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브라운의 정의


노예제를 둘러싸고 남북전쟁이 터지기 전인 1859년 12월 2일에 59세의 한 남자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백인이면서 흑인 노예를 위해 백인들에게 총을 쏘고, 노예제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실행했다가 버지니아 주 법정에 의해 교수대에 섰다. 두 해 후 버지니아 주는 남부연합의 수도가 위치하는 곳이 된다. 남부 한복판에서 노예를 위해 총을 뽑았다가 사형 당한 이의 이름은 존 브라운이다. 훗날 말콤 엑스가 자신이 대표하는 급진적 흑인해방조직에 백인이 가입할 수 있냐는 질문에 “존 브라운이 살아 있다면 아마도”라는 답변 속의 인물이다.


존 브라운과 그를 따르는 21명이 버지니아에서 실행하려한 계획은 하퍼스 페리 병기창에서 대량의 무기를 탈취하고, 인근 노예들을 무장시켜 산악지대로 옮긴 다음, 게릴라전을 벌이며 해방전쟁의 거점을 세우는 것이었다. 흑인 노예들의 무장 반란을 조직하여 노예제를 끝장내려 한 대담한 시도는 그러나, 병기창에서 연방 부대에 의해 진압당하고 말았다. 감옥에 갇혀 작성한 마지막 메모에서 그는 자기 행동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존 브라운은 이제 확신한다. 이 죄 많은 땅의 범죄들은 피로써가 아니고서는 결코 씻겨 나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생각해보건대, 그 일이 그리 많은 피 흘림 없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 헛되이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그의 확신은 남북전쟁에서 70여만 명이 죽고 나서야 노예제가 폐지되었다는 사실로 증명되었다. 납치와 인신매매, 노예화, 가혹한 폭력으로 부를 쌓아온 반인간적 체제는 스스로 멈출 수도, 평화적인 해체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오직 또 다른 폭력만이 노예제를 파괴할 수 있었다.


남부 노예제를 파괴한 북부의 전쟁을 죄악을 끝내기 위한 불가피한 정의로 받아들인다면, 노예에 총을 들려 노예제를 전복하려 했던 존 브라운의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남부 노예주의 법정은 존 브라운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폭력을 멈추기 위한 반폭력의 저항으로서 그 정의와 정당성은 훼손될 수 없다.

 

스파르타쿠스 반란


존 브라운을 단죄했던 이들은 고대 스파르타쿠스의 용기와 무자비함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3년, 이탈리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동료 검투사들과 함께 탈출하며, 로마 역사상 가장 거대한 노예반란의 지도자가 되었다. 베수비오 산에서 토벌군을 기습해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전역을 이동하며 여러 차례 로마 군단에 승리했고, 반란군은 한때 수만 명 규모로까지 커졌다. 그러나 결국 로마의 대대적인 공세 끝에 기원전 71년, 스파르타쿠스는 최후의 전투 가운데 죽고, 이후 사로잡힌 수천 명은 아피아 가도에 줄지어 만들어진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했다.


반란군의 투쟁에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의 열망과 로마에 대한 복수의 욕구가 뒤섞여 있었다. 노예는 인간이 아닌 사고파는 재산이었고, 채찍질과 낙인, 족쇄, 광산노동, 공개처형 같은 처벌에 노출되어 있었다. 검투사 역시 대중의 오락을 위한 노예였으며, 그들의 생사는 경기장의 환호에 달려있었다.


로마는 끊임없는 팽창과 전쟁을 통해 노예를 만들어냈다. 원로원 의원 같은 유력자들은 쏟아지는 노예들로 대농장(라티푼티움)을 경영하고 부를 쌓았다. 유력자들이 대규모 노예들을 유지하고 자신의 지위와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전쟁은 계속되어야 했고, 로마의 승리는 지중해와 그 주변의 수많은 종족들을 노예로 전락시켰다.


