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 정치발전소 강의노트 1
조성주 지음 / 후마니타스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 7월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서 “2세대 진보정치를 표방했던 조성주(정치발전소 공동대표)가 화제가 됐었다. 그는 출마의 변에서 1세대 진보정치의 성과와 한계, 2세대 진보정치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수양당체제의 협소한 민주주의를 평범한 시민들을 위한 민주주의로 확장한 것은 1세대 진보정치의 정치적 성과였지만, “성과에 안주하고 서로 다투는 사이에 민주주의의 광장은 좁아졌고, 시민들은 광장 밖으로 쫓겨나고있다. 이제 새로운 시선으로 현실을 냉정히 진단하고 청년과 영세자영업자 같은 “‘민주주의 밖의 시민들을 대변해야 한다.

 

2세대 진보정치론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은 조성주가 같은 7월에 낸 책이다. 2세대 진보정치론의 배경과 방법 등을 알린스키라는 1960년대 미국의 사회운동가가 쓴 책에 대한 강의의 형식으로 설명한다. 조성주는 60년대 미국과 현재의 한국을 오버랩시키며, 당시 미국에서 들끓던 신좌파 운동의 관념성과 조급증에 쓴소리를 마다않던 노()활동가에게 감정이입한다. 그가 보기에 한국의 80~90년대 학생운동의 변혁성과 현재까지도 그때의 낡은 언어를 붙잡고 있는 고집불통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2세대 진보정치는 1세대와 대비하여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이항대립의 형식을 빌어 설명하자면, ‘1세대 vs 2세대계급 vs 갈등’, ‘지배체제 vs 민주주의’, ‘혁명 vs 타협’, ‘투쟁 vs 정치’, ‘이념 vs 자기이익이다. 1세대는 우리 사회를 노동계급을 착취 지배하는 체제로 바라보았고, 혁명을 목표로 계급투쟁을 수단으로 삼는 이념에 뿌리내려 있었다.

 

그러나 1세대의 이념은 환상의 거미줄”(26)에 불과했다. 이제는 환상에서 빠져나와 사회적 약자들의 이익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기이익이 서로 다른 구성원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영원한 것은 갈등이요, 유한한 것은 갈등의 내용과 모습, 당사자들이다. 그리고 다양한 갈등들을 풀어가는 정당한 룰과 장소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야말로 사회적 약자들의 힘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체제”(45)이다. 갈등 상대를 타도하고 제거하는 건 민주주의 밖의 문제이므로, 민주주의 안에서 현실적인 목표는 타협이며, 그 수단이 정치이다. “정치는 불평등한 한 사회의 약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강력한 방법”(47)이다.

 

낡은 딱지 붙이기

 

갈등과 민주주의를 축으로 새로이 사회운동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사회주의 지향의 운동에 대한 대안을 자임하며 1960년대부터 신사회운동, 포스트주의, 급진민주주의론 등의 여러 이름으로 있어왔다. 이런 주장들은 68혁명의 퇴조와 현실사회주의 붕괴 같은 전환점들에서 매번 사회주의를 낡은 이념으로 매도하면서 자신들의 리바이벌은 새롭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잔가지를 치고 나면 그 줄기는 주관적인 사회인식이라는 점에서 늘 같았다. 그들에게 사회란 무질서하고 부조리한 세상”(109)이고, 이념의 문제는 사회 속에 질서와 이치가 있을 뿐더러 이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념이 과잉이면 운동은 실패한다. 조성주가 1세대 진보정치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자본주의의 과잉이고, 괴물처럼 자라나는 타겟을 겨누지 못하는 운동의 미성숙이다. 조성주 같은 이들은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이들을 위한 정치를 말하지만, 자본이 자본이기 위한 조건 즉, 이윤획득과 축적이 약자가 계속 약자가 되고, 누군가는 밑바닥에 남아야 하는 부도덕한 굴레와 위계 없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는 침묵한다. 한편에는 부의 축적이, 다른 한편에서는 굴종의 축적이 자본주의의 영원한 질서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30년을 건너 이러한 사회인식이 다시 전세계적으로 깨어나고 있다. 남미에서, 남유럽에서, 영국과 미국에서까지. 그런데 우리도 다시 가야할 길에 낡은 딱지나 붙이는 착오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동개혁앞에 흔들리는 노동계급

