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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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책을 만났다.

파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책을 보는 내내 수없이 많은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 작품의 매력 포인트는 무엇일까? 먼저 대단히 신선한 소재가 압권이다. 그리고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영화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처음에는 작품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이런것이 아닐가 생각했다.

생태계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대립하지만 공존하는 관계를 보여주는 일종의 교훈.

사실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가장 표면에 내세우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많은 위험으로부터 이겨내고 버텨내면서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훈훈함이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속에는 종교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는데, 유난히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무신론자들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을 상상할 수 있다.

"하얗군, 하얀색이야! 사-사-사랑! 아, 하느님!" 죽으면서 믿음이 생긴다.

반면에 불가지론자들이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메마르고 누룩 없는 사실주의'를 지탱할 수 있다면,

몸을 감싸는 따스한 햇살에 "뇌-뇌-뇌의 상소가 부-부족하군" 이라고 하리라. 마지막까지도 상상력 부족으로 더 좋은 이야기를 놓치고 말겠지. - P 87

 

위 글에서 보면 기적에 필요한 것은 신의 도움이지만 결국 그 기적을 완성시키는 것은 인간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무신론자 조차도 종교인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죽는 순간까지 신이 아닌 곳으로 갈지 아니면 그대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라고 해도 믿음이 곧 종교라는 것이다.  

 

후반부에서 이 작품의 진가가 나타난다.

생생한 묘사와 상어와 호랑이의 싸움이라는 동물학자들 조차도 검증하기 힘든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리얼리티까지 상상의 나래를 편다. 바다거북을 칼로 발라내서 컵에 피를 먼저 받아 마시고(비린내가 안나고 시원하다고 한다) 시식하는 장면 또한 제법 그럴싸하지만, 거북을 먹어본적 없는 사람들로써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길이 없다. 하지만 광활한 바다와 어울어지면 멋지게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는 있다. 그것은 모비딕에 주인공 이슈메일이 돛의 맨 윗부분인 경계초소에서 혼자 밤바다를 보면서 감상에 젖는 부분을 뛰어넘는 매력적인 부분이다.

 

파이는 과연 어떻게 호랑이와 단둘이 227일동안 공존할 수 있었을까?

 

 

내가 바다에서 동물을 조련하고 목숨을 건졌다면, 그건 리차드 파커가 날 공격하고 싶어하지 않은 덕분이다. 호랑이는, 아니 모든 동물은 우위를 가리는 수단으로 폭력을 쓰려하지 않는다. 동물이 맞붙어 싸울 때는 죽이려는 의도가 있는 경우고, 이대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잘 안다. 충돌에는 큰 희생이 따른다. 그래서 동물들은 최후의 대결을 피할 의도로 경계하는 신호체계를 갖추고 있다. - 257

 

작가의 이런 설명이라면 호랑이와 함께 살았다는 것에 납득하지는 못해도 아주 매몰차게 부정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리차드 파커는 호랑이의 이름이다. 이름이 이 책의 재미있는 볼거리 중에 하나다. 주인공의 이름은 파이(3.17)이고 호랑이의 이름은 잡은 사냥꾼의 이름이 잘못 전달되서 만들어진 리차드 파커인 것이다.

 

3부로 넘어가면서 작가는 갑작스럽게 쌩둥맞은 이야기를 거낸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한다.

'호랑이가 진짜 인간과 지낸다는게 가당키나 한걸까?'

 

모비딕과 로빈슨크루소를 읽고 비슷한 무언가를 더 읽고 싶었다면 꼭 읽어보라. 그리고 영화의 아름다운 영상도 놓치지 마시길. 

다 읽은 지금 이야기의 내면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주변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책은 파이의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긴 여운을 주체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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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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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만 봐서는 알수없는 게 사람인 것 처럼,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보면서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펼치기 전에는 온갖 편견이 있게 마련이다. 표지가 이쁘면 이뻐서, 후지면 후져서. 그렇다고 책장을 넘겨봐서 알수있는 것은 또한 아니다. 비로소 100페이지 정도는 읽어봐야 비로소 나한테 맞는 책인지 알수 있게 된다.

