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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꼭 필요한 가이드북 - 2023~2024 최신판 #해시태그 트래블
조대현 지음 / 해시태그(Hashtag) / 2023년 5월
평점 :
품절


언젠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일을 상상한다.
걷고 싶은 이유와 명분도 나에게 묻게 된다.
그리고 친절한 가이드와 같은 여행서가 필요했다.
그렇게 선택한 책이 해시태그 조대현님의
가이드북이었다. 책을 읽다 인상 깊은 사진을 발견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순례자의
시간을 보내며 새롭고 긍정적인 미래를 만들 수 있는
힘을 비축한다.길(카미노) 위에 혼자 목표를 향해
걷는 어느 순례자의 뒷모습에서 투영된 나에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고통은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어느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네 인생길과 닮아 있다. 고통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인간의 야누스적인 사고에서 순례는 이어지고 있다.
낯선 세계에 자신을 과감하게 던져 스스로를 구원하고 싶은
이들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은 좋은 기회로 보인다. 지은이
조대현 씨는 63개국 298개 도시를 여행한 경험을 토대로
해시태그 시리즈의 여행서를 출간하고 있다. 최신 정보와
자세하고 유익한 정보가 많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여행서이다.
여행 가이드북에다 인문학과 철학, 사회, 문화 분야를
아우르는 정보로 채워진 한 권의 책으로 여행을 준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의 모토 ’혼자서도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에서 알 수 있듯이 해시태그에서 출간된 여행책들은
새로운 여행가이드북을 개척하고 있다.

매해 40만 명이 찾는다는 스페인 북부에 위치한
산티아고 순례길은 기독교 3대 성지 중 하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찾는 종교적 순례가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자신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들의 성지가 되었다. ‘산티아고‘란
스페인어로성 야곱을, ’데 콤포스텔라‘는 별이 내리는 들판을
뜻한다고 한다. 순례길의 종착지로 9C 경 양치기에 의해
성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어 그 자리에 작은 성당을 짓고
알려지며 많은 이들이 찾았다가 중세가 지나면서 잊혔다.
프랑코 정권에 의해 찾아낸 순례길은 이제 스페인을 대표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1990년대에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연금술사’가
인기를 끌면서 연금술사의 배경으로 등장한 산티아고 순례길이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지속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출발지가 정해지면 입국 도시가 확정되고
여행 기간을 결정할 수 있다. 자신의 컨디션과 시간적 여유를
고려해 전체 순례길을 다 걷지 않고 300km, 200km, 110km를
나누어서 걷거나 마지막 순례길을 걷는 분들도 있다. 완주증을
받고 싶다면 고려해야 할 사항은 완주증은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Credencial에 순례자가 걷는 도시나 알베르게에서
받은 도장이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최소 110km를
걷는 순례자만 받을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간 지점 증명서도
있어 생장 피드포트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중간 지점이
사이군(Sahagun)에서 절반을 걸었다는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받는다. 사이군 도서관에서 발급한다고 하니 3유로를 지불하면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책에서 소개하는 프랑스 길은 프랑스의 생장 피드포트에서
갈라시아 지방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km를 걷는다.
800km를 33일간의 여정으로 나눠 순서대로 일정에 맞는
정보를 제공하기에 하루 6-8시간 걷는 순례자들에게 그날
일정을 계획해서 소화하기에 유용하다. 루트를 살펴보면
하루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고도를 표시하는 그래프를 통해
오르막인지 평지인지 미리 알 수 있게 했으며 마을을 지날
때마다 식수대가 있다는 것과 식수대 위치나 식사나
쉬어갈 수 있는 곳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뿐 아니라
언제 문을 열고 닫는지 순례자들을 위한 현실적인 정보가
꼼꼼하게 담겨있어 감탄하기도 했다. 2-3일을 걸어보면
순례자의 하루가 짐작이 된다. 아침 6-7시 사이에 일어나
8시 전에 알 바르게에서 나와 하루 일정을 시작하게
된다. 알베르게는 8시 전에 나와야 하고 1일만 숙박이 된다.
