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 (반양장) - 2020년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96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아남은 후에, 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원래부터 관심과 수군거림을 즐길 수 있는 기질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면 일생의 어깨에 놓인 짐이 너무 무거울 것 같다. 예전에 일하던 곳 근처에 맛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회식을 간 첫날, 직장 상사는 목소리를 낮추고 이 집 아저씨가 처제랑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고, 아줌마는 가게를 하며 신랑을 기다린다고 말을 해주었다. 놀라운 그 이야기는 직장에 신입이 들어오고 회식이 거듭되어도 자꾸 되풀이되어서 오래오래 전해졌다. 당사자에게는 얼마나 치욕이었을지. 서른해를 넘기고도 나는 몰랐다.

자기를 살린 언니에게 전적으로 고마워할 수만은 없는 유원과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의 뒤통수를 가격해야 하는 신수현의 삶은 다르면서도 닮았다. 끊임없이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절대로 저 사람과는 다른 인성임을 드러내야 할 것 같은 절박함은 두 아이의 질풍노도 시기를 더욱 가파르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래서 둘은 더 빨리 가까워진 걸까? 서로에게 속을 드러내어 보이면서 상처와 흉터를 관리하는 방법도 찾아가는 기특한 아이들.

이 책을 읽는 내내, 유원의 말대로 유원이 보기 드문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한 명 정도는 나쁜 마음먹고 훼방을 제대로 놓는 캐릭터가 있을 줄 알았는데! 신애 언니나, 목사님이나, 하다못해 정현이라도. 다 읽고 나니 유원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저런저런 하며 동정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내가 제일 모질고 나쁜 참여자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다들 그만그만하고 못 모진 사람들이어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었는데, 다들 힘들어도 자기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건만. 유원이 가장 경계했던 부류가 나처럼 불행을 기다리는 것 같은 주변인들일 텐데.

작가의 첫 소설이라고 하는데 뻔하지 않게 전개하는 솜씨 덕분에 재미있게 잘 읽었다. 주인공이 생각을 오랫동안 놓지 않고 행동도 병행하는데다 정떨어지는 인물이 딱히 없어서 불편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정현과 유원이 가까워지거나 함께하는 장면들이 조금 비현실적인 것 같아서 아쉬웠다. 개연성을 찾기가 힘들어서. 문제 해결을 위해 작가가 요긴하게 써먹기는 좋은 설정인 듯.

내가 아는 창비의 청소년 소설 주인공은 도완득과 제누와 아몬드의 주인공인데, 다들 유복하지 못한 상황의 위태로운 가정 소속이다. 완득이는 장돌뱅이 아버지와 집 나간 결혼이민자의 아들이고, 페인트의 제누는 부모가 공식적으로 없다. 아몬드의 주인공도 키워주시던 할머니와 엄마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지. 그런데 그들에게는 멘토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내미는 어른의 손이 있었다. 완득이네 똥주와 제누의 사감 선생님, 아몬드의 엄마 친구를 자처하는 아저씨. 이 소년들의 이야기가 내심 부러우면서도 또래 소녀의 이야기도 읽고 싶었던 내게 유원은 참 귀한 소녀다.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접했기 때문이고, 이 아이가 대견하고 기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원은 어른의 도움보다는 또래인 수현과 함께, 물론 수현도 사건에서 먼 인물은 아니지만, 길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