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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지하공간 - 인간은 어떻게 공간과 어둠을 확장해왔는가
김재성 지음 / 글항아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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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지하공간] 김재성 著

- 지하공간의 철학과 기술 그리고 통섭에 관한 고찰


“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따름이다.

완전치 못한 일들도,

여기서는 실제 사건이 된다.

형언할 수 없는 것들도,

여기에서는 이루어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가는도다. ”


- 괴테의 <파우스트> 중에서 마지막 구절인 신비의 합창



핀란드에는 그 성격으로만 보자면 선도적인 지하공간인 온카로(Onkalo)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지하 직경으로는 400m 정도되는 길이지만 지그재그형으로 굴을 판, 총 5km 연장의 공간이다. 이 장소에는 핀란드에서 발생되는 사용후 핵연료인 고준위 핵폐기물, 즉 냄새도 없고 육안으로 봐서는 알수도 없는 그러나 생명체에게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방사능물질이 영구 보관된다. 이 공간은 2100년까지 순차적으로 핀란드에서 발생하는 핵폐기물의 용량인 12,000톤이 영구보관된다(현재 전세계의 고준위 핵폐기물의 용량은 총 25만톤 정도로 추정된다.) 이것은 그저 핀란드에서 처리하는 용량일 뿐이다. 고준위 핵폐기물의 방사능은 생명체에게 해가 전혀 없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완전히 감소하려면 10만년 가까운 기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2100년까지는 안전하게 묻고 입구를 완전히 막아 버린 후에는 10만년동안 그곳을 다시 파내지도 말고 관심조차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온카로가 고준위 핵폐기물을 완전 소멸시킬 수 있는 완전한 해답일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 137억년으로 추정되는 우주의 나이로 볼 때 10만년은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문명의 시간으로 볼 때는 여러번 시작과 종말을 맞이할 수 있는 매우 긴 기간이다.(과학적으로 우리 문명 스스로가 전쟁이나 혜성충돌 등 다른 문제로 지구종말을 맞이하지 않는 한 지금부터 6만년 이후에는 빙하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과학적 예측을 하기도 한다. 그 시점에서 지금의 문명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생명체가 이후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즉 10만년간 문명이 지속된다면 온카로는 그 온전성을 유지하겠지만 문명이 몇 번이나 중지되고 새로 시작된다면 온카로는 그 새로운 문명인들에게 발견되어서는 매우 곤란한 공간이다. 마추피추나 피라미드는 옛 문명의 영광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공간이지만 온카로는 향후 10만년동안 인류 혹은 후세의 존재들에게 무조건 쳐다보지 말아야 할 공간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핵폐기물 용량의 랭킹으로 핀란드 위에 존재하는 나라들은 아직 이런 공간의 설계준비조차 제대로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고(한국의 경주방폐장같은 경우는 고준위가 아닌 원자력발전에 사용된 작업복,장갑 등의 중저준위 페기물처리장이다.) 타 국가들의 24만톤의 고준위 핵폐기물은 아직 임시보관이나 재처리 정도에 머물뿐 영구보관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온카로는 핀란드의 국민들이 여러 토론과 절차를 거쳐 만들어낸 곳이다. 그 공간이 영구 해결책인지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의문은 있더라도 그곳을 만들어내고 있는 핀란드의 국민수준을 짐작할 수는 있다. 핀란드의 핵폐기물 용량수준은 세계에서는 불과 20위권(!) 내외이고 미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들도 아직 제대로 된 영구처분장을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선도적으로 이루어낸 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핵폐기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전세계에서 원자력은 에너지 발전용량으로 14%나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고준위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기술적, 철학적으로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온카로라는 지하공간은 말하자면 현대문명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현대인들이 에너지를 활용하면서도 그 뒤처리에 대한 문제, 지속가능한 성장의 입장에서 순환에 관한 문제, 직선적인 발전에서 순환적인 발전으로 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여러 기술적이고 철학적이면서도 인간 삶의 실제적인 화두와 그 해결의 수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온카로로 대표되는 혹은 각국의 핵폐기물을 처리하는 지하공간은 우리 현대문명이 어디까지 와 있나를 살펴보는 시금석으로 보기에 가장 적절하고 흥미진진한 지하공간의 하나일 것이다.