아침에 6-7시 사이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출발준비를 하고
나서 알베르게나 바bar에서 에스프레소나 우유를 넣은
커피인 카페 콘 레체를 주문하고 나서 생 오렌지 주스,
크루아상이나 달걀과 감자로 만든 오믈렛인 토르티야를 주로
먹는다. 전 날 슈퍼에서 구입한 재료로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프랑스 길 33일간의 여정은 우리의 일상처럼 비슷하게
이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그길로 길을 나서서
하루 목표치를 완주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와 점심을 건너뛴
순례자들은 점심도 먹고 나머지 시간은 쉬면서 내일을 준비한다
. 예측 불가능한 일들로 난감할 때도 있겠지만 루틴이 분명해지고
단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적으로 관심사가 배낭의 무게로
옮겨갔다. 대부분 45L 배낭을 많이 사용하지만 ‘현명한 짐’이란
말처럼 저자는 겨울이 아니면 23L 용량의 배낭에 최소한의
물품으로 가볍게 걷기를 순례자들에게 권한다. 걷다가 욕망을
에고를 걷어내다 보면 안개처럼 흐린 미음에서 투명해진 ‘나’를
찾게 된다. 그것아 우리가 인생길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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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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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력은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했다. 주변 정세가 불안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란
교훈을 기억하는 것이다. 한 군주의 어리석음이
어떻게 나라를 파탄에 이르게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혼군 ‘인조’이다.
유근표님은 20여 년간 성곽과 병자호란을
연구하였으며 남한산성 답사 중, 병자호란 때
임시수도로써 46일간 항전한 남한산성의
역사성에 주목하여,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후 10여 년 넘게, <인조실록><승정원일기>
<만문노당> 등 1차 사료와 인조의 병자호란과 관련된
수많은 저작을 연구했다. 현재는 역사를
주제로 한 저술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혼군’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뜻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3대 혼군으로 회자되는 선조, 인조, 고종 때에
공교롭게도 우리 역사의 3대 패전 중 칠천량해전과
쌍련전투를 겪게 된다. 조선의 제16대 왕이며
본명은 이종, 인조는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그리고 병자호란을 겪으며 세 번이나
백성을 버리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궁을 떠난
임금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 간에는 병자호란의 발발의
책임이 청 태종에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 책은 전란의 책임이 인조에게 있다는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전란 발발의 책임을 인조에게 물은 것은
왕권 국가에서는 강토와 백성 모두가 국왕의 소유물로
여길 만큼 왕의 권한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과 병조호란은 인조 정권이 주변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좀 더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인조정권은
임진왜란 이후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지나친 숭명배금과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국방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에 비해
전조 광해군 정권은 날로 강성해지는 후금을 경계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 잡힌 외교를 구사하며 전쟁을 피해갔다.
인조를 언급하면서 전군 광해군과 비교는 불가피한 일이다.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추정컨대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술한 <광해군일기>는
기술한 주체가 인조 정권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행보는 창황 중 세자로 책봉되며
당시 18살에 불과했지만 선조의 명에 따라
분조(전쟁 등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를 이끌고 전선을 돌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임진왜란은 전쟁이 발발한 지 7년째가 되는
1598년(선조 31) 11월, 노량해전을 끝으로
마침내 종결되자 부왕을 도와 폐허로 변한
국토에서 회복을 도와 불철주야 애를 썼다.
하지만 선조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적자란 치명적 약점으로 인해 안위를
걱정해야 했던 광해군은 반대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능양군 인조반정(쿠데타)으로
폐위되고 인조 또한 반정으로 오른 왕위를
보존하기 위해 군사 조련과 부대 이동을
원천적으로 막았다. 반란이 두려웠던 인조 정권은
말로는 여진족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다고
하면서도 변방의 장졸들에게 조련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실제로 반정 이후
영변에 주둔하던 이괄은 강한 군대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군사를 조련했
으나, 결과적으로 그 병력이 반란에
동원되었던 악몽도 있었다. 조련이
안 된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국방력은 나날이 쇠약해졌다.
강화도를 으뜸의 입보처로 선정한
인조 정권은 성곽을 보수하고
관방시설을 정비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왕의 경호를 강화하고,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정비한 인조 정권에서 다음
단계로 행한 일은 기찰의 강화였다.
기찰이란 원래 범인을 잡기 위하여
염탐하고 검문하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들은 기찰을 자신들의 정권을 지키는
수단으로 악용했다. 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인조와 공신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또 다른 반란이었다. 때문에 인조
정권은 반정 직후부터 기찰을 강화했다.