개선식과 대량의 노예를 안겨준 전쟁기계의 중추는 왕이 없는 공화국에 대한 주권자의 의무를 부담하기 위해 스스로 무장을 하고 참여한 평민들이었다. 공화정의 로마는 시민병제였고, 자신의 토지에서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짓다가, 공화국의 부름에 따라 수 년 간의 해외원정에까지 나서야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팽창과 노예제 호황 과정에서 다수의 소농들은 그 결실을 나누지 못했고, 그들이 의무를 다하는 사이 토지는 대농장으로 병합되고, 자신들은 빈민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노예제는 평민들의 삶까지 망가뜨리는 독이었으나, 평민들로 이뤄진 로마 군대는 노예반란을 무너뜨렸다. 반대로 노예제 폐지와 토지분배, 평화를 걸고 평민이 노예와 함께 싸워 귀족의 지배를 무너트릴 수는 없었을까? 실제로 일부 자유민들이 스파르타쿠스 반란에 참가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참여가 더 넓은 연대와 새로운 공동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식민지의 노예들이 스스로 봉기하여 해방을 쟁취하고, 식민제국 중심의 민중과 혁명정부는 노예제 폐지를 선언하는 극적인 순간은 훨씬 나중에야 가능했다.

 

최초로 성공한 노예혁명


1804년에 독립하기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카리브해의 생도맹그는 유럽으로 수입되는 설탕의 약 40%, 커피의 약 60%를 공급했던,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 높던 식민지였다. 높은 수익성의 비결은 생도맹그 인구의 90%를 이루었던 노예에 대한 가혹한 착취였다. 과중한 노동과 영양실조, 질병, 폭력 때문에 플랜테이션 노예의 사망률은 높았고, 아프리카로부터의 노예 수입으로 죽은 노동력을 대체했다.


그런데 1789년 식민제국의 중심이었던 프랑스 파리에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혁명에 나선 부르주아지와 도시 민중, 농민들은 신분과 출생에 따라 특권을 쥐어주는 구체제를 역사에서 지우려 했다.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선언한 혁명은 해방이 특정 집단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라 말하였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생도맹그를 비롯하여 식민지에서의 노예제는 계속 건재하였다.


하지만 혁명의 언어는 결국 노예제의 모순과 결합하였다. 1791년 생도맹그 북부 평원의 농장들에서 대규모 노예봉기가 일어나, 백인 농장주들의 지배를 무너뜨렸다. 이에 대한 파리의 처음 반응은 진압군의 파견이었다. 그런데 1793년 국제정세가 일변하였다. 유럽에서 군주국들 사이에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고, 전선은 식민지로도 확대되었다. 생도맹그에서 프랑스 공화국군은 내부에서는 노예반군과 반혁명적 백인 식민자들, 외부에서는 영국군과 스페인군에 맞서야 했다. 공화국 파견위원은 열세를 뒤집기 위해 일부 노예들에게 자유를 약속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러한 제한적 해방은 노예들의 계속된 투쟁과 전쟁의 압력 속에서 확대되어, 1793년 생도맹그 전역의 노예제 폐지로 이어졌다. 1794년 파리 국민공회는 이를 추인하고, 나아가 모든 식민지에서의 노예제 폐지를 선언하며, 공화국과 그 대의의 방어가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제로 구현해가는 길에 달려 있음을 결과적으로 보여주었다.


반대로 쿠데타로 집권하며 결국에는 공화국을 질식시키는 나폴레옹은 1802년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 생도맹그에서 노예제를 복구하려 했다. 흑인 군대는 이에 맞서 독립전쟁에 나섰고, 1803년 원정군을 최종적으로 격파하며, 이듬해 1월 1일 아이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생도맹그의 봉기는 노예들이 스스로 노예제를 무너뜨리고 반혁명적 군대를 물리쳐 독립국가를 세운, 역사상 최초의 성공한 노예혁명을 완성시켰다.


스파르타쿠스 반란과 아이티 혁명에 대한 국내서적으로는 베리 스트라우스의 <스파르타쿠스 전쟁>, 시 엘 아르 제임스의 <블랙 자코뱅>, 로런트 듀보이스의 <아이티 혁명사> 등이 있다. 존 브라운에 대해서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이 있고, 에단 호크가 존 브라운을 연기한 드라마, <The Good Lord Bird>가 흥미롭다. 가장 억압받는 자들의 자기 해방을 향한 투쟁을 읽으며 우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순간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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