온카로라는 지하공간의 역할은 이제까지 우리가 누려왔던 에너지원으로서의 결과를 반성하고 그 수습을 지금의 역량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믿는 방식으로 수습하고 처리하는 공간이다. 여기에는 ‘반성’과 ‘은폐’와 ‘망각’이라는 철학과 기술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이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갔다가 다시 모계사회로 넘어가는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신호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인문적 토목공학자인 김재성의 역작인 [문명과 지하공간]은 흥미롭게도 서두에서 여신의 몰락과 재생을 언급하면서 문명 속에서 지하공간의 역할과 역사에 대해 서술하기 시작한다. 50만년에 가까운 인류사에서 대부분은 재생과 순환을 바탕으로 하는 모계사회였는데 길어야 수천년, 더 많아야 1만년의 세월동안 부계사회 즉 남성성의 역할과 가치가 부각되면서 이 순환의 법칙이 무시되거나 거부되면서 직선적이고 종말론적인 발전개념이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의 발전은 극대화를 이루어 현재에 다다르고 있는데 이제 다시 인류는 재생과 순환을 무시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서서히 깨닫고 지속가능한 성장과 순환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의 국면에 서 있다.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깊이 생각지 않거나 직선적이고 순환적이지 않은 발전만을 위주로 이루어 온 현대문명은 여러 곳에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러 문제들이 당도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해결되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문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진단한다면 지구가 허무하게 끝을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하와 겨울과 어둠이 없다면 지상과 봄과 밝음 역시 의미가 없어진다. 죽음이 없다면 삶도 의미를 잃는 것이다. 죽음과 삶, 지하와 지상, 겨울과 봄을 연결하는 순환의 고리가 끊어질 때 인간은 물질적 차원 이상의 상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교란같은 눈에 보이는 피해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을 지탱해온 재생과 포용의 신화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물질문명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자연의 자정 능력을 존중하고 여성적 관용과 순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평화로운 삶은 지속될 수 없다 (p.26)”

그러므로 저자는 그동안 어둡고 위험하며 불결한 곳으로 치부해온 지하공간에 대한 인식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역설한다. “무의식에 각인된 부정적 인식을 떨쳐버리고 지하공간을 삶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면 그곳은 다시 따뜻하고 안락한 공간이 될 것이다 (p.27)” 저자는 이를 위해 마르셀 푸르스트가 사색하고 몽상하던, 개인적이고 은밀한 공간이었던 다락방을 언급하면서 지하공간의 역사를 살펴보기 시작한다.


동굴은 인류가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삶의 유지를 위한 피신처이자 거주처였을 것이다. 최초에는 자연동굴에서 생활했겠지만 동굴 내부를 손을 봐서 인공적인 형태를 조금 더 띨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수로나 지하 통로를 뚫기도 했다. 저자는 책의 1부에서 ‘인간과 지하공간’이라는 주제로 동굴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삶으로부터 시작해서 통로로서의 지하공간, 도시철도로 대표되는 통로공간, 해저터널 등을 일별하고 있다. 그리고 지하공간의 미래에 대해서도 예측해 보고 있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저자의 착안으로부터 시작된 ‘상상 설계대전’이라는 기획이다. 지금 당장의 기술력으로는 무리이지만 가까운 시기에 혹은 수십년내에 실현가능할수도 있는 미래의 문명공간을 제안,기획,설계하는 프로젝트 제안은 현대문명의 한계와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아이디어의 한 허브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서 매우 높이 살만한 부분일 것이다.