 

 

86,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경제 전반에 대한 대수술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노동개혁을 으뜸으로 하는 “4대 구조개혁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노동개혁 없이는 청년들의 절망도, 비정규직 근로자의 고통도 해결할 수 없다.” “청년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해야 한다. “일단 좋은 일자리에 취업하면 일을 잘하든 못하든 고용이 보장되고, 근속년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으로 올라가는 시스템으로는 기업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기 어려우니, “능력과 성과에 따라 채용과 임금이 결정되는 공정하고 유연한 노동시장으로 바뀌어야한다.

임금피크제와 저성과자 퇴출제, 성과급제를 내세운 정부의 노동개혁 도발에 맞서 양대노총이 함께 투쟁하는가 싶더니, 한국노총은 노사정위 복귀를 결정해 버렸다. 선거에서 지더라도 노동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정권의 다짐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어떤 변화도 현재보다는 낫겠지라는 불만 상태

 

투쟁의 형세는 녹록치 않다. 노동개혁의 명분으로 삼고 있는 각국의 생존경쟁저성장 고착화”, “고용창출력 약화등의 경제문제가 만들어진 위기가 아니라 실제상황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문제 있다라는 건 실감하고 있고, 여기에 박근혜 정부가 일단은 해결방안을 던져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해결방안이란 게 편가르기와 책임 떠넘기기, 이간질로 국민정서를 자극하며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청년 대 장년, 비정규직·실업자 대 정규직, 민간 대 공공부문으로 편을 나누고, 후자를 기득권 세력으로 몰며 양보와 타협을 종용한다. 반대하자니 기득권 세력이고, 찬성하자니 생계가 달려 있는 답답한 형국이다.

그런데 조직노동자들이 청년,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처지를 가벼이 여겨서는 온갖 불명예와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이다. 노동계급이라는 추상적인 동질성 아래의 민낯들이 노동개악 선동의 불씨이자 연료이기 때문이다. 공공부문 한 구석에는 연줄로 들어오거나 고용안전을 방패로 상식적인 책임감도 없이 고임금만 챙겨가는 집단이 분명 있고, 정규직이 비정규직에게, 대기업 노동자가 중소기업 노동자에게 행하는 갑질과 주는 상처가 적다 할 수 없고, 일은 더 하면서 월급은 반도 안 되는 고스펙의 젊은 직원들이 연공서열과 호봉제에 갖는 반감은 클 것이다. 실업 상태인 청년들이 가지는 박탈감과 불안은 이보다도 훨씬 클 것이고, 이런 현실들이 분열과 서로에 대한 몰이해, 불만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보듬어지지 않는 피해의식은 어떤 변화도 현재보다는 낫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이어진다. 이 틈새를 박근혜 정부가 치고 들어오고 있다.

 

틈새를 채울 연대와 과감한 대안

 