프루스트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비슷한 생각을 언급한 바 있다.
"내게 새로운 책이란 그 책과 유사한 많은 것들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 이유가 있는 유일한 사람 같았다.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많은 편견을 갖고 있었음을 반성하게 만든 책이다.  

너무도 유명하고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았던 상황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잘생긴 남자가 나온다는 줄거리가 개인적으로 맘에들지 않았고, 결과도 뻔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내 생각은 잘못 된 것으로 드러났다.

 

오스카와일드는 첫 문장에서부터 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것에서 추한 것을 찾아내는 사람은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타락한 사람이다. 이건 잘못이다.
아름다운 것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교양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들은 선택받은 사람들로, 그들에게 아름다운 것들은 오롯이 아름다움만을 의미한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책은 헨리 경의 헨리 경을 위한 헨리 경에 의한 작품이다. 그는 순진한 도리언 그레이를 악으로 빠지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의 황홀한 언변은 성경책 못지 않은 인생의 통찰을 담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마치 다이하드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말이다.

 

 

브루스 윌리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는 배짱과 근성을 지닌 존 맥클레인 형사역할을 맡아서 영화의 성공을 크게 견인했다. 특유의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키며 구군분투하는 브루스 윌리스의 냉소가득한 유머가 없었다면 다이하드의 지금과 같은 인기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의 관전포인트도 다이하드와 다르지 않다.

책을 펴는 순간 헨리 경의 화려한 언변을 보는 것 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진 독서를 경험 하게 될 것이다.

 

헨리 경은 인생의 목적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생의 목적은 자기 발전이오.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실현시키는 것, 그것이 이곳에 있는 우리들의 존재 목적이지요.

요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두려워해요. 모든 임무 가운데 최고의 임무인 자기 자신에 대한 임무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오. 물론 사람들이 자비심이 있기는 해요.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거지들에게 옷을 입혀주니까. 하지만 그들 자신의 영혼은 굶주리고 벌거벗은 채로 있어요. 우리 인간이라는 족속에게는 용기가 사라진지 오래요. 어쩌면 애초부터 그런 게 없었는지도 모르지. "


 

또한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도리언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가 남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기를 바라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을 염려하기 때문이라네. 낙관주의의 밑바탕에는 순전한 공포가 깔려 있거든.
우리가 스스로 관대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우리의 이웃이 우리에게 득이 될 것 같은 미덕의 열정을 지녔다고 믿기 때문이라네.
우리가 은행가를 칭찬하는 건 혹시라도 우리가 계좌 금액을 차월할지 모르기 때문이야.
노상강도가 우리 호주머니 사정을 좀 봐줄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그에게 아부를 하는 것처럼 말일세.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심이라네. 난 낙관주의를 가장 경멸하지. 삶을 망친다는 점에 관해서라면, 자신의 성장에 발목이 잡히지만 않는 한 삶을 망치는 경우란 없는 거야.
사람의 본성을 훼손하고 싶으면 단지 그걸 교정하기만 하면 되네."

 

내가 활동하는 북카페의 어떤 분이 오스카와일드를 유미주의자라고 언급한 바 있다. 정말 딱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와관해서는 어떤 책에서 오스카와일드에 대한 일화를 소개한 글을 본적이 있다. 그가 공항에서 세관 직원한테 저지를 당했다. 직원은 혹시 신고해야할 물건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때 오스카와일드가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저의 고고한 천재성을 빼고는 달리 신고할 것이 없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작가는 헨리 경의 입을 통해서 이러한 자신의 아름다운 언어적 통찰을 거침없이 선보인다. 확실히 글을 아름답게 쓰는데에 철저한 노력을 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글을 맛깔나게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권 소장하기를 권한다.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는데 너무도 멋진 말이 많아서 후회하고 당장 서점에 달려가서 사버렸을 만큼 빌려보는 당신을 후회하게 만들 것이다.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헨리 경의 말들이 읽어도 읽어도 잠언같이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매혹적인 사람이 되는 법에 관한 헨리 경의 명언을 소개하면서 마칠까 한다.

