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지난 주간에는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읽었다. 화장실에서나 틈틈이 보려고 구매한 것이었는데, 읽으며 어찌나 지적 쇼크와 감동을 받았던지 잠까지 줄여가며 읽어버렸다.

그런데 ‘지적 쇼크’라는 표현은 사실 무척이나 과장된 것이다. 먼저 이해가 돼야 쇼크를 받던가 말든가 하지, 대충 글자들을 훑으며 중간중간 간혹 이해되는 구절들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끔 ‘어라, 이것 대단한데!’ 라는 생각도 하고, 이러면서 겨우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뿐이다.

그래도 다시 읽으며 중간중간 든 단상들을 꿰매어 정리해보면 어떤 진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또 읽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중간에 포기했다. 바디우의 ‘진리’, ‘진리과정’, ‘사건’ 등의 개념을 대략이라도 파악하지 않고서는 더 읽어봐야 별로 나올 것도 없을 것 같아서였다. 바디우가 ‘사도 바울’에서 이 개념들에 대해 직접 서술해놓았으면 다른 책들을 참조해야 하는 수고는 안 들었을 것이라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일단 책장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곧장 떠올린 게 바디우의 ‘조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 바울’ 마지막 페이지에 “이 책(‘조건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명료해서 ‘존재와 사건’을 위한 입문서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광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전부터 ‘새물결’ 출판사의 ‘이행총서 시리즈’는 구입해두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터라 바로 구매리스트에 등록해 놓았다. 그러나 사고 싶은 물건을 곧바로 살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지 못한 터라 구매할 날만을 손꼽으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제 문득 바디우의 ‘진리과정’이라는 개념을 혹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2’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사유 -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 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이다.” -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2

여기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라는 유명한 말도 생각을 전개해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유는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그 현실성과 힘을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실천을 통해서 그 현실성과 힘을 증명한 사유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의식 가운데서는 어떤 사유도 자신의 진리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실천을 통한 사유의 진리성 증명을 ‘검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검증이란 실천의 의미를 단지 진리의 ‘보증자’로만 한정짓는 것이다. 즉 의식에서 생산된 어떤 사유의 잠재적인 진리성을 실제로 확인하는 것만이 실천의 역할은 아니다. 실천의 의미를 품질검사관이 확인도장을 찍는 절차 정도로 축소시키는, ‘검증’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관점은 실천이 또한 진리가 생산되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은폐한다. 실천은 단순히 공정을 마친 제품을 검사하는 절차가 아니다. 실천은 그 자체가 진리의 생산공정인 것이다.

이 말은 순수한 의식이 결코 진리의 생산 공간일 수 없다는 말이다. 실천 이전에 순수한 의식의 영역에서 진리를 생산하는 올바른 방법론이란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하다. 진리가 생산되는 곳은 의식과 물질이 상호교통하는 실천이라는 장소이다.

이 말의 의미는 사실 무척이나 까다롭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사유의 현실성을 믿고서 행동한다. 그러나 사유의 현실성은 오히려 실천이라는 계기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알고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동하고서야 알게 된다. 어쩌면 모든 새로운 도전은 오인(자신이 진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착각)의 산물이다. 진리의 주체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자신의 실천으로써 스스로 증명해보여야 한다. 주체는 진리공정에 개입한다.

주체가 진리공정에 개입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흔한 주/객 인식론에서 주체에게 대상은 오로지 ‘소여’로만 관계한다. 주체는 관조할 뿐이다. 그러나 실천의 인식론에서 주체는 대상을 해체하고, 구성하며 대상에 자신을 기입한다.

여기에 죽어서야 헤어질 것 같은 뜨거운 연인이 있다. 그런데 사랑에 불타고 있는 남자의 친구가 이들의 사랑을 내기에 걸었다. 여자는 다른 남자의 유혹에 굴복할 것이며, 남자는 질투에 미쳐 여자를 파멸시키리라고. 내기를 건 친구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여자를 유혹했고, 마침내 성공해내었다. 그리고 이를 슬그머니 남자에게 흘렸다. 그러자 남자는 친구의 예상대로 여자를 파멸시켜버렸다. 그들의 사랑은 ‘가짜’였던 것이다.