우리 조합원들만 챙겨서는 바깥에서 욕 먹고 안에서도 소수가 되는 시대가 된지 이십여년째인데, 그간 노동운동의 변화는 더디었고 청년과 비정규직 프레임까지 정부에 내준 꼴이 되었다. 노동운동의 선전 속에서는 비정규직 등의 약자가 우선이었지만 많은 조합원들의 실제 삶에서는 뒷전이었던 탓이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물질적 팽창 속에서 남 못지 않은 생활을 누리는 사이, 어느새 자기 삶을 향하는 부러움과 박탈감에 연대의 손을 건네지 못했던 결과이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은 최종 시험대가 될 것이다. 노동계급 내부의 틈새를 실제로 채워가는 연대 없이, 또 정부와 자본에 구실을 내주었던 잘못된 행태들에 대한 자정 없이는 임금피크제와 쉬운 해고, 동료들간의 극심한 경쟁, 노동조합 해체가 모두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그리고 노동개혁이 한국경제가 앓고 있는 중병에 대한 저들의 처방이니만큼 단순히 노동개악 저지가 아니라, 우리도 경제대안을 제출하고 이와 유기적인 전략과 조직을 구성해가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오늘의 위기는 자본의 위기이다. 성장이 느려지고 일자리가 부족해진 건 자본주의가 한계에 도달해서이다. 거대한 물질적 팽창으로 매번 위기를 넘겨왔지만, 이제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고용자수와 임금을 비용으로 인식하는 자본 대신 공공부문이 일자리 창출을 주도해야 하고, 공공부문 확대를 위해 시장화를 멈추고 자본의 사회화(·공유화)가 추진돼야 한다. 과감한 대안과 급진적인 의지가 험로를 밝힐 빛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누가 소유하든 무능은 계속된다

 

 

삼성-엘리엇 사태를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들

 

지난 526, 삼성그룹은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흡수 합병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목적은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이다. 이 부회장은 제일모직 지분 23.23%를 갖고 있고, 제일모직은 삼성생명 지분 19.3%, 삼성물산과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을 각각 4.1%, 7.2%를 소유하고 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을 통해 그룹의 양대축인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지배할 수 있는 소유구조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삼성물산 지분 7.12%를 매입한 미국계 투기자본 엘리엇이 제일모직과의 합병을 반대하고 나서면서 논란이 커졌다. 명분은 주가기준으로 합병하면서 자산이 30조원에 이르는 삼성물산을 겨우 86천억원 정도로 평가해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속셈은 판 흔들기를 통한 단기 시세차익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삼성-엘리엇 사태에 갖가지 논평들이 쏟아졌는데 주목받은 그룹은 크게 두 곳이다. 한 곳은 소액주주 권익보호와 기업지배구조 개선 운동으로 알려진 경제개혁연대(김상조 소장)이고, 다른 한 곳은 정승일 교수 등을 중심으로 한다. 경제개혁연대는 그간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서 주주나 이해관계자의 권익이 철저히 무시돼왔고, 이번 사태도 합병비율과 합병의 시너지 효과 등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삼성에 비판적이다. 반면에 정승일 교수 등은 주로 엘리엇에 비판적이다. 엘리엇은 기업 사냥꾼이고 삼성 약탈이 목적이므로, 일단은 이로부터 방어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이런 생각은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에 반대하면서 재벌이라는 기업집단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장하준 교수의 이론과 맥이 닿아 있다.

 

 

사회화에 대한 논의로 이어져야

 

삼성-엘리엇 사태를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들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소유제도경제발전사이의 관계이다. 경제개혁연대 같은 입장은 주주의 소유권을 최우선시하는 신자유주의와 맞닿아 있다. 주주가치 극대화(주가 상승, 배당 확대)가 기업 경영의 목표여야 하고, 이를 촉진할 수 있는 자본시장 및 기업지배구조 형태가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이념이다. IMF 구제금융과 함께 한국사회로 이식되어 그간 학계 주류로 자리잡아 왔다.

