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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평점 :
저자의 이력은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했다. 주변 정세가 불안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란
교훈을 기억하는 것이다. 한 군주의 어리석음이
어떻게 나라를 파탄에 이르게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혼군 ‘인조’이다.
유근표님은 20여 년간 성곽과 병자호란을
연구하였으며 남한산성 답사 중, 병자호란 때
임시수도로써 46일간 항전한 남한산성의
역사성에 주목하여,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후 10여 년 넘게, <인조실록><승정원일기>
<만문노당> 등 1차 사료와 인조의 병자호란과 관련된
수많은 저작을 연구했다. 현재는 역사를
주제로 한 저술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혼군’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뜻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3대 혼군으로 회자되는 선조, 인조, 고종 때에
공교롭게도 우리 역사의 3대 패전 중 칠천량해전과
쌍련전투를 겪게 된다. 조선의 제16대 왕이며
본명은 이종, 인조는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그리고 병자호란을 겪으며 세 번이나
백성을 버리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궁을 떠난
임금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 간에는 병자호란의 발발의
책임이 청 태종에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 책은 전란의 책임이 인조에게 있다는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전란 발발의 책임을 인조에게 물은 것은
왕권 국가에서는 강토와 백성 모두가 국왕의 소유물로
여길 만큼 왕의 권한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과 병조호란은 인조 정권이 주변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좀 더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인조정권은
임진왜란 이후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지나친 숭명배금과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국방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에 비해
전조 광해군 정권은 날로 강성해지는 후금을 경계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 잡힌 외교를 구사하며 전쟁을 피해갔다.
인조를 언급하면서 전군 광해군과 비교는 불가피한 일이다.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추정컨대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술한 <광해군일기>는
기술한 주체가 인조 정권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행보는 창황 중 세자로 책봉되며
당시 18살에 불과했지만 선조의 명에 따라
분조(전쟁 등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를 이끌고 전선을 돌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임진왜란은 전쟁이 발발한 지 7년째가 되는
1598년(선조 31) 11월, 노량해전을 끝으로
마침내 종결되자 부왕을 도와 폐허로 변한
국토에서 회복을 도와 불철주야 애를 썼다.
하지만 선조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적자란 치명적 약점으로 인해 안위를
걱정해야 했던 광해군은 반대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능양군 인조반정(쿠데타)으로
폐위되고 인조 또한 반정으로 오른 왕위를
보존하기 위해 군사 조련과 부대 이동을
원천적으로 막았다. 반란이 두려웠던 인조 정권은
말로는 여진족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다고
하면서도 변방의 장졸들에게 조련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실제로 반정 이후
영변에 주둔하던 이괄은 강한 군대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군사를 조련했
으나, 결과적으로 그 병력이 반란에
동원되었던 악몽도 있었다. 조련이
안 된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국방력은 나날이 쇠약해졌다.
강화도를 으뜸의 입보처로 선정한
인조 정권은 성곽을 보수하고
관방시설을 정비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왕의 경호를 강화하고,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정비한 인조 정권에서 다음
단계로 행한 일은 기찰의 강화였다.
기찰이란 원래 범인을 잡기 위하여
염탐하고 검문하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들은 기찰을 자신들의 정권을 지키는
수단으로 악용했다. 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인조와 공신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또 다른 반란이었다. 때문에 인조
정권은 반정 직후부터 기찰을 강화했다.
반정 주체인 서인들은 기찰이란 명분으로
반대파인 광해군 때 실세인 북인과의 연계
여부를 기준으로 횡포를 자행해서 원성을
샀다고 한다. 그리고 까다로운 기찰로 인하여
장졸들이 전혀 조련이 안된 상태라 전쟁이
발발하면 전투력에 큰 허점으로 작용했다고
하니 인조와 서인들의 무능과 어리석음은
가히 역대급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조 재위 시에는 시종일관 나라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왕위에 나간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함께한 이괄이
난을 일으켰고, 그 3년 후에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정묘호란 후 병자호란 발발까지
10년 동안에도 가도의 모문룡 문제를
위시하여 주변 상황은 늘 긴장의 연속
이었다. 그럼에도 인조는 자신의 권위를
좀 더 강화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기 위해
지나칠 만큼 강한 집념을 보였다. 집권
초기부터 이 문제에 매달리던 인조는
즉위 9년째 되는 1632년 2월, 영의정
윤방을 도제조로 하는 추승도감을
설치하여 그해 5월 정원군을 ‘원종’으로,
생모 구씨는 ‘인헌왕후‘로 추존했다. 또한
1635년 12월 9일에 세상을 떠난
인열왕후 한씨(인조 비)의 장례를
그로부터 정확히 4개월이 지닌 1636년
4월 9일에 치르는데, 그날의 <인조실록>
에는 이런 내용이 보인다.
