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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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한창 오르한 파묵의 <내 마음의 낯섦>에 빠져 있었다. 이스탄불을 누비는 마지막 보자 장수의 삶을 담은, 650쪽에 육박하는 두툼한 소설이었다. 동시대에 아직 살아있는 거장이(어린 시절, 소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본가의 책장에도 <내 이름은 빨강>은 꽂혀 있었다) 계속해서 신작을, 매우 활발히 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또 무지하게 재미가 있었다. 거듭 읽으며 감탄하고, 또 한 번도 가지 못해본 이스탄불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은 스카이스캐너에서 이스탄불 가는 비행기표도 자주 검색해보고 그랬는데, 그때마다 인간아 너는 곧 사표를 내고 내년에 백수가 될 것이니 돈을 아껴라며 스스로를 야단쳤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이번 여름엔 이스탄불에서 보자를 마시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의 신작이 또 나왔다. 또다시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한다. 자주 이야기해왔던 터키의 급격한 변화, 그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세대간의 갈등은 여전히 화두로 남겨둔 채, 좀더 마술적인 요소를 추가했다. 신화와의 접목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부친 살해), 조금 생소한 페르시아의 뤼스템과 쉬흐랍 이야기(아들 살해)를 엮어, 마치 거울에 비춘 듯한 두 신화가 서로의 힘을 겨루며 엎치락뒤치락 하는 모양새를 터키의 세대갈등에 그대로 투영시켰다.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이다.

가정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 없이 자란 는 학비를 벌기 위해 우물 파는 장인 우스타의 조수로 들어간다. 일하는 동안 는 우스타를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존경과 증오를 동시에 가지게 되는데(존경과 증오-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든 자식들이 부모에게 갖는 양면적인 감정일 것이다), 뜻밖의 사고로 인해 우스타를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고 도망치게 된다(오이디푸스의 부친 살해).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이다.

그리고 1부에서, ‘와 독자는 빨강머리 여인과 마주하게 된다. 거의 삼 세대를 아우르며 터키의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 있던 빨강머리 여인은 에게 어머니와 동일시되는 대상인데, ‘1부에서 사실상의 오이디푸스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와 빨강머리 여인 사이의 관계 역시 이를 반영하게 되며, 거기서 파생된 결과가정확히 말하면 하필 또 아들이 생겨서2, 3부를 걸쳐 새로운 신화를 다시 만들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동양과 서양에서 이토록 닮은, 또 상반된 신화가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 본성의 공통점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일 수 있다. 그러니 그 동서양의 신화를 모두 담은 소설이 동서양의 중간지대인 터키에서 터키인 작가에 의해 쓰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운명일 수밖에 없겠단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는, 서양의 오이디푸스는 부친을 살해하고, 동양의 뤼스템은 아들을 살해한다는 면에서 동서양의 정서 차이를 엿볼 수 있다는 느낌도 가지게 되는데, 그렇다면 부친을 살해한 가 훗날 터키의 민족주의를 거스르고 유럽적인 개인’, 혹은 유럽 스타일의 사업가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 다음에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서양 신화와 동양 신화의 전면충돌인데, 여기서 쓰기엔 너무 큰 스포일러가 될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버지의 권위만큼이나 우리 보편적 생에 걸쳐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몇 개나 있을까(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내 개인적으로는, 자라며 배운 모든 권위를 스스로 깨는 노력만이(깨고 나갈 것인지, 아니면 수긍하고 다시 덮을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성장과 자아확립의 발판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되게 장황하게 썼는데, 그냥 쉽게 말하면 살아온 내내 아빠 말 드럽게 안 들었다는 소리가 되겠다. 소설의 말미에는 이런 단락이 나온다.

 

당신과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하나요, 사랑하는 아버지?” 그는 조롱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내가 순종적인 아들이면 유럽적인 개인이 될 수 없지요. 유럽적인 개인이면 이번에는 순종적인 아들이 될 수 없고요. 날 좀 도와주시지요.”(p.323)

 

이 요구에 대해 부친은 나의 아들이라면 성숙한 개인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했을 거야라고 씨알도 안 먹힐 대답을 한다. 이는 뤼스템과 쉬흐랍 신화에서 아버지인 뤼스템의 비겁성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쉬흐랍이 먼저 뤼스템을 쓰러뜨리지만, 노장인 뤼스템은 상대를 두 번 쓰러뜨린 후 목을 베는 것이 미덕이며 예의라고 쉬흐랍을 꼬드긴다. 그러면서 본인이 쉬흐랍을 쓰러뜨린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숨통을 끊는다). 결국 오르한 파묵은 어느 정도는 그가 오이디푸스 형이든, 쉬흐랍 형이든 아들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1부에서 아들이었던, 그리고 2부에서 아버지가 된 에 대한 작가의 태도 변화가 두드러진다는 인상도 강하다), 다만 이전 세대에 대한 추억이 담긴 연민어린 시선을 항상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굳이 신화 이야기를 더 이어가지 않더라도, 역동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이스탄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말해 뭣해할 정도로 당연한 마스코트라서, 이 책 역시 또한번 내게 스카이스캐너를 검색하게 만들었다(인간아너는 백수생활을 오래 할 몸이니 자제해라). 다만 이번엔 알콜이 소량 함유된 발효유인 보자가 아니라 도수 45도인 증류주 라크를 마시고 싶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심지어 숙취가 엄청나다고 한다. 자고로 숙취가 엄청난 술이란 죽기 전에 꼭 마셔봐야 하는 것이다.

 

) ‘사실 네 아버지도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단다라는 마지막 문장엔 엄청난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

 

덧덧) 읽다가 현웃터진 부분이 하나 있어서 함께 올린다. 세상 사람들 다 똑같나보다. 나도 연애라는 것에 이런 환상을 가졌었다. 서른 들어서 완전 접었다.

때때로 우리가 함께 책을 읽은 후 입맞춤을 하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젊은 시절 어떤 이상을 위해 함께 흥분하며 책을 읽었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아버지에 의하면 가장 커다란 행복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다른 누군가의 행복에 대해 언급할 때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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