반정 주체인 서인들은 기찰이란 명분으로
반대파인 광해군 때 실세인 북인과의 연계
여부를 기준으로 횡포를 자행해서 원성을
샀다고 한다. 그리고 까다로운 기찰로 인하여
장졸들이 전혀 조련이 안된 상태라 전쟁이
발발하면 전투력에 큰 허점으로 작용했다고
하니 인조와 서인들의 무능과 어리석음은
가히 역대급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조 재위 시에는 시종일관 나라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왕위에 나간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함께한 이괄이
난을 일으켰고, 그 3년 후에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정묘호란 후 병자호란 발발까지
10년 동안에도 가도의 모문룡 문제를
위시하여 주변 상황은 늘 긴장의 연속
이었다. 그럼에도 인조는 자신의 권위를
좀 더 강화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기 위해
지나칠 만큼 강한 집념을 보였다. 집권
초기부터 이 문제에 매달리던 인조는
즉위 9년째 되는 1632년 2월, 영의정
윤방을 도제조로 하는 추승도감을
설치하여 그해 5월 정원군을 ‘원종’으로,
생모 구씨는 ‘인헌왕후‘로 추존했다. 또한
1635년 12월 9일에 세상을 떠난
인열왕후 한씨(인조 비)의 장례를
그로부터 정확히 4개월이 지닌 1636년
4월 9일에 치르는데, 그날의 <인조실록>
에는 이런 내용이 보인다.
1636년 4월 이리면 병자호란 발발
8개월 전으로 후금의 홍타이지는
그달 11일 제위에 올라 공공연히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을 때였는데도,
인조는 인열왕후의 국장을 그토록
호화롭게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묘호란이 끝난 후 정묘약조에 들어 있는
요구만을 요구하던 그들은 날이 갈수록 품목을
증가시켰고, 명을 치는 데 협조하라며
3만 명의 병력과 군선까지 요구하는가 하면
‘형제지국‘에서 ‘군신지국’으로 바꾸라고
억지를 부렸다. 문제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을
때 닥칠 후폭풍에 대비가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는 군주였다면
인열왕후의 국상을 검소하게 치뤄 당시
최식식 무기로 각광받던 홍이포를 수입하는
등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힘을 쏟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홍타이지가 삼궤구고두를 마치자
예부의 계심량 키충거는 조선 정벌의
명분을 하늘에 고하는 축문을 읽어 나간다.
지난 기미년(1619) 대명이 군사를 일으켜
네 길로 우리를 죽이려고 올 때 조선국
또한 대명국을 도와 우리를 죽이려고
왔습니다. 조선과 우리는 원래 변계를
마주하고 살았던 고로 서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우리가 점령한
요동 주민들을 대명에 넘기거나 곡식을
주고 대명과 함께 나를 죽이려고 힘쓰므로
정묘년(1627)에 조선에 군대를 보낸
것입니다. 그 후 조선은 나를 형으로 삼고
대명을 섬기듯이 우리를 예우하며
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10년산 화친한 도를 스스로 깨뜨리고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에게 보내는 글에서
“정묘년에 맺은 화약은 본심으로 맺은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맺은 것”이라는
내용을 본 후에 조선이 변심한 것을 알았
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이 준비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겠다고 하늘에 고하는 것입니다.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의 균형외교
에 대한 반발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내
재조지은(거의 망하게 된 걸 구해준 은혜)을
행한 명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지는 명나라
와 떠오르는 후금(청) 사이에서 정확한 국제관계
에 대한 인식도 없이 자신들의 밥그릇 싸움에
힘을 쏟으면서 군사적•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강빈을 사사한 인조는 세상의 눈을 의식해
소현세자와 강빈이 남긴 석철 3형제를
한동안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 후 강빈이 죽은 지 일 년
남짓 지난 1647년(인조 25) 5월 13일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이며 자신의 손자들인
석철 3형제를 멀리 제주도로 유배하도록
명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많은 설왕설래가
오가지만 인조가 죽였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학계에서 소현세자의 죽음에 독살이란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어쨌든 독살이건 아니건
간에 소현세자의 죽음의 원인은 인조가 제공했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후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가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하고 공부하고 돌아와
서양문물과 국제정세를 조선에 적용할 포부를
펼친다. 인조가 좀 더 생각이 깊은 왕이었다면
설사 청에서 자신을 끌어내리고 세자로써
대통을 잇게 하려고 시도한다 하더라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삼전도의 굴욕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조선의 개혁은 이미 17세기에
이루어졌을 거라 저자는 말한다.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오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인조와 서인 세력들은 대의명분에 사로잡혀
당시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여
호미로 막을 일을 가레로도 못 막게 되었다.