1636년 4월 이리면 병자호란 발발
8개월 전으로 후금의 홍타이지는
그달 11일 제위에 올라 공공연히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을 때였는데도,
인조는 인열왕후의 국장을 그토록
호화롭게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묘호란이 끝난 후 정묘약조에 들어 있는
요구만을 요구하던 그들은 날이 갈수록 품목을
증가시켰고, 명을 치는 데 협조하라며
3만 명의 병력과 군선까지 요구하는가 하면
‘형제지국‘에서 ‘군신지국’으로 바꾸라고
억지를 부렸다. 문제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을
때 닥칠 후폭풍에 대비가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는 군주였다면
인열왕후의 국상을 검소하게 치뤄 당시
최식식 무기로 각광받던 홍이포를 수입하는
등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힘을 쏟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홍타이지가 삼궤구고두를 마치자
예부의 계심량 키충거는 조선 정벌의
명분을 하늘에 고하는 축문을 읽어 나간다.
지난 기미년(1619) 대명이 군사를 일으켜
네 길로 우리를 죽이려고 올 때 조선국
또한 대명국을 도와 우리를 죽이려고
왔습니다. 조선과 우리는 원래 변계를
마주하고 살았던 고로 서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우리가 점령한
요동 주민들을 대명에 넘기거나 곡식을
주고 대명과 함께 나를 죽이려고 힘쓰므로
정묘년(1627)에 조선에 군대를 보낸
것입니다. 그 후 조선은 나를 형으로 삼고
대명을 섬기듯이 우리를 예우하며
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10년산 화친한 도를 스스로 깨뜨리고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에게 보내는 글에서
“정묘년에 맺은 화약은 본심으로 맺은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맺은 것”이라는
내용을 본 후에 조선이 변심한 것을 알았
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이 준비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겠다고 하늘에 고하는 것입니다.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의 균형외교
에 대한 반발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내
재조지은(거의 망하게 된 걸 구해준 은혜)을
행한 명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지는 명나라
와 떠오르는 후금(청) 사이에서 정확한 국제관계
에 대한 인식도 없이 자신들의 밥그릇 싸움에
힘을 쏟으면서 군사적•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강빈을 사사한 인조는 세상의 눈을 의식해
소현세자와 강빈이 남긴 석철 3형제를
한동안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 후 강빈이 죽은 지 일 년
남짓 지난 1647년(인조 25) 5월 13일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이며 자신의 손자들인
석철 3형제를 멀리 제주도로 유배하도록
명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많은 설왕설래가
오가지만 인조가 죽였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학계에서 소현세자의 죽음에 독살이란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어쨌든 독살이건 아니건
간에 소현세자의 죽음의 원인은 인조가 제공했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후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가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하고 공부하고 돌아와
서양문물과 국제정세를 조선에 적용할 포부를
펼친다. 인조가 좀 더 생각이 깊은 왕이었다면
설사 청에서 자신을 끌어내리고 세자로써
대통을 잇게 하려고 시도한다 하더라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삼전도의 굴욕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조선의 개혁은 이미 17세기에
이루어졌을 거라 저자는 말한다.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오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인조와 서인 세력들은 대의명분에 사로잡혀
당시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여
호미로 막을 일을 가레로도 못 막게 되었다.
무능한 지도자 인조와 그의 곁을 지켰던
김류와 이귀를 통해 그들이 받들어야 하는 것은
명나라가 아닌 실질적 피해자가 된 백성들이었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인조의 권력욕은
소현세자와 강빈 그리고 석철 삼형제를
제거하면서 광기라고 부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