 

이와 달리 장하준, 정승일 같은 입장은 단기 이익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장기 투자를 인내할 수 있는 기업집단과 안정된 경영권, 이를 보장하는 국가개입이 영미식 체제보다 한국경제에 적합하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해 두 이념 다 올드하다. 자유로운 주식시장이 기업경영을 건전하게 이끌 수 있다는 환상은 2008년 세계적인 거품붕괴와 경제위기로 산산히 깨졌다. 또한 재벌이 이끄는 한국경제는 현재 저성장과 고용부진, 양극화로 고통받고 있다. 1997, 이어서 2008년 이래로 펼쳐진 경제적 고통의 시대는 근본적인 문제를 현안으로 복귀시켰다. 즉 사기업 체제가 사회의 주요 자원들을 독식하면서도 사회적 목적(고용, 복지 등) 달성에는 무능하다는 것이다. 근래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같은 대안기업에 대한 고민과 실천들이 쏟아져 나온 배경이다. 사기업 체제의 무능은 기업의 성과를 주주이든 재벌가문이든 소수의 자산가들이 대부분 향유한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이처럼 분배를 왜곡하는 현 사적 소유제의 한계를 넘어서고, 그 공적 성격을 강화해가는 것이 시대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삼성-앨리엇 사태에서 삼성물산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누구 손을 들어줄지 향방이 주목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도울지, 앨리엇의 주장대로 삼성물산 주주가치 보호에 나설지 말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노동자, 민중의 이익은 없다. 대신에 공적 자금인 국민연금이 재벌 혹은 투기자본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편에서 기업의 공적 성격을 강화해가는데 나서야 할 것을 주문하고, 사적 소유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소유의 사회화에 대한 논의를 넓혀가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준금리의 의미와 최근 추이

 

지난 312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2%에서 1.75%로 인하했다. 그리고 49일에는 기준금리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은행은 매월 둘째주 목요일에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기준금리를 결정한다.) 앞으로도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사상 최초의 1%대 기준금리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준금리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주요한 수단들 중의 하나이다. 자본주의국가의 경제개입수단은 흔히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으로 분류된다. 재정정책은 정부가 예산지출과 감세를 통해 수요를 부양하는 것이며, 통화정책은 중앙은행이 통화량과 기준금리를 조절해 경기변동에 대응하는 것이다. 금리를 높일 경우 가계에서는 저축 성향이 높아지고 기업에서는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므로, 경기과열과 물가상승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반대로 금리를 낮출 경우 시중에 통화량이 늘어 경기부양과 물가회복을 돕는다. 1970년대에 미국, 서유럽에서 적극적인 재정정책에도 불구하고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는 스테그플레이션을 겪고 나서는, ‘작은 정부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슬로건 하에서 통화정책이 더 중요하게 대접받는 편이다.

 

최근 몇년간의 한국은행 기준금리 추이를 살펴보면, 미국발 금융위기 직전인 20088월에 5.25%, 그리고 월스트리스가 휘청거렸던 `0811월에는 4.00%, 12월에는 3.00%, `092월에는 2.00%로 가파르게 낮아졌고, 이후 서서히 올라 `116월에 3.25%까지 올랐다가 다시 낮아져 현재 1.75%에까지 이르렀다. 기준금리만 놓고 보면 `08년 세계경제위기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뿐더러 더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초저금리 시대에 관한 단상

 

물론 기준금리만으로 경제상황을 재단할 수 없다. 3월에 한국은행이 금리를 역대 최저로 인하한 것에 관해서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 우려에 대한 대응 또는 장기간의 경기하강에 써볼 건 다 써보는 식의 대응 등으로 평가하고 있다. 요는 경제전망이 비관적이라는 말이다. 이게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IMF는 최근 보고서에서 세계경제가 구조적 장기침체로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금리인하가 당장은 저금리 전환대출 등으로 기대효과를 보고 있다. 중산층과 서민의 이자 부담을 줄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채무자 입장에서는 이자부담을 경감시켜주는 금리인하가 한편에서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는 대외취약성의 증가이다. 현재 최대의 경제이슈는 미국의 연준이 언제 금리를 인상하느냐인데, 미국에서 금리가 오르면 자본유출과 이로 인한 자산가격 하락, 금융혼란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금리가 낮을수록 미국 금리인상의 충격과 후폭풍은 더해질 것이다.

