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전을 읽는 이유
'<제인 에어>이 주는 감동이 너무 강렬하다'는 표현이 주변 동료들에게는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된다. 워낙에 연애소설 부류로 잘 알려진 작품이고, 나 또한 간지러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일부러 이 작품을 오랫동안 피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구개발팀의 오서경 팀장은 이런 나에게, 어른으로서 의젓해야 할 남자가 10대의 소녀들이나 좋아했을 법한 감성적인 문학작품에 너무 심취하는 것 아닌가 하고 놀리기도 했다. 얼핏 들으면 불쾌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몇 년 전에는 그런 부분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던 나로서는 불쾌하기 보다는 이런 나의 모습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내 또래의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문학작품의 참 맛을 깨닫기 전에는 언제나 자기계발서를 더 많이 읽었다. 광고관련 서적 또는 마케팅 서적이 주류였으며 책은 정보를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문학작품에만 너무 몰입해서 읽어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생소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5대 장편은 이미 보았고, <서머싯 몸>의 책들도 주요 작품은 다 읽었다. <톨스토이>도 작가정신에서 나온 시리즈를 사 모으고 있다. 그러면서 진정한 명작을 만나면 언제나처럼 가슴이 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두 번 읽었으며, <개밥바라기별>, <엄마를 부탁해>와 <로빈슨 크루소>는 여러 권씩 사서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아직도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고 났을 때의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각 출판사들의 세계문학전집을 비교 분석하기까지 이르렀다. 마치 학교 다닐 때 프라모델 류 사 모으던 느낌 또는 만화책에 미쳐서 읽어대던 모습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문학작품에 소위 말해서 꽃힌 것이다. 어느 순간 이게 왜 이런가 싶고, 너무 학생 같고, 어색한 시점에 도달해서야 스스로 물어보기로 했다. 감동 같은 것은 느낀 지 오래되고, 즐거움이라고는 돈 버는 것이 전부이며, 회사와 집을 오기는 지루한 삶을 살던 나에게서 왜 문학작품이 이렇게까지 좋은가. 이게 정상적인가.
그러던 중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발간사를 보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인류가 무지와 몽매의 어둠 속을 방황하면서도 끝내 길을 잃지 않은 것은
세계문학사의 하늘에 떠 있는 빛나는 별들이 길잡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부심과 사명감 속에서 그리게 될 이 새로운 별자리가 독자들의 관심과 애정에 힘입어 우리 모두의 뿌듯한 자산이 되기를 소망한다.
세계문학사의 하늘에 떠있는 빛나는 별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최근 입시제도 변화로 인해 불어오는 독서열풍은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나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소견이다. 어린 시절의 독서가 비단 지식을 쌓는 데에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독서의 중요한 역할은 오히려 지식의 전달에 못지않게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해 주는 것이다. 학생들의 경우로 확대해석한다면 독서를 통해 스트레스를 날리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되는 재충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책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으로서 독서교육이 강조되기를 희망한다.
2. <제인 에어> 쇼크의 원인
<제인 에어>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이 같은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여성소설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이 작품이 나에게 이렇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는 사실의 정확한 근원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마지막부분에 극적으로 다시 로체스터를 찾아나서는 제인 에어. 그리고 상황이 나빠진 로체스터와의 결혼. 이 부분이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정말 상상도 못했던 결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의 꿈과는 멀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20대에 반드시 이상형을 만나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결혼을 마냥 미룰 수만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제인 에어는 이 모든 현실적인 상황에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않는다. 존 리버스의 끈질긴 구애도 과감하게 물리쳐버리고 자신의 사랑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진정한 자신의 사랑인 로체스터를 찾아 떠난다. 다시 찾은 로체스터는 실명하고 한쪽 손마저 잃었다. 모든 절망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고 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는 꿈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인의 이러한 용기는 당시가 19세기라는 사실과 그가 여자라는 사실을 떠나서 정말 과감하고 놀라운 행동이다. 자신을 학대하는 사촌 오라버니를 때리고, 리드부인에게 대들고, 로체스터에게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이 아가씨보다 나은 점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 하나 있을까.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어울리면서 살기를 바라고 원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단순히 페미니즘 소설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나 이 소설을 연애소설로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역시 옳지 않은 생각이다. 인간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바탕이 된 인간주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나는 청소년 시절과 청장년 시절 중 절반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불행에 빠져 지냈고 나머지 절반은 쓸쓸한 고독 속에서 지냈소. 그러고 나서야 내가 진정으로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을 난생처음 발견하게 된 거요.
바로 당신을 발견한 거요. 당신은 나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오. 나보다 더 훌륭한 내 반쪽이고 내 착한 수호천사요. 나는 당신에게 강력한 애착으로 속박되어 있소.
나는 당신을 착하고 재능이 있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타오르는 진지한 사랑이 내 가슴속에 잉태되었소.
그 사랑이 당신에게 쏠리고 있고, 당신 주변을 내 삶으로 감싸주고 있소. 그리고 그 사랑이 순수하고도 강력한 불꽃으로 타오르면서 당신과 나를 녹여 하나로 융합시키고 있소."
제인 에어가 떠날 것을 두려워하여 솔직히 고백하는 로체스터의 이 같은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까지 하다.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에서 볼 때 그의 애틋한 마음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것이다. 이 고백 이후 제인은 집을 나서서 로체스터로부터 도망친다. 제인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로체스터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 불쌍한 로체스터. 그는 분명 그녀가 떠난 것을 알고 난 그날 아침에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펐을 것이다. 아마 하루 종일 펑펑 울었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서 불이 났을 때 아내가 떨어져 죽자 함께 죽으려고 불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버텼는지 모를 일이다. 제인은 그에게 외롭고 고독한 인생에서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젊은 시절 아무리 놀러 다니고 향락에 취해서 지냈다고 해도, 사람이란 진정으로 사랑을 주고 받으며 상처를 매만져줄 수 있는 공감의 대상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인정받고 싶고 감싸주고 싶고 공감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샬럿 블론테는 제인 에어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을 찾아볼 참이다. 이 책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었기에 중반까지 읽다가 포기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다. 고전은 영원한 인류의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