2부에서 저자는 ‘쉼’이라는 주제로 생활문화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지하공간의 사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 장에서 가장 관심깊게 봤던 부분은 로마시대의 종교 박해를 피해 지하로 들어가 하나의 도시수준을 형성했던 터키의 ‘데린쿠유’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으로 지하 20층 정도에 달하는 55미터의 깊이에서 2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주거용 방과 부엌, 학교, 교회, 가축을 기르는 공간 이외에도 다양한 시설을 만들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는 것은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사례일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흔한 지하공간의 역할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지상의 권세와 박해를 피해 살아가던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짐작하기 쉽지 않다.


3부에서는 ‘길’이라는 주제로 소통을 위한 터널로서의 지하공간을 역사적으로 가장 빠른 바빌론에서부터 한중 해저터널과 한일해저터널의 미래까지 살펴보고 있다. 지하공간을 특정한 곳에서의 공동공간이 아니라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길이 지하를 통해 터널로 연결된다는 것은 의외로 아주 오랜 과거부터 시작된 역사가 존재한다. 이 장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은 문헌으로만 존재하는 바빌론의 터널과 공사과정 자체가 미스터리한 측면이 강한 히스기야 터널 이외에도 한때 유럽전역을 호령했던, 기세당당했던 로마제국이 멸망당한 이유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다. 흔히 로마 멸망의 원인을 도덕적 타락으로 꼽기도 하고 넓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몸집을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기도 하지만 저자는 고트족의 침입으로부터 시작되어 로마를 수호하기 위해 철옹성을 만든 이후 수로와 물자 공급망을 차단당한 것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고 언급한다. 이로 인한 전염병과 굶주림은 따라오는 결과였을 것이다. 거대한 제국이 멸망하는 데에는 그에 걸맞는 거대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처럼 실용적인 것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4부에서는 ‘씀’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용도의 지하공간을 살펴보고 있다.

소금동굴에서부터 곳간으로서의 역할, 포도주 저장고 등과 석빙고와 석굴암 등의 한국의 지하공간도 살펴보고 있다. 과학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눈여겨볼만한 곳은 지하 100미터에 직경 2킬로미터의 거대한 입자가속기가 설치되어 있는 유럽원자핵연구소일 것이다. 이 장에서 가장 관심있게 본 부분은 이 책의 표지그림으로도 사용된 파리의 음향연구소(IRCAM)이다. 우리에게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잘 알려진 피에르 불레즈의 의해 설립된 이 음향연구소는 소리와 음향을 기술적, 학구적으로 실험하고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외부의 소음을 최대한 막고자 지하에 만들었지만 지상과 지하로 연결하는 동선과 공간의 느낌에서 지상과 지하의 경계를 무너뜨린 설계로 유명하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지하공간 더 넓게는 폐쇄공간에서의 사례들을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문헌과 현장을 통해 기록하고 설명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런 공간들에 관심이 많거나 여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오랜시간동안 가이드의 한 역할을 할수도 있을 것이다. 올초에 이 책이 출간될 당시에 여러 언론과 방송에서 이 책이 화제가 되고 기사화되기도 했지만 이책은 단연코 반짝 하는 베스트셀러로서의 측면보다는 꾸준히 참조되고 연구될만한 스테디셀러로서의 역할이 더 어울리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문적인 시선으로 이 공간들의 실용적인 측면들을 넘어서서 공간 자체의 실용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혹은 고대 혹은 오래된 지하공간들이 지녔던 숨은 가치들과 노력을 발굴하고자 하는 것에도 열정을 보인다. 이는 저자의 공학적인 역량 외에도 저자 내면의 성실함과 순수성과 인문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많은 부분의 지하공간의 서술에서 저자는 저자 특유의 공학적이고 실제적인 기술로 인해 인문적인 측면과는 다른 면의 실용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기존 인문위주의 문화저술에서 실제 사례에 대한 언급에서의 막연함과 모호성이라는 면에서의 아쉬움이라는 면에서 볼 때 이를 상쇄할 만한 구체성의 언급이라는 점에서 속시원한 부분이 있다. 다만, 독자와 더 나아가 저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학적인 면과 인문적인 면의 혼재된 양상에서 비롯된 전체적인 일관성의 톤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그리하더라도 책의 매력과 특이성이 살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숙제로 남겨두기로 하자. 이런 점에서 추후에 저자의 건투를 빌고 싶다.