 

둘째, 부채와 투기의 증가이다. 이자가 싸질수록 돈을 빌리려는 유인이 커지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지금도 가계부채 수준이 심각한 수준이고 저성장에서 빚낸 돈이 몰릴 부동산시장이나 주식시장이나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점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소득이 늘지 않는데 자산가격이 계속 오른 적은 없다. 부채로 커진 거품은 터지기 마련이다.

 

셋째, 금융약탈의 심화이다. 비관적인 경제전망, 경기침체의 장기화 가운데서 적당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유휴자본이 열을 올릴 곳은 뻔하다. 바로 서민의 주머니이다. 전 국민을 채무관계로 옮아매어 모든 소득에 빨대를 꽂아 밑천까지 다 털어먹도록 온갖 술수로 빚을 권할 것이다.

 

2008년 미국에서의 경제공황이 2000년대 초저금리 시대에 뒤이어 찾아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충분한 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금융기관들은 주택을 담보 잡아 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해주었고, 빚을 상환하지 못하면 매몰차게 집을 압류했다. 결국 대규모의 채무불이행과 주인 잃은 주택매물이 쏟아져 부동산시장이 붕괴하고, 악성채권 증가에 금융기관들도 연이어 도산하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정치적 권리가 없는 민중은 빚에 길바닥으로 내몰릴 것이고, 반대로 권력을 획득한 민중은 약탈자들을 몰아낼 것이다. 연대와 투쟁이 우리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 모멘툼 vol. 01
김민하 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Angry Review

 

 

저자들 중에 이택광박권일이라는 이름을 보고 내키지 않았지만 읽어는 보았다. 예전에 88만원 세대를 5페이지 정도 읽다가 어법도 안 맞는 문장들에 어이가 없어 덮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혹시나, 역시나였다. 겨우 1장만 읽었을 뿐인데 화가 나서 쓴다. 이택광이 쓴 창간사 첫 문장부터가 터무니없었다.

 

위기의 시대는 기존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4)

 

이게 무슨 말인가? 학교 다닐 적, 돈이 한푼도 없어 종일 자취방에 누워만 있었던 적이 있었다. 세끼를 굶어보기는 그 날이 처음이었다. 배고프니까 별의별 생각 다 나더라. 보통 사람에게 위기란 이런 것들이다. 돈이 없고, 직장을 잃거나 못 구하고, 큰 병 나는 게 바로 위기이다. 그리고 개인에게 닥친 불행에 정부가 뒷짐 지고 있고, 이런 정부를 사회가 무심하게 용인하는 상황이 위기의 시대의 단면일 것이다. 난 이택광이 말하는 위기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웃의 빈곤을 말로 드러낼 수 없어 해결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고매한 학문을 오래 하신 교수님의 고견이러니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진지전에 대비하여 무크지는 유격전이라는 표현에 또 기도 안 찬다. 그럼 신문은 전격전이고, 방송은 공중전, 덧글 다는 건 우주전일 것이다.

창간사 다음에는 박권일이 쓴 머리말이 나온다. 머리말 중에 요리조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이 나온다.

 

일베는 소비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의 공백에 침투한 극단주의라기보다 소비자본주의의 극단에서 발생하는 주목 경쟁의 영역에 놓여 있다.” (9)

 

소비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의 공백에 침투한 극단주의는 무슨 뜻이고, “소비자본주의의 극단에서 발생하는 주목 경쟁은 어떤 의미인가? 골을 아무리 쥐어짜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어지는 부언도 없다. 머리말 다음 본문에 나오려나 보다. 그런데 박권일이 쓴 1장의 제목 역시 골 때린다. “공백을 들여다보는 어떤 방식 : 넷우익이라는 보편 증상’”

 

이쯤 되니 정말 대단한 내용이라도 나오는줄 알았다. 마음을 가다듬어 한 장, 한 장씩 읽어내려갔다. “주체라는 단어가 남발되고, “코호트남근주의니 하는 개념이 불쑥 튀어나오는 거야 애써 참았다. 그런데 마지막 61쪽까지 읽고 나니 진심으로 화가 난다. “소비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의 공백이니 소비자본주의의 극단이니, “보편증상이라는 말은 낚시를 위한 미끼였던가?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과 논리가 없다시피 하다.

