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이모션 - 달라이 라마와 세계적인 석학들이 나눈 ‘마음 치유력’에 대한 대화
달라이 라마.존 카밧진 지음, 다니엘 골먼 엮음, 김선희 옮김 / 판미동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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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대한민국에서 교육을 받은 이라면 누구나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라는 서양의 슬로건을 머릿속에 심어주던 중학교 체육시간을 거쳐 왔을 것이다. 그 말의 의미를 채 깨닫기도 전에 다시 정신력의 부재가 곧 모든 능력의 부재인 것처럼 닦달하는 시대가 온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로를 호소하며 잠시 멈추고 싶을 때도 끊임없이 눈치를 봐야 한다. 그것은 곧 나 스스로의 부족함이나 게으름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 정신력을 제대로, 원하는 대로 발휘하기에 주변의 상황은 얼마나 적절한가? 칠년 전의 나였다면 서평단에 뽑힌 후 비교적 여유있게 책을 음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맛과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식당에서 천천히 브런치를 먹는 것처럼. 그러나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은 우는 아이를 업고, 마감시간을 초조하게 재며 듬성듬성 책을 훑어나가야 한다. 컵라면이 아니라 모든 음식을 후루룩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다만 이 고운 분홍색 속지에 행여나 김칫국물이 튀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나야말로 힐링이 필요하다고 탄식하면서.

 

모두가 힐링을 들어보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두에게 똑같은 방식의 힐링이 적절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용어를 제대로 알고 내게 맞는 방식을 찾기 위해서는 내 상태와 주변을 가감없이 살펴보고, 내가 추구하는 인생관도 다시 점검해야 한다. 단순히 명상하고, 맑은 공기 쐬고, 진언을 외고, 강연을 듣고,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 것이 힐링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힐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나의 인생관과 인간관을 생각해봐야 한다. 누군가가 내어준 따뜻한 어깨에 감동하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내 어깨를 내어줄 때 더 기쁜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내 이상에 걸맞는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삶의 목표인지 아니면 풍족하고 여유있는 삶을 즐기는 것이 행복인지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에게 맞는 방식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아득하다. 나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것.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좋은 방법은 명상이다. 잡생각을 하지 않는 것. 나의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잠시 벗어두는 것. 어느 지점에 이르려고 애쓰지 않는 것은 가부좌와 함께 떠오르는 명상과는 다르다. 의외로 심호흡 몇 번이 안달복달하던 문제에 사로잡힌 나를 해방시켜주기도 한다. 해질녘에 들소로 보이던 것이 해가 뜬 후에는 바위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인지도 모르지만 나의 경우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히는 감정에서 벗어나는 효과가 있어서 좋아한다. 늘 심호흡을 할 만한 마응의 여유가 생기지 않는 것이 문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씩 괴로움을 몰고 오는 번뇌는 내 마음의 평정을 깨고, 평화를 위협한다. 그리고 내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 분노또한 나를 괴롭힌다. 이 모든 것과 나의 자존감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잘한 일 보다 잘못한 일을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미덕인 나라에 살면서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은 참 어렵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면 나의 자잘한 실수담을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쉬웠던 경험은 비단 내 경우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기는 참 어렵다. 나는 어려서부터 예쁘고 잘 하는 부분보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 더 많이 들었다. 내가 가진 소소한 재능을 알아봐주는 칭찬에는 대답하기 난처했다. 행복해지기를 원했지만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비해 내가 가진 것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행복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하는 아이라는 취급을 받았고, 커서는 남들과는 다른 나의 취향이나 생각들을 다듬어서 내놓아야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나라는 인간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고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할 수도 없었고, 나를 나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뎠던 것 같다. 내가 그냥 나라는 존재를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그저 바라볼 수 있었다면, 나의 꽃같은 시절에 나는 좀 더 행복했을 텐데. 그저 내 몸이고, 내 생각이고, 내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면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스스로를 비교하면서 우울해하는 밤이 드물었을 텐데.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어린 시절의 부모님이 해주신만큼의 사랑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내 아이들에게 자신을 그저 받아들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함께 익혀나가도록 끌어주고 싶다. 나 스스로가 내 아이를 오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 아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나의 이상에 맞게 아이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가도록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내 모습을 채찍질하지 않고, 무기력한 상태에도 빠지지 않도록 나 자신을 틈틈이 들여다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도 이제 안다.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만드는 행동일 뿐이다.

 

친절함과 성실함은 체력에서 나오고, 여유로움과 밝은 성격은 통장에서 나온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지만, 건전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은 서로 밀접한 관계인 것에 틀림없다. 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발휘되어야 하는 정신력말고, 나 자신을 온전히 살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내 몸은 어떤 상태라도 건전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밤새 보채는 아기를 안아주느라 시큰한 내 팔목을 보며 분노하고 짜증내기보다, 그저 내 팔이 힘들었구나, 덕분에 누군가는 불안해하지 않고 새근새근 잘 수 있도록 도왔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그 시작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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