또한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페르세포네 신화를 언급하면서 시작된 문명의 여성성이 지하공간을 통해서 많이 그 사례를 띠고 있는 바, 물질문명의 정점 혹은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고 판단되는 이 시기에서, 종착점이 뻔히 보이고 있는 재생불가능하고 직선적인 발전양상을 지나서, 재생가능하고 순환론적인 진화를 보이는 문명과 공간의 사례를 발굴하고 알리고 응원하는 일이 더욱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온카로는 가장 단적인 예일 것이고 이 책에서 언급된 광산의 역할이 다한 쓸모없어진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바꾼 광명 케이번 월드라든지 시베리아의 미르니 광산을 에코시티로 만드는 계획은 명백히 기존 문명의 성찰과 여성성의 측면이 반영되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기존의 공간사례가 이미 만들어진 직선적 가치들의 결과를 뒤처리하거나 개조하는 것이 당분간의 이슈라면 이후 혹은 미래에는 순환과 재생 그 자체가 직접 반영된 문명 혹은 지하공간의 사례가 더욱 늘어나길 바래본다.


집 하나 만드는 것이나 건축을 하는 데 있어서도 철학과 미학이 깃든 반면 사회적으로나 문명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토목이나 사회간접자본은 오히려 철학이 배제되거나 무시된 채 실용성을 빙자한 명분으로 정치성은 지나치게 개입되어 사회 부조화와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례가 무수히 많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거대한 예산과 거대한 물량이 투입되는 사회간접자본이나 지하공간은 특히 그 양적인 측면에 걸맞는 가치와 철학의 정당성과 미래성을 담보해야 할 것이다. 서구의 역사에 비해 지리토대적인 측면에서도 지하공간의 개발이나 필요성이나 사례가 많지 않았던 한국의 경우는 경제적인 고속성장과 맞물려 저자도 언급하듯이 세계적인 수준의 토목공사 기술을 지니고 있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좋은 작화기술을 갖고 있다고 해서 세계적인 명작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 기술에 함몰되어 있다 보면 기껏해야 다른 나라의 협력업체나 하청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인류의 미래와 조화를 생각하는 큰 그림과 설계를 이 땅에서 직접 이루어 가는 일일 것이다. 저자의 기획으로 이루어진 ‘상상 설계대전’처럼 제한없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문명공간의 그림을 그리는 마당의 장이 아낌없이 펼쳐질수록 그 시기는 앞당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를 포함한 통섭이 필요하다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인지하는 이 시대의 모든 선각자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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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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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 위의 현재의식으로 - 한강의 <소년이 온다>

 

‘터미널 대합실에, 기차역 앞에, 그런 참혹한 시선들이 누워 있었을 때, 군인들이 행인들을 때리고 찌르며 반벌겨벗겨 트럭에 실어갔을 때, 집에 있던 젊은이들까지 수색해 끌고 갔을 때, 도시 외곽이 봉쇄되고 전화는 불통이었을 때, 맨몸으로 항의하는 군중들을 향해 실탄이 발포되었을 때, 이십여분 만에 백여구의 시신이 도로에 널브러졌을 때, 모두 몰살될 거라는 소문이 불붙은 듯 퍼져갔을 때, 예비군 훈련장에서 구식 총기를 꺼내온 평범한 남자들이 동네 초등학교에, 하천 다리에 삼삼오오 모여 보초를 섰을 때, 썰물처럼 빠져나간 공권력을 대신해 도청에서 시민 자치가 시작됐을 때,

 

그때 나는 수유리 집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 한강의 <소년이 온다> 중에서

 

 