 

박권일이 쓴 글은 그냥 한 마디로 요약된다. 일베는 엇나간 방식으로 주목받고자 애쓰는 불만 많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 하나마나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별의별 개념들과 인용들을 끌어다가 책으로 만들었으니 무엇하러 이 짓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게다가 이처럼 단순한 주장을 하는데도 좌충우돌이다. 글 처음에 국정원 게이트를 지적한 건 좋았다.

 

국정원 사태가 여기까지 밝혀진 이상 우익 담론의 자연 발생 공간으로서의 일베라는 가정은 기각되어야 한다. ‘자생적 담론이라는 중요한 전제가 붕괴한 것이다.” (27)

 

이쯤 말했으면 일베의 구성에서 외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밝혀가는 게 당연한데, 어찌된 건지 이 뒤로는 외부에 대한 언급은 없고, 글의 결론은 자신이 앞서 기각한 자생적 담론과 다르지 않다.

 

일베를 추동하는 내기물은 고전적 의미에서 사회의 인정이 아니라 대중의 주목’, 다시 말해 개인이 불특정 다수에게 주목받는 것이다.” (56)

 

아마도 글을 쓰다가 앞을 잊어버렸나 보다. 이 말이 농담이 아닌게 34쪽에 보면 서두에 언급한 반유대주의에 관한 이야기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1장 서두 어디에도 반유대주의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저기에 쓴 글을 짜집기 했다는 증거이다. 앞뒤가 짝이 안 맞는 건 이게 끝이 아니다.

 

44~47쪽에서 표창원이나 진중권이 일베에 대해 루저가 된 원한 감정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 내용에 대해서 지나치게 약한 설명’”이라고 비판해놓고는, 54쪽에서는 일본의 사회학자 다카하라 모토야기는 한중일 세 나라 청년 세대의 적대 의식을 분석하는 책에서 일본 청년 세대의 원한 감정이 사회경제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면서 중요하게 인용한다. 그러면서 57쪽에서는 원한 감정을 내포한 상상된 착취라는 개념으로 일베를 규정한다. 이처럼 기본적인 자질인 일관성도 없는 저자가 아래와 같이 어렵디 어려운 말들을 늘어놓으면 정말 자기가 이해나 하고 하는 말인지 불신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주체들을 특정한 언어의 사용자로 동결시키는 것, 또는 어떤 단어들을 특정한 주체의 도구로 규정하는 것은 담론 분석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관건은 적대의 배치와 효과를 포착하고 그것이 억압하거나 은폐하는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36)

 

이 책이 가진 악덕, 즉 뜬금 없는 개념들로 부실한 내용 덧씌우기, 논리의 비약, 좌충우돌 등등이 모두 집약돼 있는 60쪽을 마지막으로 인용하면서 평을 마치겠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과연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 각자 판단하시라.

 

다소 주제에서 벗어나는 논의이지만 넷우익과 소위 촛불시민을 일종의 길항 관계로 파악해볼 수도 있다. 이는 일베는 촛불에 대한 반작용운운하는 인과적 설명과는 일절 무관하다. 넷우익과 촛불시위는 공히 사회의 반정치화라는 보다 상위의, 포괄적인 사회적 경향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길항 관계라는 건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나 서로 경쟁하고 대항하고 있다는 의미다. 넷우익이 우파-기층 보수의 불만을 표상하는 공백으로서 출현했다면. 촛불시민은 좌파-운동권의 공백을 일거에 봉합하고 채워 넣으려는 과잉이었다. 과잉인 이유는 이들이 반정치적 정치와 정치적 반정치를 동시에 구현하려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정당정치의 지지부지한 과정을 생략하고 광장에서 주권자와 직접 대면하려는 모습은 반정치적 정치인 반면, 보수 우파와의 정치투쟁을 선악의 아마겟돈으로 파악하는 모습, 예컨대 새누리당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히 옳은 것이므로 우리는 찬성해야 한다는 식의 폐쇄 회로적 진영 논리는 정치적 반정치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60)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Angry Review

 

 

형편없는 1장에 비해서 6장의 다시 파시즘을 생각하자는 다소 낫다

글쓴이인 이택광은 극우주의에 대해 하나의 가설을 제출한다.