"정말 매혹적인 사람들은 딱 두 부류야. 모든 것을 철저하게 다 아는 사람하고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이렇게 딱 두 부류라고. 저런, 저런, 그렇게 비극적인 표정 짓지말게!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은 절대 격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을 품지않는 데 있단 말일쎄... "  

P.S. 책의 번역본에 관하여.

이 책을 읽으면서 펭귄클래식에서 나온 작품도 함께 봤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세계문학시리즈여서 실제 구매는 펭귄클래식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정한 출판사의 번역이나 번역자에 대한 편견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아름다운 문체가 최고의 강점인 이 책을 특히 직역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번역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는 열린책들의 윤희기 번역이 매우 만족스럽게 다가왔다. (펭귄께는 죄송.. 다른 번역에서는 그런 느낌이 없었는데 ㅠ.ㅠ)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인생의 목적은 자기 발전이오.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실현시키는 것, 그것이 이곳에 있는 우리들의 존재 목적이지요.

요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두려워해요. 모든 임무 가운데 최고의 임무인 자기 자신에 대한 임무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오. 물론 사람들이 자비심이 있기는 해요.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거지들에게 옷을 입혀주니까. 하지만 그들 자신의 영혼은 굶주리고 벌거벗은 채로 있어요. 우리 인간이라는 족속에게는 용기가 사라진지 오래요. 어쩌면 애초부터 그런 게 없었는지도 모르지. " - 열린책들

 

"인생의 목적은 자기계발이거든요.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깨닫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유인 셈이라오.

오늘날 사람들은 본래의 자기 자신을 겁내고 있어요. 그들은 가장 지고한 의무를 잊어버린 거죠. 자신의 자아를 소유하는 의무를 말이죠.

물론 그들은 자비로운 사람들이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거지에게도 입을 것을 주니까. 그래도 자신의 영혼은 굶주리고 헐벗는단 말이오. 우리 인종에게 용기는 사라져버렸다오. 아마도 우린 진정한 용기를 지닐 수 없을 거요." - 펭귄클래식  

모든 번역본을 다 훑어보지 못해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펭귄클래식의 문장은 왠지 가독성이 좀 떨어지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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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2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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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재산이다


<크리스마스 캐롤>로 잘 알려진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만화 또는 영화 등의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접했을 만큼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원전 완역판을 읽을 기회는 많지 않다. 이 책을 선정한 오서경, 정은주 두 분 역시 축약된 문고판으로 이 책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이처럼 대중성도 있고 예술성도 뛰어난 것으로 잘 알려진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861년)은 핍이라는 어린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그린 고전 명작중의 명작이다. 국내에는 ‘위대한 유산’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제의 뜻은 ‘유산’ 자체가 아니라 ‘유산에 대한 큰 기대’이며, 동시에 당시 사회에 만연한 물질적 기대감을 가리킨다.

사회적 상승욕은 숱한 근대 서구 문학작품의 주제였는데, 이 작품 또한 ‘신사(gentleman)되기’라는 차원에서 같은 주제를 다룬 성장소설이라 할 만하다. 디킨스 당대의 이상적 인간상인 신사는 구시대의 귀족적인 이상과 부르주아적 이상이 결합된 사람으로, 일정한 재산과 교양에다 ‘신사다운’ 덕목을 두루 갖춰야 했다. 이는 서유럽에서도 가장 먼저 시민혁명을 일으켰지만 귀족계급과 근대 시민계급의 부단한 타협을 통해 진행된 영국 근대사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신사는 일정한 재산과 사회적 신분에 따라 정해지는 지배집단으로서 계급사회 특유의 배타성과 가부장적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주인공인 핍은 대장장이인 매형 조 가저리의 도제로 몇 년을 보내다 런던으로 가서 신사 수업을 받게 된다. 이런 행운은 그가 어린 시절 우연히 도와주었던 탈옥수 매그위치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유형지(流刑地) 호주에서 크게 성공해 번 돈을 그에게 몰래 보내 주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핍은 자신의 후원자는 그가 짝사랑하는 에스텔라를 양녀로 기르는 미스 해비셤일 거라고 근거 없이 추정하며 자기기만의 거만한 길로 빠진다.