나도 그랬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그 일이 났을 때, 나는 중학교에도 못 들어간 어린 소년으로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닌 초등학생이었다. ‘무정부’, ‘폭동’ 등의 어렴풋이 기억나는, 통제된 방송과 신문의 기사들을 빼고는 무엇이 실제로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아이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어른들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30년 하고도 3년이 더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그 당시의 어른들은 노년층이 되고 있고 나같은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다. 자국의 군인들이 특정 지역의 시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충격의 한편 옆에서 놀라운 시민의식과 정의심으로 대처한 광주시민들이 주는 감동은 자괴감과 자부심이 동시에 일어나는 병렬적인 의식경험이다. 이 동시적 사건이 주는 의식경험은 제대로 알고 이해하지 않으면 이 시대적 숙제는 다른 형태와 양상으로 다시 다가올지 모른다. 이 숙제는 반드시 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못 풀었다면 두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숙제를 제쳐두고 있었던지, 아니면 너무 어려운 숙제라서 푸는데 오래 걸려 지금까지 풀고 있는 중이던지. 후자이길 바란다. 그러나 전자라고 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양심의 직무유기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때에 나온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마음에 비수처럼 꽂히는 작품이다. 한강은 눈매만 봐도 한승원 작가의 딸임을,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즉 그녀는 말하자면 80년초의 세대가 아니다. 그녀는 다만 어릴적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른채 버스를 타고 다니던 서울 변두리에 사는 어린 학생이었다가 광주에 대한 소문을 나누는 어른들의 몇마디 말을 마음에 담은 채 이제 어른이 되어 작가로서 과거여행을 떠난다. 자료조사로, 현지답사로.

 

‘상무관 바닥은 파헤쳐져 있었다. (중략) 너무 늦게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곳의 바닥이 파헤쳐지기 전에 왔어야 했다. 공사 중인 도청 건물 바깥으로 가림막이 설치되기 전에 왔어야 했다. 모든 것을 지켜본 은행나무들의 상당수가 뽑혀나가고, 백오십년 된 회화나무가 말라죽기 전에 왔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왔다. 어쩔 수 없다.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해가 질 때까지 여기 있을 것이다. 소년의 얼굴이 또렷해질 때까지,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안 보이는 마룻장 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어른어른 비칠 때까지’
                - 한강의 <소년이 온다> 중에서

 

한강은 80년 5월 광주의 도청에서, 친구와 함께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곳에 있게 된 소년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현재의 우리에게 그 당시의 소년과 그 친구와, 소녀와, 청년들과 어머니에 대해 들려준다. 이야기의 방식은 꿈이기도 하고 환상(이라고 썼지만 의식흐름으로 보면 진실일 것이다)이기도 하고 르포이기도 하다. 바라보는 시점은 1인칭이기도 하고 2인칭이기도 하며 3인칭이기도 하다. 한강은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80년 5월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 형식은 중요치 않은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의 광주에 대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몰랐거나 공감치 못했던 이야기를, 지금의 장년 세대에게 알았는데 넘어가거나 애써 잊어버렸던 그때의 상황을 들려주고 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중간중간 읽으면서 눈물을 자제하기 힘들게 만든다. 나이가 어렸든 거리가 멀었든 관여하기 힘들었던 독자의 입장에서 그 당시의 광주를  보면 충격과 분노와 자괴와 무력감이 밀려온다. 그런 한편으로 놀라울 정도의 시민의식과 정의감과 양심으로 대처했던 광주시민들의 모습엔 형언하기 힘든 감동을 준다.

 

한강은 광주의 이야기를 다양한 형식으로 들려주지만 중요한 것은 개인의 마음으로 보는 내면의 시선을 들려준다. 내면적이고 의식흐름적인 형식으로 인해 80년 5월의 당사자가 아니면 그들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해의 끈과 공명의 자리를 만들어 준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문학의 힘이기도 하지만 한강의 힘이다.

 

<소년이 온다>는 담백하지만 치열하고, 서글프지만 절망적이지 않다.

 

중간중간 눈물이 흘러 작품을 끝까지 읽을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지만 바쁜 와중에도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작품 말미에 가서는 눈물이나 과거에 대한 추도보다는 생생한, 현재의 의식으로 또렷하게 주시를 하는 힘을 얻게 되었다. 이는 한강의 작품이 주는 주제와도 깊이 닿아 있다. 2009년 1월의 용산이 그러 했고, 2014년 4월의 진도앞바다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1980년 5월의 광주도 그러하다. 이 모든 것들은 현재진행형이다. 숙제를 풀지 못하는 한.