무능한 지도자 인조와 그의 곁을 지켰던
김류와 이귀를 통해 그들이 받들어야 하는 것은
명나라가 아닌 실질적 피해자가 된 백성들이었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인조의 권력욕은
소현세자와 강빈 그리고 석철 삼형제를
제거하면서 광기라고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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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불길, 신냉전이 온다 - 일대일로 정책에서 타이완해협의 위기까지 더 은밀하고 거대해진 중국의 위협
이언 윌리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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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이란 신종어가 낯설지 않는 것은 '냉전'이란 프레임에 익숙한 우리 민족의 가혹한 운명 때문이다. 중장년을 비롯 노인분들 입장에서 '냉전'의 무거움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뇌리에 박힌 두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이곳에서 전쟁이 일어날 리 없다는 근거 없는 낙관의 위험성은 그들로 하여금 시간이 없다는 다급함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전쟁 전략을 통해 분석하고 준비하게 하였다. 나 또한 이책을 골라 읽으며 언젠가 닥칠 모를 일에 대한 대비책 중 하나로 지금 처한 현실을 객관적인 정보와 자료로 준비하고 싶었다. 중국은 일대일로와 '회색지대 분쟁' 전략으로 '하나의 중국'이란 이름 아래 세계를 누비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역사적 권리'란 명목으로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베트남, 필리핀 등 다수의 나라와 영유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으며 남중국해의 90%가 자국의 영토라며 우기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다수의 나라들에 투자를 제안해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처럼 환심을 사서 투자 개발하는 기반시설을 핑계로 중국인들을 이주시키고 중국공산당의 영향력을 소름 돋게 확장하고 있다. 자원의 확보와 일대일로로 중국이 서부 진출을 위한 하나의 길을 연결해나가고 있다. 중국이 세계 각국에서 벌이는 영유권 분쟁은 시진핑이란 인물의 3연임으로 앞으로 행보가 확실해 보인다. 시진핑은 타이완을 되찾는 것이 '확고부동한 역사적 책무"라고 강조하면서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꿈꾼다. 시진핑과 푸틴 두 사람은 역사적 불만이 깊고 옛 제국의 재건을 꿈꾼다는 공통점이 있다. 루스키 미르Rusky Mir(러시아의 세계) 재건을 꿈꾸는 푸틴은나중애 우크라이나 침공을 루스키 미르로 정당화했다. 루스키 미르와 중국몽 모두 구세주처럼 민족의 위대함을 되찾는다는 세계관이다. 두 사람은 세계를 강대국의 정치와 세력권 관점에서 바라본다. 거기에는 우크라이나나 타이완과 같은 성가신 민주국가들이 자국을 지키고 정치적 선택을 할 권리와 자결권이 들어설 틈이 없다. 서방의 지도자들이 신냉잔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이미 일종의 냉전상태에 들어섰고, 한 연구에 의하면 2030년이면 군사적으로 미국울 뛰어 넘을 수 있는 역량울 갖추게 된다고 보고았다. 일본, 호주, 미국,인도 4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안보 협의체를 가동하고 있는데 타이완과 함께 중국위 침략을 대비해서 훈련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남중국해는 해저에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리라 추정하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게도 무역의 중요한 통로이다. 타이완과 일본은 그리 멀지 않기에 일본이 자신의 방위를 이유로 군사적 행동을 허럭할 시 신냉전의 기류에 세계는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기 어렵다. 평화롭던 시간에 현대화로 군사력을 증강시킨 중국과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 싶은 두 나라는 '신냉전'을 택했고 타이완과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힘을 도움 받아 전쟁을 일으킨 대국이 전쟁을 단념하도록 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만의 '호저 전략'을 찾아내 하나의 목소리로 두 강대귝이 전쟁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들의 전략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일대일로는 북한도 예외일 수 없다. 중국에게 우리도 한낱 속국으로 분류되는 불행을 막고자면 그들의 동태와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들을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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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베트남 - 느리게 소박하게 소도시 탐독 여행을 생각하다 6
소율 지음 / 씽크스마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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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으로 인한 3년이란 시간은 우리가 당연하게 누렸던 것에게서
