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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 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사랑과 긍지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2년 6월
평점 :
꼬마일 적 「로마인 이야기」를 끊을 수 없이 읽고 나서, 시오노 나나미의 다른 책들도 찾아보았다. 그녀는 젊어서 이탈리아로 이민을 가 지중해의 역사에 관한 여러 책을 썼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책도 썼는데, 마키아벨리도 사용했을 법한 당대 피렌체의 골동품 탁자를 사와서 원고를 집필하고 있다는 구절에서는 무척 부러운 마음이 일었다. 일본인이 머나먼 이국에서 그곳의 역사를 쓰고 한국인이 읽고 있다는 게 기묘하기도 했다.
시오노 나나미와 같이 브래디 미카코도 유럽에 사는 일본인 여성 작가이다. 영국인과 결혼하여 영국에 살면서 에세이를 쓴다. 시오노 나나미가 휩쓸리는 민중보다는 군림하는 엘리트가 낫다고 믿는 파시스트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반해, 브래디 미카코에게서는 왼편의 삶이 묻어 나온다.
세계화에 반대하는 백인 노동자 아저씨들
브래디 미카코는 「아이들의 계급투쟁」,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여자들의 테러」,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등의 여러 책을 썼다. 이중에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는 브렉시트로 인해 오명을 뒤집어 쓴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계급을 위한 글이다. 브렉시트는 영국이 유럽연합(EU)를 탈퇴한 사건인데, 2016년 6월에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됐다. 단일 유럽시장이라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도도한 역사적 흐름에 역행하는 국민투표 결과가 실제로 나오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대부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설마 하던 게 실제로 일어나자, 영국에서는 이게 다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자들이 탈퇴표를 던져서라는 원성이 자자했던 모양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전후 1946년부터 1964년까지 20여 년간 폭발적인 인구증가 시대에 태어난 세대를 말하는데, 2016년이면 5, 60대의 나이이다. 이 나이 때의 아저씨들 중 특히 노동계급이 브렉시트의 열렬한 지지층으로 여겨졌던 건 이들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제조업 공동화에 일자리를 잃어왔고, 유럽연합 협정 때문에 활짝 열린 국경을 넘어 몰려드는 이민자들을 싫어하며, ‘정치적 올바름’과 ‘다양성’ 같은 가치에는 인색하다는 게 그들의 초상이다.
중장년 백인 노동자들이 정치적 퇴행의 진원지로 전락했다는 사고방식은 브렉시트 투표와 같은 해에 일어난 트럼프 당선에서도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이민자들과의 경쟁에서도 밀려나 내세울 건 백인이라는 점밖에 없는 저학력 노동자들이 반세계화와 인종주의 구호에 쉽게 선동되어 EU 탈퇴나 트럼프 당선 같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2016년이 아닌 현재 2022년에서 바라보면 브렉시트 결정은 시류를 거스른 게 아니라 선도한 셈이 됐다. 코로나 유행과 미중 무역전쟁,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화는 역전되고 글로벌 경제는 패권국의 지정학적 이익에 따라 쪼개지고 있다. 민주당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보다 더 센 강도로 무역전쟁을 이끌고 있다. 반세계화가 백인 노동자들의 불만 때문에 벌어진 일시적 이탈이 아니며,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구조적 변화 때문이라는 증거인데, 불행히도 노동자 아저씨들이 욕을 다 먹은 셈이다.
노동계급 아저씨들의 사랑과 긍지
책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는 저자와 같은 동네에 사는 아저씨들에 대한, 직접 겪고 들은 일화들을 엮은 책이다. 1부 “디스 이즈 잉글랜드 2018~2019”와 2부 “현대 영국의 세대, 계급, 술에 관하여”로 구성돼 있다.
한국에서 계급이라는 단어는 사회학 관련 책이나 집회, 시위에서의 유인물에서나 볼 수 있는 단어이지만, 산업혁명이 태어난 영국에서는 사회구성원 누구나 스스로를 규정하는데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단어라고 한다. 오랫동안 노동계급과 중류계급, 상류계급으로 나누어왔는데, 2011년에 BBC는 이러한 구분이 현재의 영국 사회에 맞지 않으므로 대신에 일곱 가지 계급(엘리트, 기성 중산층, 전문직 중산층, 새로운 부유층 노동자, 전통적 노동계급, 신흥 서비스 노동자, 프리케리아트)으로 나누는 걸 제안했다고 한다. 직업과 문화소비에서의 차이에 따라 더 세분화한 것인데, 이러한 차이가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자신을 중산층 혹은 노동계급으로 여기며, 노동계급이라고 답하는 비중은 60퍼센트라고 한다.
EU 탈퇴 국민투표 이후로 노동계급의 이미지가 악마화 되었고, 노동계급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노동계급은 모두 탈퇴파”라든가, “노동계급은 문신을 잔뜩 새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식의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편견이 노동계급을 단일한 문화적, 이념적 정체성을 지니는 집단으로 잘못 묘사하는 데서 비롯한 것이며, 실제로 노동계급 안에는 상당한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인종과 세대가, 자산과 소득 수준이 상이한 계층들이 섞여 있다. 이를 증명하듯, 책 1부의 21개의 에피소드는 노동계급 안의 저마다의 개성과 사회적 풍경들을 담아내고 있다.
미용실 사업에 성공한 젊은 여성의 동거인이 되어 은퇴하고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레이, 공영주택지에 사는 중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폭력을 막기 위해 스스로 야간 순찰대를 조직한 스티브, 여행 중에 만난 태국 여성과 결혼하여 낳은 아이와 그 여성이 태국에서 데려온 아이의 육아에 정신없는 제프, 블랙캡(택시) 운전기사로 돈을 모아 고급 주택가에 살며 매년 생일 파티를 열어 노동계급과 중산층 친구들을 모두 부르는 테리, 파업을 준비하는 조카와 함께 플래카드를 만들며 신나 하는 사이먼 등 저자의 여러 노동계급 친구들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브렉시트나 이민자, 노동운동, NHS(영국의 공공의료서비스), 일자리, 주거 등에 가지는 생각과 태도들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서로 다른 이야기들 속의 그들을 노동계급으로 묶어 부를 수 있는 건, 노동자로서 겪은 공통의 경험이 이들을 같은 계급으로 만들고 있어서이다. “이들이 겪은 같은 경험이란 보수당의 긴축 재정으로 공공서비스와 복지가 삭감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 노동조합의 약화로 기업의 힘이 비대해진 현 상황에서 악화된 고용 조건과 임금으로 인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점 등일 것이다.”(책 269쪽) EU로의 통합 과정에서 겪은 생활수준의 하락이라는 경제적 압력이, EU라는 구조 내에서는 현재 상황을 개선해낼 수 없다는 정치적 소외가 노동계급을 EU 탈퇴라는 선택지로 내몬 것일 수 있겠다.
불행한 건 이러한 노동계급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들의 선택을 비난하며 생각과 문화가 다르다는 서사가 세대 갈등으로 포장되어 사람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성공하지 못한 채로 늙은 아저씨들의 마지막 남은 똥고집이 젊은이들의 미래를 엉망(EU 탈퇴)으로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들은 건전한 문제 해결을 가로 막는 편견과 갈등만 더할 뿐이며 슬프기도 하다. 저 멀리의 아저씨들에게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Figh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