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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착한 아내가 싫다
홍관수 지음 / 아이디어하우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착한 아내가 싫다>라는 책의 제목을 처음 보고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소크라테스의 아내였다. 서구 지성사의 초기 부분에서 한 자리를 크게 차지하고 있는 철인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악녀였다는 에피소드는 그 사실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착하고 순종적인 아내와 산다면 인생이 다소 밋밋하고 평범한 삶이 될지도 모르지만, 언제든 참견하고 간섭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 인생이 다소 피곤할지라도 매사 판단하고 사고하는 데에 도움이 될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든 일에 미주알고주알 간섭한다면 그것만큼 피곤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쳇바퀴같은 하루의 삶을 매너리즘에 빠져 지내거나 순간적인 감정에 못 이겨 이성을 잃고 판단을 내리거나 하는 순간에 적절하고도 진심어린 조언을 해 주거나, 일이 잘 안 풀려 낙담해 있을 때 응원을 보내주는 아내가 있는 남편이라면 그의 삶이 설령 힘들지라도 마음은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인 홍관수가 이 책에서 얘기하는 아내란 이와 약간 비슷한 경우인 듯하다. 저자는 어릴적 이광수의 소설 <사랑>을 읽고 그 작품에 나오는 간호사인, 모든 이에게 헌신적이고 순종적이며 희생을 아끼지 않는 석순옥을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생각하나 점차 그 생각을 변화시켜 가며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 나오는 발랄한 이상주의자인 캐시처럼 ‘나의 배우자는 나의 미래성을 현실화시켜줄수 있는 여자’로 이상성을 만들어 간다. 심지어 저자는 나의 미래상을 현실화시켜 줄 수 있다면 ‘적과의 동침’이란 표현처럼 때로는 남편의 적이 되어 사정없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 아내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기까지 한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부란 ‘서로의 자아를 실현시켜주는 인생의 동료, 더 나아가서 영혼의 성장과 완성에 아낌없는 도움을 주는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이런 정의에 동의한다면 저자의 의견에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서 아내를 얘기하지만 책 전체의 구성을 보면 의사로서 중년을 넘긴 남자가 삶에 대한 가치관을, 이제까지 지내온 자신의 무수한 경험과 사고를 통해 정립해 온 인생에세이집으로 볼수 있다. 저자는 의사로서 직업인으로서의 위치도 탄탄히 자리잡았지만 장애인 등에 대한 사회봉사와 오페라 해설과 아마추어 성악인으로서의 활동 등 예술에 대한 조예도 깊다. 저자가 좋아하는 오페라의 형식을 빌어 얘기하자면 이 책은 1막인 재미로 산다, 2막인 나답게 살기, 3막인 병원창가에서로 이루어진, 한 내과의사의 3막 오페라 인생극장으로 볼수 있다. 그리고 그 인생극장은 저자가 중년을 넘겼으므로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인 오페라인 셈이다. 그 오페라의 끝이 어떻게 결론날지 주제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스토리만 보아도 책의 흥미와 재미와 가치는 적지 않은 공감을 갖게 한다. 저자가 책을 통해 보여주는 삶의 경험과 지혜가 진솔함과 소박함을 통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중년을 넘겨서 사회적으로 자리잡은 사람은 자신의 직업이나 지위, 명예에 힘입어 필요이상의 권위나 허세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지만 저자는 남들이 보아도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그것을 과시하는 자리에 있기 보다는 주위의 가족들과 사람들과 그것을 함께 나누고 즐거워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자신의 자리가 행복을 반드시 보장해 주진 않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자리를 유지키 위해 온갖 아부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사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부가 행복을 반드시 보장해 주진 않는다. 큰 돈을 벌기 위해 주위의 온갖 욕을 들어가며 친구도 멀어지고 가족생활도 피폐해지는 경우도 많다. 내가 보기에 저자는 이런 식의 자리와 이런 부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이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고 성실함과 소명의식으로 의사가 되었으며, 지금은 적지 않은 이들과 인생의 행복과 즐거움을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게 나누고자 하는 행복인이다.
또한 저자는 삶의 경험과 지혜로부터 얻은 솔직하고 진솔한 표현을 통해 과잉적인 지적 허영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지식의 과잉적 표현이나 현학적 허세가 아니라 진솔함과 소박함을 통한 저자의 가치는 자연스런 공감대를 일으키게 한다. 어릴적 죽을뻔 했던 기억이나 선생님에게 사랑받아서 짜장면을 먹게 된 일 등은 아마 독자들이라면 비슷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겐 옛날 추억을 되살리는 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착한 아내가 싫다>를 읽으며 크게 생각한 부분은 인생은 마라톤이다 라는 점이고 한 사람의 인생은 단적으로 평가내릴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라는 점이다. 책에서는 어릴적 저자와 친했거나 관심있었던 친구들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몇몇 친구들을 언급하면서 그들보다 자신이 별다르게 나을 것 없었다고 얘기하는 저자의 겸손한 표현을 읽게 된다. 학생시절 우리는 주목받았던 친구들이나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년을 넘겨서 그들을 다시 바라보았을 적에 그들에 대한 인상이 나이들어서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생각처럼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은 길게 봐야 하고 재능은 한 순간에 꽃피우는 것이 드물다.
자신이 생각하고 목표로 하는 길을, 지식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삶의 지혜를 통해 가치관을 형성하고 그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가면서 또한 저자가 갈망하는 ‘자연스러움과 자유스러움’을 통해 인생의 행복을 누린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명망을 얻었고 사회봉사와 예술활동 등을 통해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이루어가고 있는 존재인지라 실질적으로 행복한 삶에 가장 가깝지만 내가 주목한 부분은 영원성과 영혼에 대한 그의 입장에 있다. 그는 이 지상에 주어진 모든 풍요로움이라 한들 그것이 한 순간에 부질없이 사라질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자신의 종교가 무엇이냐 라는 점은 논외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 부분은 종교적이기도 하고 다소 영혼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많은 이들이 바쁜 세속생활에 그냥 외면하면서 넘어가기도 하고 정신적인 면에 게으르거나 둔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후반부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무엇이 그때 남아있을까를 생각한다면 육신이 주인이 되어 살지 영혼이 주인이 되어 살지를 한번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책을 통해서 나타나는 삶의 솔직함과 진솔함, 소박함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지혜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결코 허세를 부리지 않고 이제까지 살아온 에피소드가 재밌게 술술 읽혀진다. 아마도 저자와 같은 이를 친구로 두거나 선후배로 둔 이들이라면 그들의 삶은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현대사회처럼 스피드와 복잡함이 넘쳐 흘러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자칫 혼돈스러울 때에 저자같은 멘토가 주위에 있다면 큰 힘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외할머니의 편애에 대한 어릴적 기억으로부터 시작한 글은 예방주사 에피소드를 얘기하면서 불현 듯 끝난다. 나는 저자의 이 현재진행형인 삶의 오페라를 감상하면서 인생 전반전을 훌쩍 넘긴 그가 후반전은 어떻게 매듭을 지을지 궁금해진다. 모든 이의 인생이 영원할 수는 없는, 우리 모두는 불멸이 아닌 - We are all mortal - 존재이지만 저자의 인생 후반은 되도록 오래도록 보고 싶다. 인기 드라마의 연장방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