핍의 신사 수업은 진정으로 덕목과 실력을 갖추는 과정과 무관하다. 오히려 신사의 속물적 세계에 동화되어 가던 핍 앞에 어느 날 매그위치가 갑자기 나타난다. 핍은 그동안 자신을 후원해 준 사람이 매그위치라는 것을 알게 돼 큰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비로서 은인을 저버리지 않는 인간성을 회복하게 된다. 회한 속에 큰 병에 걸려 누운 핍을 조가 멀리 찾아와 극진히 간호하고 심지어 빚까지 갚아 준다. 자신의 속물성을 뼈저리게 깨달은 핍은 외국에서 사업가로서 노력하여 성공하게 된다. 또 자신이 짝사랑하던 에스텔라가 첫 결혼에 실패한 뒤 과거와 달라진 모습을 보게 된다. 핍은 런던 사교계의 화려함 뒤에 숨은 차별과 착취의 현실을 통해 단련됨으로써 조의 세계가 가진 현실적인 무력함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계의 인간다움을 간직한 원숙한 인물로 남는 것이다.


2. 위대한 유산에 대한 다양한 해석


읽는 과정에서 이 작품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두 편을 보았다. 한편은 원작에 최대한 충실하게 만든 영국 데이빗 린 감독의 1946년도 작품이고, 다른 한편은 미국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1998년에 만든 작품이다. 이 두 영화는 위대한 유산이 무엇인지 각기 다른 해석을 내려서 오히려 나의 독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어린 핍을 그리는 초반부를 제외하면 작품은 전체적으로 당대 사회의 낙관적 분위기와 판이한 환멸의 정조가 지배하며, 신사의 이상이 어떻게 탐욕이나 범죄와 직결되는지를 가차 없이 해부한다. 그러나 에단 호크와 기네스 펠트로가 주연한 1998년도 작품에서는 그야말로 누군가의 도움으로 뉴욕에서 미술작품전을 열게 되고 이를 통해서 속물적인 성공을 쟁취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환호한다. 더욱이 작품 전체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평가할 수 있는 우리의 진정한 신사 조 가저리는 시골 어딘가로 쫒겨날 뿐 아무런 교훈도 주지 못하는 이른바 조연에 머물러버린다. 감독은 아마도 위대한 유산을 할아버지의 재산쯤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돈을 좋아하는 나 역시 그런 돈만큼 위대한 것이 무엇일지 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한 그야말로 헐리우드 식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미국식 한방주의 해석이 가미된 영화를 보면서 한심한 마음이 드는 것은 10년 사이에 내가 변한 걸까 사회가 변한 걸까. 변하지 않는 것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 대한 그 정신 하나뿐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찰스 디킨스가 이야기하는 위대한 유산이란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를 좀 더 고민하며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는 유산을 통해서 런던(또는 뉴욕)생활을 하는 주인공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원작에서 매그위치가 지원해준 돈은 핍에게 절대로 위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대장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고백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작은 호의가 그를 새로운 희망에 젖어들게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마저 작가가 비평하고자 하는 시대의 속물정신을 고스란히 담아 낸 이른바 반전의 장치에 불과하다. 앞서 본 영화들에서는 간과했지만 허버트에게 몰래 투자한 호의가 결국 자신의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는 부분 또한 매그위치의 호의와 더불어 이 책의 핵심주제가 아닐까 한다. 결국 인생은 베푸는 만큼 돌려받는다는 점, 그리고 유산은 전혀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서 내려지는 행운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주는 노력의 결과라는 점을 찰스 디킨스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올릭 영감의 고백을 통해서 밝혀지는 누나 죽음의 원인이 핍이라는 점 역시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주제가 작품 전체에 퍼져 있음을 강하게 뒷받침 해준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산다. 행복의 골짜기를 떠나 행복을 찾아 떠나는 라셀라스 왕자처럼 나 또한 행복을 항상 열망한다. 그런데 많은 문학작품들에서는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고 조언한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도 이와 다르지 않은 교훈을 제시한다. 핍이 원하는 행복은 런던이 아닌 고향 존의 집에 있었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나는 언제쯤 그것을 깨닫게 될까? 궁금해진다.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훈계성의 주제를 지루하지 않고 20분에 한 번씩은 웃게 만들어준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고전은 재밌어야 한다는 모토에 부합하는 정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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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세트 - 전3권 펭귄클래식
샬럿 브론테 지음, 류경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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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을 읽는 이유