남자의 친구는 자신의 생각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해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친구의 유혹이 없었다면 연인은 자기들 사랑의 진정성을 자신들의 삶을 통해 온전히 증명해냈으리라는 것이다. 친구의 ‘진리’는 그의 개입을 통해 ‘진리’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삼류소설같은 이야기가 모든 진리공정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진리가 증명되는 상황이란 주체의 개입을 통해서만 출현할 수 있다. 사유의 현실성과 힘의 증명은 주체적 개입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근거할 때 진리란 단순히 주체 너머의 대상 또는 물질의 의식에의 반영일 수 없다. 의식에 반영되는 대상, 물질이란 이미 주체가 기입된 것이고 실천의 산물인 것이다.

잠깐 다시 삼류소설로 돌아가면, 친구의 개입을 통해 생산된 진리란 다음같은 것이다. 하나, 연인의 불타는 사랑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파멸의 잠재성. 둘, 파멸의 잠재성을 활성화해낸 개입의 유효성.

이제 비약의 비약을 거듭해, 나는 모든 진리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보고일 뿐이라고 말하겠다. 1)현상에 의해 은폐되어 있던 잠재된 힘. 그리고 2)잠재된 힘을 해방시킬 주체의 역능. 따라서 진리의 대상이란 ‘현상’이 아니라, 현상을 주조해내는 이면의 ‘힘’이다.

이런저런 별 쓸모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는데,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바디우의 ‘진리’, ‘진리과정’, ‘사건’ 등의 개념을 이런 생각에 비추어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 것인가라는 것이다.

진리가 실천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고, 주체의 개입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은 어떤 계기를 통해 진리를 생산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앞서 “인간은 알고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행동하고서야 알게 된다. 어쩌면 모든 새로운 도전은 오인(자신이 진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착각)의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진리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오인 혹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에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믿음의 대상이 ‘사건’이고, ‘사건’을 ‘믿음’으로써 진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게 ‘사도 바울’의 내용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거의 알지도, 고민도 안 해본 이야기를 하려니 글이 자꾸 엉키고, 스스로도 창피한 마음이 들지만 좀 더 용기를 내서 더 써내려가도록 하겠다.

바울에게 사건은 ‘예수의 부활’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을 믿고, 이러한 믿음에 근거한 실천을 통해 부활이 의미하는 ‘힘’의 현실성을 증명해내었다. 즉 진리를 생산해내었다. 인간은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진리를 말이다. 사건은 주체를 통해 보편화된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인간의 부활로서 회귀한다. 진리란 보편화된 사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 믿음이 없다면 실천도 없었을 것이요, 그렇다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는 순전히 우화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진리의 주체는 사건을 믿는 주체이기도 하다.

바울의 사건이 예수의 부활이었다면, 혁명가의 사건은 무엇일까? 난 혁명가에게 있어 사건은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의 의미는 억압받는 민중이 스스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가는 ‘민중의 자기발전’을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근거해 역사에 개입해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개입으로써 역사는 해방된 사회를 향해 진군해간다는 진리를 증명해낸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질곡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라는 것, 사회주의의 필연성에 대한 사상은 사회주의 혁명가의 개입으로써만 진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난 바디우가 이러한 사상과 사회주의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이념을 우주에 대한 총체적 인식으로 파악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 인식을 이미 진리로 여긴다면 우리는 결코 ‘진리’를 즉 사회주의를 생산해낼 수가 없다. 이러한 철학적 태도 내에서 사회주의자는 대기주의로 빠지거나, 소련붕괴 같은 사건에 사상을 청산해버리거나, 무지자에 대한 지배를 재생산하게 된다.

사회주의자는 사상에 믿음으로서 관계해야만 진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은 실천하는 사회주의자를 정초하는 사건이다. 믿음의 대상이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믿음의 대상이 아닌, 이론적 판단의 소재로 전락시키는 순간 그는 결코 진정한 사회주의적 주체가 될 수 없다.