 

그 당시 어린 소녀였던 작가가 이제 어른이라면 어른이 되어 가는 지점에서 전 세대가 볼만한 작품을 내놓았다. 그녀에게 독자로서의 고마움을 보내며,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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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착한 아내가 싫다
홍관수 지음 / 아이디어하우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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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함, 소박함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지혜. 저자같은 멘토가 필요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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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착한 아내가 싫다
홍관수 지음 / 아이디어하우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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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착한 아내가 싫다>라는 책의 제목을 처음 보고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소크라테스의 아내였다. 서구 지성사의 초기 부분에서 한 자리를 크게 차지하고 있는 철인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악녀였다는 에피소드는 그 사실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착하고 순종적인 아내와 산다면 인생이 다소 밋밋하고 평범한 삶이 될지도 모르지만, 언제든 참견하고 간섭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 인생이 다소 피곤할지라도 매사 판단하고 사고하는 데에 도움이 될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든 일에 미주알고주알 간섭한다면 그것만큼 피곤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쳇바퀴같은 하루의 삶을 매너리즘에 빠져 지내거나 순간적인 감정에 못 이겨 이성을 잃고 판단을 내리거나 하는 순간에 적절하고도 진심어린 조언을 해 주거나, 일이 잘 안 풀려 낙담해 있을 때 응원을 보내주는 아내가 있는 남편이라면 그의 삶이 설령 힘들지라도 마음은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인 홍관수가 이 책에서 얘기하는 아내란 이와 약간 비슷한 경우인 듯하다. 저자는 어릴적 이광수의 소설 <사랑>을 읽고 그 작품에 나오는 간호사인, 모든 이에게 헌신적이고 순종적이며 희생을 아끼지 않는 석순옥을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생각하나 점차 그 생각을 변화시켜 가며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 나오는 발랄한 이상주의자인 캐시처럼 ‘나의 배우자는 나의 미래성을 현실화시켜줄수 있는 여자’로 이상성을 만들어 간다. 심지어  저자는 나의 미래상을 현실화시켜 줄 수 있다면 ‘적과의 동침’이란 표현처럼 때로는 남편의 적이 되어 사정없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 아내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기까지 한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부란 ‘서로의 자아를 실현시켜주는 인생의 동료, 더 나아가서 영혼의 성장과 완성에 아낌없는 도움을 주는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이런 정의에 동의한다면 저자의 의견에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서 아내를 얘기하지만 책 전체의 구성을 보면 의사로서 중년을 넘긴 남자가 삶에 대한 가치관을, 이제까지 지내온 자신의 무수한 경험과 사고를 통해 정립해 온 인생에세이집으로 볼수 있다. 저자는 의사로서 직업인으로서의 위치도 탄탄히 자리잡았지만 장애인 등에 대한 사회봉사와 오페라 해설과 아마추어 성악인으로서의 활동 등 예술에 대한 조예도 깊다. 저자가 좋아하는 오페라의 형식을 빌어 얘기하자면 이 책은 1막인 재미로 산다, 2막인 나답게 살기, 3막인 병원창가에서로 이루어진, 한 내과의사의 3막 오페라 인생극장으로 볼수 있다. 그리고 그 인생극장은 저자가 중년을 넘겼으므로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인 오페라인 셈이다. 그 오페라의 끝이 어떻게 결론날지 주제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스토리만 보아도 책의 흥미와 재미와 가치는 적지 않은 공감을 갖게 한다. 저자가 책을 통해 보여주는 삶의 경험과 지혜가 진솔함과 소박함을 통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중년을 넘겨서 사회적으로 자리잡은 사람은 자신의 직업이나 지위, 명예에 힘입어 필요이상의 권위나 허세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지만 저자는 남들이 보아도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그것을 과시하는 자리에 있기 보다는 주위의 가족들과 사람들과 그것을 함께 나누고 즐거워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자신의 자리가 행복을 반드시 보장해 주진 않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자리를 유지키 위해 온갖 아부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사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부가 행복을 반드시 보장해 주진 않는다. 큰 돈을 벌기 위해 주위의 온갖 욕을 들어가며 친구도 멀어지고 가족생활도 피폐해지는 경우도 많다. 내가 보기에 저자는 이런 식의 자리와 이런 부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이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고 성실함과 소명의식으로 의사가 되었으며, 지금은 적지 않은 이들과 인생의 행복과 즐거움을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게 나누고자 하는 행복인이다.