'<제인 에어>이 주는 감동이 너무 강렬하다'는 표현이 주변 동료들에게는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된다. 워낙에 연애소설 부류로 잘 알려진 작품이고, 나 또한 간지러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일부러 이 작품을 오랫동안 피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구개발팀의 오서경 팀장은 이런 나에게, 어른으로서 의젓해야 할 남자가 10대의 소녀들이나 좋아했을 법한 감성적인 문학작품에 너무 심취하는 것 아닌가 하고 놀리기도 했다. 얼핏 들으면 불쾌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몇 년 전에는 그런 부분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던 나로서는 불쾌하기 보다는 이런 나의 모습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내 또래의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문학작품의 참 맛을 깨닫기 전에는 언제나 자기계발서를 더 많이 읽었다. 광고관련 서적 또는 마케팅 서적이 주류였으며 책은 정보를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문학작품에만 너무 몰입해서 읽어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생소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5대 장편은 이미 보았고, <서머싯 몸>의 책들도 주요 작품은 다 읽었다. <톨스토이>도 작가정신에서 나온 시리즈를 사 모으고 있다. 그러면서 진정한 명작을 만나면 언제나처럼 가슴이 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두 번 읽었으며, <개밥바라기별>, <엄마를 부탁해>와 <로빈슨 크루소>는 여러 권씩 사서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아직도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고 났을 때의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각 출판사들의 세계문학전집을 비교 분석하기까지 이르렀다. 마치 학교 다닐 때 프라모델 류 사 모으던 느낌 또는 만화책에 미쳐서 읽어대던 모습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문학작품에 소위 말해서 꽃힌 것이다. 어느 순간 이게 왜 이런가 싶고, 너무 학생 같고, 어색한 시점에 도달해서야 스스로 물어보기로 했다. 감동 같은 것은 느낀 지 오래되고, 즐거움이라고는 돈 버는 것이 전부이며, 회사와 집을 오기는 지루한 삶을 살던 나에게서 왜 문학작품이 이렇게까지 좋은가. 이게 정상적인가.

그러던 중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발간사를 보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류가 무지와 몽매의 어둠 속을 방황하면서도 끝내 길을 잃지 않은 것은

세계문학사의 하늘에 떠 있는 빛나는 별들이 길잡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부심과 사명감 속에서 그리게 될 이 새로운 별자리가 독자들의 관심과 애정에 힘입어 우리 모두의 뿌듯한 자산이 되기를 소망한다.


세계문학사의 하늘에 떠있는 빛나는 별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최근 입시제도 변화로 인해 불어오는 독서열풍은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나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소견이다. 어린 시절의 독서가 비단 지식을 쌓는 데에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독서의 중요한 역할은 오히려 지식의 전달에 못지않게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해 주는 것이다. 학생들의 경우로 확대해석한다면 독서를 통해 스트레스를 날리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되는 재충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책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으로서 독서교육이 강조되기를 희망한다.