이제 정리와 한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마치겠다.

“사회주의적 주체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믿는 주체이며, 주체적 개입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의 힘과 현실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자이다.”

91년 청산주의가 사회주의 진영을 휩쓸 시, 가장 똑똑했던 이데올로그들이 가장 먼저 청산하고 떠났다고 한다.
똑똑하고 잘난 것은 사회주의적 주체를 재생산하는데 있어 전혀 필요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스팅을 하기 이전에 내게 ‘사건’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문득 떠오른 게 ‘광주민중항쟁’이었다. 어린 마음에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알았을 때 흐르는 눈물과 손에 베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는데, 슬픔과 분노 가운데서도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했던 최후의 투사들이었다. 난 그때 인간은 ‘자기’와 ‘이익’이 아닌 무언가를 위해 싸우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체험했다. 더욱이 그들은 너무나도 평범했던 사람들이었다.
5월의 광주를 생각하면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임) ‘사도 바울’은 또한 역사에서 간혹 나타나는 예측하지 못한 대중의 급진화에 대한 이해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 같다. 집단적 ‘믿음’에 의한 집단적인 주체화. 그리고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진리공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쾃하라! 저항하라! 창작하라!


장면 #1

  2004년 7월, 철거가 예정된 청계천 삼일 아파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스며들었다. 그들은 ‘풍찬 노숙’을 하던 이들이다. 개발에 맞서 벌였던 철거 싸움도 끝이 나고 거주민들의 이주도 끝나버린 텅 빈 건물, 청계천 삼일 아파트가 10여 명의 노숙자들에 의해서 스쾃되었다. 깨어진 창문은 수리되고 쓰레기가 가득 담긴 집들은 말끔하게 청소되었다. 배관 기술을 가진 이는 화장실과 욕실을 수리하고, 목수였던 이는 문짝을 다듬었다. 자신의 몸에 익은 기술로 자신이 살아갈 집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이들에게 ‘남의 건물에 무단으로 들어가면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나와 있는 형법 319조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문제를 타인의 힘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지 않고, 스스로 현실의 벽을 넘어서는 그들에게 있어서, 법적인 테두리는 이미 의미가 없었다. (김강,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269-70쪽)

장면 #2

  드디어 2004년 8월 15일 오후 4시, (1998년에 공사가 중단된 채 약 7년째 53%의 건설공정만을 마친 채 도시의 흉물로 목동 한복판에 서 있던) 예술인회관 건물에서 “시민에게 문화를! 예술가에게 창작실을!”이란 현수막이 내려짐과 동시에 성명서가 낭독되었다. 20여 명의 예술가들은 15일 새벽 예술인회관 옥상으로 진입했고, 같은 날 오전 예술인회관 밖에서는 페스티벌이 개최되고 있었다. 예술인회관 외부에서 콘서트와 ‘출입금지’ 리본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페스티벌을 개최하던 예술가들이 회관의 입구 쪽으로 행진했다. 그들이 예술인회관 정문에 도착했을 때, 회관 내부에 있던 예술가들은 집단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같은 책, 251쪽)


스쾃은 불법행위에 불과한가?

  스쾃(SQUAT)이라는 말은 ‘무단점거’ 즉, ‘어떠한 허가도 권리도 없는 점유’를 의미한다. 앞의 장면들처럼 자기 소유가 아니지만 비어있는 토지나 건물에 들어가서 주거住居나 작업의 목적으로 그 공간을 사용하는 것이 스쾃이다. (장면 #2는 창작공간의 확보를 위한 ‘예술스쾃’의 한 사례인데, 예술스쾃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소개하겠다.) 과거에는 대도시 곳곳에 있었다가 지금은 사라진 판자촌이 한국에서의 스쾃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쾃은 부언할 필요도 없이 사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이다.