또한 저자는 삶의 경험과 지혜로부터 얻은 솔직하고 진솔한 표현을 통해 과잉적인 지적 허영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지식의 과잉적 표현이나 현학적 허세가 아니라 진솔함과 소박함을 통한 저자의 가치는 자연스런 공감대를 일으키게 한다. 어릴적 죽을뻔 했던 기억이나 선생님에게 사랑받아서 짜장면을 먹게 된 일 등은 아마 독자들이라면 비슷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겐 옛날 추억을 되살리는 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착한 아내가 싫다>를 읽으며 크게 생각한 부분은 인생은 마라톤이다 라는 점이고 한 사람의 인생은 단적으로 평가내릴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라는 점이다. 책에서는 어릴적 저자와 친했거나 관심있었던 친구들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몇몇 친구들을 언급하면서 그들보다 자신이 별다르게 나을 것 없었다고 얘기하는 저자의 겸손한 표현을 읽게 된다. 학생시절 우리는 주목받았던 친구들이나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년을 넘겨서 그들을 다시 바라보았을 적에 그들에 대한 인상이 나이들어서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생각처럼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은 길게 봐야 하고 재능은 한 순간에 꽃피우는 것이 드물다.

자신이 생각하고 목표로 하는 길을, 지식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삶의 지혜를 통해 가치관을 형성하고 그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가면서 또한 저자가 갈망하는 ‘자연스러움과 자유스러움’을 통해 인생의 행복을 누린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명망을 얻었고 사회봉사와 예술활동 등을 통해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이루어가고 있는 존재인지라 실질적으로 행복한 삶에 가장 가깝지만 내가 주목한 부분은 영원성과 영혼에 대한 그의 입장에 있다. 그는 이 지상에 주어진 모든 풍요로움이라 한들 그것이 한 순간에 부질없이 사라질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자신의 종교가 무엇이냐 라는 점은 논외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 부분은 종교적이기도 하고 다소 영혼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많은 이들이 바쁜 세속생활에 그냥 외면하면서 넘어가기도 하고 정신적인 면에 게으르거나 둔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후반부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무엇이 그때 남아있을까를 생각한다면 육신이 주인이 되어 살지 영혼이 주인이 되어 살지를 한번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책을 통해서 나타나는 삶의 솔직함과 진솔함, 소박함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지혜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결코 허세를 부리지 않고 이제까지 살아온 에피소드가 재밌게 술술 읽혀진다. 아마도 저자와 같은 이를 친구로 두거나 선후배로 둔 이들이라면 그들의 삶은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현대사회처럼 스피드와 복잡함이 넘쳐 흘러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자칫 혼돈스러울 때에 저자같은 멘토가 주위에 있다면 큰 힘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외할머니의 편애에 대한 어릴적 기억으로부터 시작한 글은 예방주사 에피소드를 얘기하면서 불현 듯 끝난다. 나는 저자의 이 현재진행형인 삶의 오페라를 감상하면서 인생 전반전을 훌쩍 넘긴 그가 후반전은 어떻게 매듭을 지을지 궁금해진다. 모든 이의 인생이 영원할 수는 없는, 우리 모두는 불멸이 아닌 - We are all mortal - 존재이지만 저자의 인생 후반은 되도록 오래도록 보고 싶다. 인기 드라마의 연장방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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