고마움을 알게 했다. 그 중 하나가 여행이란 일상이다. 요즘 한국인들의 최고의 여행지로 사랑받는 베트남은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보내는겨울의 여행지로 최고의 장소가 되고 있다. 지은이 소율은 주부에서 여행자, 여행자에서 여행작가, 여행작가애서 강사로 변신을 거듭하며 여행이 취미이자 일이 되었다. 어느 여행기에서 읽었던 호이안 이야기에 이끌려 시작된 작은 소도시 여행은 그냥 그곳에 조용히 스며들고 싶었다고 한다. 같은 나라를 두 번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베트남은 예외로 여러 번 여행하며 테마 ‘혼자 하는 베트남 소도시 여행’을 기획하고 북부의 하이퐁, 깟바 섬, 닌빈, 빈을 거쳐 중부의 동허이, 다낭, 남부의 달랏, 호찌민, 빈롱, 껀터까지.남북으로 기다란 베트남을 위에서 아래로 여행한 것을 책에서 소개한다. 여행 이세이를 읽는 목적은 정보를 취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작가로부터 얻는 간접 경험은 나만의 여행의 세계에 조금씩 살을 붙이는 과정이다. 저자의 여행에서 나의 여행에 색을 입히며 왜 베트남에 가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찾게 되었다. “현지에서 뭐가 제일 좋았어?”라고 책에서 질문하듯이 나에게 묻는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현지에서 먹는 베트남 쌀국수라고 말하게 될 것 같다. 나 또한 하노이 여행 때 현지의 로컬 식당에서 먹었던 쌀국수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국물이 담백하고 싱겁지만 맛은 담담하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한국에서 절대 먹을 수 없는 맛이어서 저자의 1일 1 쌀국수를 먹어야 한다는 글에 가장 크게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그녀는 자신이 절대 미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노점에서 목욕탕 의자처럼 낮은 의자에 앉아 현지인들과 섞여 함께 먹는 쌀국수야말로 참다운 여행의 맛이 아닐까 생각했다.
“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그들의 ’진짜 삶에‘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관광에 불과할 뿐,
여행은 아닐 것이다.”

“내 지론은 이렇다.
1일 1쌀국수를 먹지 않는다면
베트남 여행자가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신선놀음은 하롱베이에서 맛본 카약 뱃놀이와 강을 따라 늘어선 석회산 바위산을 보며 노 젓는 배 안에서 채색한 동양화 속에 신선처럼 풍덩 빠지는 닌빈의 땀꼭과 짱안 투어. 500여 개의 계단을 올라 항무아의 정상에서 자연에 몸을 맡기는 일이다. 마치 저자의 표현대로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세상의 주인이 된 듯한 느낌이다. 항무아는 땀꼭 인근의 석회암의 바위산이다. 전망대 위의 용 석상이 보인다. 용이란 상상의 동물과 함께 하는 무릉도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여행자들은 일상의 중력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삶을 관조하리라.

“위로 오직 하늘뿐이었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이마에
흐르는 땀은 어느새 멈추었다.
용의 에너지를 받는 걸까.
나는 용의 날개를 부여잡고
바람과 하늘과 경치를 만끽했다.”

’파란 하늘 때문에’ ‘행복해지는 곳’이라 들었다는 저자는 뿌연 하늘과 공기에 찌든 몸과 마음을 파란 하늘을 통해 정화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12월 한가운데 2주나 할애한 달랏은 높디높은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그림보다 아름다워야 할 시기에 2주 절반이 흐리고 비가 왔다고 한다.
달랏의 12월은 우리에게 볕 좋은 가을날이라 여행객들에게 겨울을 따뜻하게 나기에 최적의 장소로 유명하다. ‘서베리아’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한국에서 탈출해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겨울을 나는 일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나트랑이나 호아빈에서 거치는 작은 소도시가 아닌 커피가 있고 와인이 있고 겨울을 나기에 최적의 날씨의 고산지대는 태국의 치앙마이처럼 ‘한달살기의 휴양지’로 거듭나고 있다. 베트남의 커피 중 80%를 생산하는 지역답게 달랏에는 카페가 널려있다. 가히 1골목 1카페라고 할 수 있다. 예전부터 현지인의 신혼여행지로 우리의 제주도와 비견된다.그래서인지 카페도 많지만 특이한 건 골목마다 있는 로컬 카페였다. 관광객들 말고 동네 사람이 모이는 사랑방이었다. 특이한 것은 보통 카페는 여자들로 붐비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이곳은 카페란 당연히 남자들의 사교장이란다. 시골로 들어갈수록 카페에서 ‘금녀의 법칙’은 유효하다. 베트남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은 아직도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 예전의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아 만감이 교차했다. 여행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저자의 경우는 ‘시간이 많아서’라고 에둘러 말하지만 글에서 사람을 참 좋아하는 분이라는 걸 알게 된다.