  그런데 스쾃을 단순히 불법행위로, 따라서 법 집행의 강화로 소멸시켜야할 범죄행위로 볼 수 없는 것이, 스쾃은 한편으로는 근대화 나아가 자본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스쾃은 개인의 일탈행위로 치부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현상이다. 스쾃을 사회적 해결을 요구하는 사회문제로서 인식하는 것은 스쾃을 이해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쾃이 타인의 소유권을 침해하고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얻고자 하고 또는 지키고자 하는 것은 비와 추위를 피하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주거의 공간이다. 그리고 스쾃은 인간이 인간 이하의 삶으로 떨어지기 전에, 아니면 나락에서 올라오기 위해 인간다운 삶을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즉 스쾃은 생존권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절박한 직접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스쾃의 존재 자체는 그 사회가 인간다운 삶의 최소조건인 주거의 권리를 안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스쾃은 기본적으로 도시에서의 주거공간 부족 또는 주거공간에 대한 접근성 악화로 인해 발생하는 도시현상이다. 도시의 정상적인 발전을 상회하는 급속한 도시인구 증가로 인한 주택부족이나 주거비용 상승은 종종 도심 곳곳이나 주변부에서의 대규모 스쾃을 야기한다. 주거공간에서 배제된 극한 상황에 직면하여 비어있는 사유지, 공유지를 점거해 살 집을 스스로 짓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스쾃은 유럽과 한국에서의 급격한 산업화 시기에 발견되며, 또한 현재의 제3세계 도시들에서 매일 관찰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현재 제3세계 도시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농촌의 붕괴와 이에 따른 대규모 이농, 그러나 이를 흡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 주택, 공공시설의 문제로 극심한 성장통을 앓고 있다(마이크 데이비스, 『슬럼, 지구를 뒤덮다』 참고)

  그런데 한국의 판자촌이 경제발전에 따라 점차 사라져갔듯이, 스쾃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빈터에 스스로 집을 짓는 방식의 스쾃은 여전히 비닐하우스 집이라는 모습으로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빈 건물의 점유와 같은 방식 등의 스쾃에 대한 유인도 여전히 강하게 존재한다. 이는 단적으로 노숙인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주거권조차 박탈당하는 최악의 도시빈곤이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항시적인 요소로 남아있다는 점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도시빈곤의 극단적인 모습들(가령 노숙)을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확대시키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할수록 도시로 경제적 기능 및 인구가 더욱 집중된다. 여기에 투기적 수요가 겹쳐 부동산이 지속적으로 상승한다. 그리고 부동산 상승은 대개 소득 증가를 앞지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도시빈민은 주거비용 상승에 갈수록 취약해진다. 이어서 경기침체로 인한 소득붕괴가 겹치면, 도시빈민은 주거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한국에서는 IMF위기 때 벌어졌으며, 현재 미국에서는 ‘서브프라임 난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택담보대출을 갚지 못해 거리로 내쫓기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부동산 상승과 함께 재개발사업 역시 도시빈곤을 악화시키는 주범이다. 재개발지역으로 대개 선정되는 낙후지역들은 보통 저소득 세입자들의 주거기능을 한다. 낙후돼 있는 만큼 임차료가 낮아, 저소득 계층이 도심에서 살아갈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들이 점차 상업용이나 고급 주거용으로 개발되면서 저소득 계층이 도시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공간들이 사려져가는 것이다.

  다음으로 무제한적인 공간소유로 인한 사용되지 않는 공간의 증가 문제가 있는데, 개인이나 기업 또는 자치단체, 정부가 직접 사용하려는 목적이 아닌 이윤추구, 투기의 목적이나 비합리적 정책의 결과로 토지, 건물들을 소유함으로써 이런 공간들이 장기간 사용되지 않은 채 방치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개인이나 회사가 당장 수익의 발생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이후의 개발이익을 노리고서 장기간 소유하는 부동산이나, 자치단체, 정부가 어떤 정책적 목적으로 매입했다가 집행이 취소되거나 미뤄지면서 사용되지 않는 공간들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공간들은 소유주에 의해서 사용되지는 않지만 배타적인 소유권으로 인해,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만큼 도시 빈곤층을 포함한 시민 전체를 위한 공간들은 축소돼 간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길 위에서 사는 시대’, ‘노숙자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사용되지 않는 공간은 오히려 늘어만 가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스쾃이 사회적으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득 증가를 상회하는 부동산 상승과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없는 재개발사업 그리고 무제한적인 소유로 인한 공간낭비 등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내재적 경향으로서 공간소유의 불평등과 극단적인 도신빈곤을 만들어내는 원인-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이러한 힘들은 더욱 강력해지는 것 같다. 지금도 수천의 노숙인들이 서울거리에서 고통받고 있다.


