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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무정한 세계 - 우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과학사
정인경 지음 / 돌베개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뉴턴의 무정한 세계] 무정함은 언제쯤 온전히 해소될 것인가.
‘식민지 시기에 서양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문명화’는 해방 이후에 ‘근대화론’으로 대체되었고, 식민 지배의 도구였던 과학기술은 서양의 근대화를 따라가기 위한 도구로 바뀌었다. 오늘날까지도 과학기술은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기 위한 도구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뉴턴의 무정한 세계]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중에서 p.264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한 카페에서 ‘열차의 도착’이라는, 불과 1분도 되지 않을 필름을 상영한 사건은 그 자체로 세상에 영화의 출현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그 당시에 카페에 있었던 관객들은 영화라는 체험이 전무하였으므로 기차가 서 있는 모습에서 출발하여 달려오는 장면을 보았을 때 많은 이들이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여러 영화들을 보면서 그것이 영화인줄을 알면서도 여러 장면들에서 놀랄 때가 많은데 1904년 경부선 철도가 처음 운행되던 부산역에서 직접 지켜보던 조선인들은 그 광경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었을까. 생긴 형태는 뱀의 모습인데 그것이 뱀과는 비교가 애시당초 되지 않는 거대한 금속의 크기에다가 어마어마한 경적 소리와 수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돌진하는 모습에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놀라움과 경외감이 섞인, 말 그대로 혼비백산의 상태가 아니었을까.
정인경 선생의 [뉴턴의 무정한 세계 - 우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과학사]에는 바로 당시 과학기술의 소산이라고 할만한 증기기관차의 운행모습과 관련한 일화를 소개한다. 조선인에겐 증기기관차의 운행모습이 놀라움의 연속과 혼비백산의 어수선함이 혼재된 것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서구인은 조선인의 모습이 우스광스럽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한국사에 있어서도 측우기라든가 인쇄술같은 과학이나 혹은 기술적 발전이 없었다고는 할수 없겠지만 서구와 비교했을 때에 구한말의 모습은 이미 산업혁명을 거쳐가고 있는 서구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조선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고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변화를 꾀하였으나 국운은 이미 석양을 맞이하고 있었고 서구과학기술과 문명을 발빠르게 받아들인 일본은 제국주의의 야심으로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에 있어서의 과학기술이란 고명한 과학발전을 위한 수입이 아니라 식민지의 근대화란 명분으로 자행된 수탈과 착취의 도구였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 서구의 과학은 뉴턴의 고전역학을 넘어서 극대세계를 다루는 상대성 이론과 극소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이 태동되며 철학적인 수준의 개념과 가치를 재검토하는 고매하고도 숭고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조선은 증기선에서 내뿜는 대포소리의 위협과 기관차의 경적소리에 아연실색하는 상황에다 적응하기조차 버거운 시기였다. 서구의 과학기술을 주도적으로 따라잡아도 버거운 격차의 시기에 식민지 상황에서의 폭력적인 과학기술의 도입은 반의 반쪽의 과학기술에 불과함이라는 상황에 더해 왜곡된 근대화의 식민지 가치의 수입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정인경 선생의 저술인 [뉴턴의 무정한 세계]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뉴턴의 고전역학을 비롯한 서구과학은 이후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등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나 과학과는 별 인연이 없었던 한국은 제국주의의 광풍에 휩쓸려 무정하고도 비정한 상태에 처해졌다. 해방이 되었으나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그야말로 폐허와 무의 상태에서 지금까지 성장해 온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대로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면이 크다. 그러나 관성의 힘은 강하고 오래 간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21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에도 과거의 유산이 오히려 짐이 되어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정인경 선생은 이 시점에서 늦었지만 우리의 현재 위치를 다시 성찰해보자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정인경 선생의 [과학을 읽다]가 크게 인문과 과학이라는 양갈래에서 따로 또 같이 바라보는 학제적 성격의 과학인문 에세이라면, [뉴턴의 무정한 세계]는 구한말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이해가 태부족인 상태에서 폭력적으로 수입된 한국의 상황을 다룬 과학역사 에세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의 발견과 발명은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여러 학문과의 소통과 대화이자 역사문명의 진화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 더하여 우리의 시선으로 본다는 미덕이 깃들어 있다는 점에서 [과학을 읽다]와 [뉴턴의 무정한 세계]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의 초반에 서술된 구한말의 과학적 이해에 대한 상황을 보자면 코믹할 정도로 어이없던 상황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ICT분야에서는 애플이나 인텔에 비교해서도 꿀리지 않을 발전을 이루었다고 할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여전히 소프트웨어에 비해 하드웨어에 치중한 기술, 더 나아가 응용기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기초과학의 환경과 발전의 과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과학기술에 관한 한 황무지와 백지에 가까운 상태에서 서구 따라잡기와 암기위주의 방식으로 전속력으로 달려온 현재의 양적 성과를 넘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기 위한 창의성의 토대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가 이 시대의 화두일런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뉴턴의 무정한 세계]는 우리가 무엇을 취했고 무엇을 취하지 못했는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나 여전히 과거의 관성과 계산의 이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현재에서 새로운 방향의 한 단초를 이 책에서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