2. <제인 에어> 쇼크의 원인

<제인 에어>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이 같은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여성소설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작품이 나에게 이렇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는 사실의 정확한 근원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마지막부분에 극적으로 다시 로체스터를 찾아나서는 제인 에어. 그리고 상황이 나빠진 로체스터와의 결혼. 이 부분이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정말 상상도 못했던 결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의 꿈과는 멀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20대에 반드시 이상형을 만나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결혼을 마냥 미룰 수만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제인 에어는 이 모든 현실적인 상황에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않는다. 존 리버스의 끈질긴 구애도 과감하게 물리쳐버리고 자신의 사랑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진정한 자신의 사랑인 로체스터를 찾아 떠난다. 다시 찾은 로체스터는 실명하고 한쪽 손마저 잃었다. 모든 절망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고 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는 꿈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인의 이러한 용기는 당시가 19세기라는 사실과 그가 여자라는 사실을 떠나서 정말 과감하고 놀라운 행동이다. 자신을 학대하는 사촌 오라버니를 때리고, 리드부인에게 대들고, 로체스터에게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이 아가씨보다 나은 점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 하나 있을까.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어울리면서 살기를 바라고 원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단순히 페미니즘 소설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나 이 소설을 연애소설로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역시 옳지 않은 생각이다. 인간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바탕이 된 인간주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나는 청소년 시절과 청장년 시절 중 절반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불행에 빠져 지냈고 나머지 절반은 쓸쓸한 고독 속에서 지냈소. 그러고 나서야 내가 진정으로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을 난생처음 발견하게 된 거요.

바로 당신을 발견한 거요. 당신은 나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오. 나보다 더 훌륭한 내 반쪽이고 내 착한 수호천사요. 나는 당신에게 강력한 애착으로 속박되어 있소.

나는 당신을 착하고 재능이 있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타오르는 진지한 사랑이 내 가슴속에 잉태되었소.

그 사랑이 당신에게 쏠리고 있고, 당신 주변을 내 삶으로 감싸주고 있소. 그리고 그 사랑이 순수하고도 강력한 불꽃으로 타오르면서 당신과 나를 녹여 하나로 융합시키고 있소."


제인 에어가 떠날 것을 두려워하여 솔직히 고백하는 로체스터의 이 같은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까지 하다.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에서 볼 때 그의 애틋한 마음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것이다. 이 고백 이후 제인은 집을 나서서 로체스터로부터 도망친다. 제인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로체스터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 불쌍한 로체스터. 그는 분명 그녀가 떠난 것을 알고 난 그날 아침에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펐을 것이다. 아마 하루 종일 펑펑 울었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서 불이 났을 때 아내가 떨어져 죽자 함께 죽으려고 불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버텼는지 모를 일이다. 제인은 그에게 외롭고 고독한 인생에서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젊은 시절 아무리 놀러 다니고 향락에 취해서 지냈다고 해도, 사람이란 진정으로 사랑을 주고 받으며 상처를 매만져줄 수 있는 공감의 대상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인정받고 싶고 감싸주고 싶고 공감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샬럿 블론테는 제인 에어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을 찾아볼 참이다. 이 책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었기에 중반까지 읽다가 포기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다. 고전은 영원한 인류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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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8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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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쥘리앵의 머리를 보며 오열하는 그의 애인 라몰양
 

소설이란 큰 길을 가면서 둘러메고 다니는 거울 같은 것이다.
그 거울에는 때로 푸른 하늘이 비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길에 팬 진창이 비치기도 한다.
사람은 그런 거울을 등에 둘러메고 다닐 뿐인데 독자여러분은 그 사람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하다니!
거울에 흙탕물에 비치는 것일 뿐인데 그 거울을 욕하다니!
그보다는 차라리 진창이 팬 큰길을, 아니 그보다 흙탕물이 고이도록 방치한 도로관리인을 비난해야 할 것이다.
- 스탕달 - 
 

이 문장은 ‘적과 흑’ 중간에 나오는 독자에 대한 작가의 호소문이다. 그러면서 작가가 이 작품을 쓸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기도 한다. 
 

1830년의 연대기라는 부제를 단 ‘적과 흑’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상황을 유심히 살펴보면 상당히 복잡하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권력은 부르주아층이 가지게 되며 귀족은 그냥 명맥만을 이어가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대혁명 당시에는 노동자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이 혼재된 상태로 계급투쟁을 하였지만 이러한 시민계급 혁명이 완성된 후 플롤레타리아 계급의 소외를 통해 또 다른 계급투쟁이 시작된다.