스쾃 - 자본주의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무단점유를 의미하는 스쾃은 사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이다. 그러나 스쾃은 공간소유의 구조적인 불평등과 불안정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질곡 가운데서 주거공간의 상실이라는 극단적인 도시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 유지와 생존권적 차원에서 제기하는 직접행동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불법으로 치부할 수 없는, 사회적 해결을 요구하는 사회문제이다. 사회적인 조건들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중의 하나인 주거권을 위협한다면, 주거권을 지키기 위한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는 정당하다.

  그리고 스쾃은 생존권적 요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자본주의에 대한 주체적이고, 도발적인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즉 스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의 불법적인 방식을 통한 쟁취를 통해, 주거의 권리조차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심각성에 대한 폭로를 수행하며, 또한 물건에 대한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로서의 사적 소유권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사적 소유권에 대하여 스쾃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소유권은 언제나 주거권 또는 사회적 필요에 대해서 우선하는가?
  둘째, 소유권은 사용되지 않는 공간에 대한 사용의 권리를 배제하는가?

  소유권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쾃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운영원리를 건드는 것이다. 그리고 스쾃은 만약 주거권을 포함한 인간의 기본권과 소유권이 서로 배치된다면, 소유권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소유주가 정당한 사용계획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당장 그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사용이 허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스쾃은 소유주와 무단점유자 간의 법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공간과 권리의 분배에 대한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그리고 스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양에 대한 사회적 의지를 재는 바로미터가 된다.

  이와 관련된 프랑스 사회의 경험은 의미심장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대량의 파괴로, 전후 프랑스 사회는 심각한 주거지 부족문제를 겪어야 했다. 당시 프랑스 전체 인구의 28%에 해당하는 4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주할 공간이 없었다는 유엔 조사는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수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극한 상황은 대규모 스쾃운동을 낳았고, 또한 후일 더욱 중요해지는 법령을 낳았는데, 바로 45년의 ‘주거문제의 해결을 위한 임시 특별 법령’이다. 이 특별법의 주된 내용은 프랑스 전역의 빈 건물에 대해서 일정 정도의 조사 기간을 거친 후 정부의 권한으로 징발해 주거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주거권의 보장을 위해 소유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으로서, 이후 스쾃운동에 합법적인 성격을 부여하려는 활동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재해석된다.

  40, 50년대 이후에도 프랑스 스쾃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주거의 불안정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하며, 주거권의 보장을 위해 “할 수만 있다면 합법으로, 해야만 한다면 불법이라도” 계속 투쟁해왔다. 그리고 드디어 1995년에 ‘드라공가의 승리’를 쟁취한다. 95년의 대선을 1년 앞둔 시점에서, 여러 사회단체들이 파리 드라공가의 빈 건물을 점거하여 주거문제의 급진적인 해결을 요구했는데, 이에 당시 파리시장이었던 자크 시락(이듬해 대통령으로 당선됨)이 45년의 징발에 대한 특별법을 현실에 적용시킬 것을 결정한 것이다. 이로써 프랑스 사회는 주거 불안정성에 대한 최소의 사회적 안전장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스쾃운동이 프랑스 사회에 던진 소유권의 절대성을 향한 문제제기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합리적인 연대의 응답이었던 것이다(프랑스 스쾃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1장을, 한국에서의 스쾃운동에 대해서는 같은 책 5장 참고).