현지인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과도 격이 없이 친근하게 다가가는 모습에서 사람과 함께 한 기억이여행지의 추억을 꽉 채우는 정신의 자양분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여행은 현지인의 일상과 맞닿아 서로의 세계를 내어주는 일이며 그래서 우리는 여행지에서 사람을 만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현지인의 삶에 방해하지 말고
살짝 끼어들었다가 빠져나오라’
그런 게 여행자의 본분 아닌가.
손님이 주인이 되고 현지인은
들러리가 되는 여행지를 만나면
나는 여지없이 속이 불편했다.
외지인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현지인의 삶이 내쳐진 곳들을
발견할 때는 더없이 쓸쓸하다.”

여행은 잠시 일상을 떠나 누리는 ‘걷는 독서‘인지 모른다. 여행지에서 하는 산책이나 호수를 마주하고 마시는 커피, 현지인들의 일상의 경계에서 엿보는 관음증은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타성에 젖은 우리를 깨운다. 물가도 저렴하고 치안도 좋으며 사람들 또한 친절해 여행지로 참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겨울에 달랏에서 따뜻하게 겨울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며 베트남의 쌀국수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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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컨슈머 - 소비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온다
J. B. 매키넌 지음, 김하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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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우리에게 준 선물은 앞만 보고 속도에 매몰되어 내달리던
우리를 멈추게 했다는 것이다. 성장이란 이름으로 양적 팽창이
소비를 낳으며 소비지상주의로 앞다퉈 세계가 쓰레기를 양산할 때
우리 모두 죽음의 공포와 함께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되었다.
반강제적으로 처음에 시작된 일상이 점점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소비는 줄고 물건이 아닌 잊고 있던 가치에 눈 뜨게 되었다.
하늘의 공기가 깨끗해지면서 탄소배출권이나 ‘녹색화’로 해결하려던
일들이 소비를 줄이면서 빛을 본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소비를
줄이면 심각한 경기침체와 불황이 올 것처럼 떠들지만 미국의 9.11
테러 이전에는 ‘소비’에 대한 적극적인 목소리를 높인 적은 없었다.
불과 50 년 전에도 우리는 매우 검소하고 부자들의 소비가 억압
받으며 미국의 천박한 과시적 소비는 지양되었다.
기후 과학자 대다수는 지구의 기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인류의 탄소 배출을 제로까지 줄여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충격적이게도, 전 세계의 소비를 25% 줄여봤자 그 목표의 4분의 1만 이루는 셈이다. 그렇다 해도 이는 기념할 만한 성취인데, 섭씨 1.5도가 상승하기 전까지 추가 조치를 취할 시간을 몇 년 더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녹색 기술과 청정에너지에 의존해 기후 변화에 맞서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고 소비의 속도를 늦추거나 경제 성장에서 벗어남으로써 얻어낸감소량이 경제 성장과 환경 파괴의 분리로 해소되어야 할 격차를 줄인다. ‘소비를 멈춘 세상’은 비현실적이지만 이해하려면 오래된 것을 존중하는 마음, 그러니까 더 좋은 물건을 더 적게 산다거나 좋은 물건을 유지, 보수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이 필요하다. 세상이 소비를 멈추는 날에는 더 오래가는 상품의 선택은 당연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계획된 진부화’란 의도된 노력으로 만물의 품질의 저하의 시대를 맞았다.저품질의 대량 생산품을 짧은 시간에 구입하는 악순환은 환경적으로 최악의 선택이다. 유행의 속도가 빠르고 새로운 물건에 대한 선호가 높으며 패스트패션의 유행으로 많은 자원 낭비와 무분별한 소비에서 내구성이란 말은 우리에게 전하는 뜻이 깊다. 이 책은 하나의 달레마에 의해 시작되었다. 우리는 소비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을까? 답은 예스이다. 끝없는 확장에 얽매인 경제의 속도를 늦추면,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서 나타난 더욱 완만한 성장의 추세에 합류하게 될 뿐이다. 두려움과 불편함은 우리의 마음을 지치게 하겠지만 인류는 성장이란 신화 없이 오랜 세월 살아온 존재라는 것이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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