 

극우주의야말로 근대에 대한 열망 이외에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파시즘을 모태로 삼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221)

극우주의 뿌리에 파시즘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극우주의는 세계대전을 통해 극적으로 19세기 경제적 자유주의가 위기에 봉착함으로써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고전적 파시즘의 변용이자 귀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229)

 

이택광은 극우주의의 모태로서의 파시즘에 대해 새로이 정의하기에 앞서, 파시즘을 전체주의로서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는 상투적인 어법을 비롯해 이른바 발생적이론들을 검토하고 비판한다. 발생적 파시즘론의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로버트 팩스턴과 니코스 풀란차스가 있다.

그러나 팩스턴과 풀란차스의 이론에는 파시즘을 특정한 정치적 시기에 발생한 특수한 사건으로 못 박아버리는”(223) 한계가 있다. 파시즘은 전간기 상황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보다 보편적인 구조를 내포한다. 이택광은 파시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파시즘은 포스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상품이자 이데올로기적 생산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시즘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상품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품은 단순한 사물에 그치지 않고, 대중에게 세계관을 부여하는 소통의 수단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기에서 소통이라는 것은 정동의 교환을 의미한다. 파시즘은 신념에 기반을 둔 절제된 자기 규율화를 요구함으로써 불쾌한 쾌락을 발생시킨다. ‘즐겨라라고 속삭이는 자본주의 쾌락원칙과 이런 파시즘의 요구는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모순이 바로 파시즘을 대중에게 인준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범람하는 자본주의 쾌락에 맞서 자기를 규율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이중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규율적 정동의 효과는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정치에 대한 동의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파시즘은 바로 이런 대중의 원리에 근거해서 영웅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229~30)

 

길게 인용한 건 특히나 이 부분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해서이다. 극우주의에 대한 해설서에 다시 해설서를 읽어야 할 판이다. 어쨌든 이택광은 이어서 칼 폴라니를 중요하게 인용하며 자유주의는 파시즘의 인큐베이터”(231)라는 걸 강조한다. , 경제 요소를 시장화하면서 사회를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유주의에 반발하여 경제를 다시 재사회화하려는 운동으로서 파시즘을 정의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근래의 우익주의는 신자유주의가 일으킨 사회해체에 대한 반발이 될 것이다.

 

그런데 파시즘에 대한 이런 정의는 단선적이고 도식적이지 않은가? 전간기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했던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점, 그리고 고전적 파시즘이 보여주였던 극단적인 인종주의와 제국주의군사주의 및 반공주의 같은 복잡한 성격들을 그 정의로부터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점 등이 문제이다. 파시즘이란 개념을 역사와 지역을 초월할 정도로 확장시켜 남은 건 앙상한 추상일 뿐이다. 이제 파시즘은 모든 것이면서 무엇도 아니다. 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적 전통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게 파시즘일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뭐? 파시즘이라는 딱지 말고 무엇이 남는가? 자유주의의 위기 가운데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이든 국가라는 동일시의 대상이든, 이의 이름으로 다시 질서를 세우려는 게 파시즘이고 극우주의며 일베라고? 의외로 나쁘지 않은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식도 자랑이다 2015-06-30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무식도 자랑이오.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인용한 구절이 그리 어렵단 말이오? 졸라 쉽구만.

eEe 2015-07-01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궤변이 궤변인지 모르는게 무식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