예술스쾃 -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주체적인 물음

  앞서 소개한 ‘장면 #2’는 한국의 스쾃 예술모임인 ‘오아시스 프로젝트’(이하 오하시스)가 2004년 8월 15일 목동 예술인회관을 스쾃한 사건의 한 장면이다. 오아시스는 2004년 3월에 발족했고, 첫 프로젝트로 부실한 문화행정으로 인해 7년간이나 방치되어 있던 예술인회관을 스쾃하여,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스쾃이 논의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어서 오아시스는 2005년에는 홍대거리에서의 ‘예술포장마차’와 마로니에 공원 주변의 문예진흥원 소유의 한 건물을 스쾃한 ‘오아시스 동숭동 프로젝트-720’을 기획하여, 스쾃을 통한 일상공간의 복합예술공간으로의 탈바꿈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그리고 오아시스는 2007년 스페인 아르코 아트 페어에 초청되어 마드리드에 오아시스의 예술공간을 설치하고, ‘예술스쾃 국제연대’(A.S.I.L)를 제안해 세계의 스쾃예술가들과의 교류와 연대를 강화하는 활동들을 펼쳤다(오아시스 대한 더 많은 내용은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5장을 참고).

  스쾃이 주거공간을 상실한 도시빈민에 의한, 생존권적 요구이자 자본주의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라면, 예술스쾃은 창작활동만으로는 생존을 이어갈 수 없는 예술가들에 의한, 비어있는 공간의 창작공간으로의 사용에 대한 요구이자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주체적인 물음과 태도이다.

  그런데 도시빈민들의 생존을 위한 스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식의 폭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 사회에서도, 예술가들에 의한 스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예술스쾃이 1981년의 ‘아르 크로쉬’라고 이름 붙은 스쾃을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먼저 고급스럽고 엘리트적인 것으로 알아왔던 예술가들이 도시빈민들처럼 스쾃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실상 최저생계비보조금(수입이 아예 없거나, 너무 적은 사람 등을 위해 국가에서 최저생계비를 제공하는 프랑스의 제도)으로 연명해왔던 것이다. 창작활동만으로 자신의 창작실과 생계를 유지하는 예술가들은 예술시장에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졌거나, 제도권에 안착한 소수의 사람들에 불과하다. 그렇지 못한 다수의 예술가들은 창작공간의 부재와 생계로 인해 창작활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항상 처해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창작활동의 계속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적으로 창작할 공간이 필요하고, 이런 필요성을 절감한 예술가들은 비어 있는 공간을 창작을 위한 사용의 권리를 요구하며 스쾃한 것이다.

  예술스쾃에 있어 무엇보다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이 예술가들의 창작할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이다. 주거권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중의 하나라는 데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그러나 스쾃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창작을 위한 공간사용의 권리를 스스로 정초해야 했다. 그리고 스쾃예술가들이 창작권의 정당성을 정초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 그리고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주체적으로 물음을 던져왔고, 자신과 예술의 정체성을 새롭게 재구성해왔다.

  스쾃예술가들에 있어 창작활동과 예술의 전제는 무엇보다 자율이다. 자율은 생명 그 자체이다. 자율이 없는 창작과 예술은 죽은 것에 불과하다. 자율에 의한 창작과 예술만이 생명을 갖으며, 그래서 생성할 수 있다. 그리고 생성하는 예술만이 예술의 전위적인 사회적 기능 즉, 낡고 병든 것을 혁파하고 새롭고 대안적인 사유와 감성을 창조해내는 역할을 온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예술가의 자율성이란 시장과 자본, 제도에 의해서 이미 포획되어 있는 기만적인 허상에 불과하다. 예술가들은 팔리기 위한 예술, 스폰서를 만족시키기 위한 예술, 제도에 의해 이미 틀지어진 예술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스쾃예술가들은 스쾃을 통해 시장과 자본, 제도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그래서 예술가의 진정한 자율을 정초할 수 있는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고 본다. 스쾃은 자본주의의 그 지배하는 힘이 무력화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스쾃예술가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의 전위적 기능은 스쾃이라는 형태를 통해서만 보존되고 발휘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스쾃예술은 반자본주의적이고 대안적인 생활방식의 구성에 기여함으로써 역시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스쾃은 예술가를 위한 자율적인 공간일 뿐만 아니라 누구나 일상에서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열려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스쾃예술가들은 예술스쾃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략적으로 스쾃에서의 자신들의 창작활동과 그 성과들을 지역사회에 개방하고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해왔다. 예술은 누구든지 참여하고 향유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 가운데서 예술공간과 일상공간, 그리고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예술을 규정해온 통념 즉, 고급스럽고 엘리트적인 면모들은 예술스쾃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해체된다.