스탕달의 ‘적과 흑’은 바로 부르조아와 귀족이라는 두 계층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주 강렬한 단절면에서 존재한다. 주인공 줄리앙 소렐은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람이다. 그는 작품 전체를 통해 크게 두 가지 욕망을 꿈꾸게 된다.
'적'은 군인을 말하며, '흑'은 성직자를 뜻한다는 해석에 따르면 쥘리앵은 평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싶어서 새로운 계급에 진입하는 것을 꿈꾼다.
1권에서는 나폴레옹과 같은 군인이 되기를 꿈꾸며, 2권에서는 성직자가 더 빠른 성공을 보장 할 것이라는 판단아래 목표를 수정한다. 

몇 번의 혁명을 더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싹터오르게 되는 점진적 평등의 발전은 그당시 프롤레리아 청년들에게  줄리앙과 같은 꿈을 꾸도록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중 능력이 정말 뛰어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능력도 없으면서 그냥 무작정 파리로 달려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능력의 경중과 무관하게 그들이 가지는 욕망의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 했을거라는 점이다. 그들의 욕망은 사용가치에 의한 욕망이 아니라 교환가치에 의한 욕망이다. 자신들의 경쟁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면서 욕망을 간접화시키게 된다.

이러한 수천 수만의 줄리앙의 욕망을 첫째로 매개하는 자는 바로 1권에 등장하는 레날.
적당히 부유하고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살아가는 그는 전형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줄리앙의 입장에선 욕망의 매개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레날과 줄리앙은 경쟁적 관계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이런 레날은 초반엔 과격왕정복고주의자였지만 나중에 1827년 선거시기에 자유주의자로 변모하게 된다. 이는 그의 정치적 성향이 바뀌었다는 상징이라기보다는 레날이 가지는 욕망의 상징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 군주주의냐 자유주의냐 라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발르노. 이자와의 경쟁관계가 중요할 뿐이다. 즉 레날은 발르노를 매개로 한 욕망의 성취와 그 경쟁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레날과 발르노의 관계는 줄리앙과 레날의 관계와도 크게 다를 게 없다고 판단된다. 줄리앙 역시 자신이 원하는 사용가치에 의한 삶보다는 상황과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과의 비교를 통한 교환가치의 크기가 더 중요하니 말이다. 그러니 줄리앙은 시대상황에 따라서 군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성직자가 될 수도 있는것 아니겠는가?
 

2권에서 줄리앙은 라몰 후작을 만나게 된다.

라몰후작은 왕정복고 시기의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귀족이다. 이 라몰후작 역시 재미있는 인물이다. 귀족이긴 한데 부르주아에게서 질투심을 느끼지는 않는다. 사실 과격왕당파의 사람들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혁명 이후 영향력이 높아진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질투와 욕망의 화신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상승계급을 매개로 하여 어떤 대상을 욕망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라몰 후작에게서는 부르주아에 대한 질투와 욕망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심지어 평민인 줄리앙을 사위로 삼으려 하는 결심까지 하게된다. 결국 라몰 후작은 줄리앙의 두 번째 욕망의 매개자가 된다.

라몰 후작을 통해 귀족 직전까지 나아갔던 줄리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앞서 보았던것과 마찬가지로 경쟁자와의 비교를 통한 욕망의 해결과 그로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허영이다. 
 

이러한 줄리앙의 허영은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어떤 대상을 욕망하지만 스스로의 사용가치에 의한 욕망이라기 보단 타인에 의해 주입된 욕망에 불과하다. 스콧니어링이 지적한 대로 현대자본주의의 가장 나쁜 점은 남을 이겨야 내가 사는 ‘경쟁원칙’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욕망의 노예상태에 빠진지도 모른채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애인 라 몰양이 노력을 뒤로한 채 진정 사랑했었던 레날 부인을 위해 스스로 사형을 선택한다.

아, 부질없는 욕망 속에 무기력한 인간의 사랑이여.

좀더 자세한 해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시간을 갖고 천천히 다시 읽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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