 인문서로 추천한다. 실은 ‘저는 앞으로 글을 쓸 건데 이런 책도 많이 읽어서 최대한 많은 글감을 얻고 싶습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출판사에서 책을 받았다. 정말 거짓된 이유다, 나 자신이 가증스럽다, 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얻은 정보로 습작을 두 편이나 썼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