  파리시에 위치한 스쾃 ‘알터나시옹’은 스쾃예술가들이 2000년 3월에 한 은행 소유의 빈 건물을 점거해 만든 것이며, 2005년 9월 철거에 의해 막이 내렸다. ‘알터나시옹’의 예술가들은 예술 장르들 간의 상호교류와 경험을 일상적 삶 속에서 나누며, 모든 이들이 예술과 문화에 친숙히 접근하는 것을 발전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찾아오는 미술가와 음악가, 연극가, 무용가들에게 창작하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을 무료로 제공했으며, 대부분의 전시와 공연 역시 무료로 개방했다. 또한 도서관, 채식주의 식당, 지역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연극 교실, 요가 교실 등 사회문화시설을 함께 운영했다. 이러한 노력들로 ‘알터나시옹’은 시민들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했으며, 시민들에게 사랑받았다(다양한 예술스쾃의 사례들은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 3장 참고).

  스쾃예술가들이 요구하는 비어있는 공간의 창작활동을 위한 사용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동의는 스쾃예술가 자신들의 능동적인 활동에 의해 달려 있을 것이다. 스쾃예술이 전위적 역할을 온전히 실천하고, 일상으로의 침투를 통해 시민들의 예술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면 스쾃은 정당한 사회적 실체로서 인정받을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스쾃

  이미 살펴보았듯이 스쾃은 무엇보다 기본적인 권리의 쟁취를 위한 직접행동이다. (창작활동의 지속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창작공간의 요구 역시 기본권적 요구로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다운 삶의 안정적인 보장에 계속 실패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쾃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폭로이며, 이를 스스로 극복하고자 하는 투쟁이다. 또한 스쾃은 사회적 필요에 따른 소유권의 제한을 급진적인 방식으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반자본주의적이며,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성격 때문에 스쾃은 소유주와 무단점유자 간의 법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공간과 권리의 분배에 대한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따라서 스쾃에는 새로운 대안사회의 운영원리에 대한 맹아적인 논의가 이미 기입돼있다. 공간과 공간에 대한 권리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의 논의는 앞으로의 사회는 어떠해야 한다는 논의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스쾃운동은 앞으로도 사적 소유권의 절대성을 향한 문제제기와 공간과 권리의 분배에 대한 급진적인 요구를 특징으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삶과 예술의 실험실 SQUAT』의 저자는 스쾃운동의 잠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규격화된 삶이 ‘상품’으로 등장하는 시대에, 스쾃은 규격의 틀을 흔들리게 하며, 위엄있는 삶의 태도를 회복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빈민, 여성, 가족, 인종, 노동, 생태, 자율, 이주노동, 노숙인, 예술, 문화 등 모든 종류의 운동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것 또한 스쾃이다. 안주하지 않는 삶, 움직이는 삶, 인간전형을 끊임없이 재창초하는 것, 저항의 양식을 새로이 창안하는 것, 예술가의 정체성을 언제나 재구성하는 것 모두가 스쾃에 포함된다. 삶의 전 과정에서, 예술의 전 과정에서 ‘창작’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정체성의 다른 표현이라고 전제할 때, 삶과 예술은 스쾃이라는 실험실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실험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모든 종류의 생산은 주류적 가치에 대항하며, 새로운 문화를 출현시킬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